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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칼럼] "삼성과 애플에 납품해보니"

[특파원칼럼] "삼성과 애플에 납품해보니"

  • 입력 : 2010.07.29 21:53
박종세 뉴욕특파원
몇 년 전 일이다. 전자업종에서 벤처기업을 하는 A 사장이 하루는 미국 의류 갭(Gap) 티셔츠를 색깔별로 세 벌을 샀다. 그는 납품 단가를 깎고, 시제품을 만들어 보라고 시킨 뒤 돈을 안 주는 대기업의 횡포에 시달려 왔다. A 사장은 "나도 휴일엔 옷이라도 '갑(甲·gap의 발음을 비유한 것)'으로 입고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중소기업의 사정을 잘 안다는 MB정부가 들어섰지만 A 사장이 을(乙)로서 당하는 고통은 달라지지 않았다.

트위터에는 애플삼성전자에 동시에 납품을 해본 중소기업 직원의 블로그가 회자되고 있다. 애플에선 6개월치 단위로 구매예정 수량을 미리 통보하고, 설비 신규투자가 필요하면 투자비를 고려해 합리적으로 단가를 올려도 승인해준다고 한다. 이 직원은 "하지만 국내 대기업과 거래를 해 보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온 기분이었다"고 고백했다. "시도 때도 없이 휴대폰은 울리고 마음속에서 '안 하고 말지'라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런 생각이 씨가 되었는지 어느날 갑자기 수억원어치의 재고를 남겨두고 18개월간의 지옥체험은 종료되었다"고 했다.

대기업의 횡포와 중소기업의 서러움을 단지 밥벌이의 애환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갉아먹고 미래를 가로막는 문제의 본질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노쇠한 기업의 자리를 새로운 기업이 탄생해 메우는 건강한 산업의 생태계와 관련된 문제다. 몸집이 커지고 관료화된 대기업은 과감한 투자와 모험을 하기 힘든 경향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시장을 여는 '파괴적인 혁신'은 신생 중소기업들에서 일어난다.

한국 경제는 세대교체에 실패하고 있다. 노장(老將)의 분전만 눈에 띌 뿐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는 글로벌 신흥 유망주는 한국 기업 대표선수 명단에 없다. 포천지의 글로벌 500대 기업 명단에 한국은 늘 같은 얼굴이다. 전체 숫자도 별 변화가 없다. 전성기를 지난 미국도 설립한 지 10년을 겨우 넘긴 구글·아마존 등을 새로운 대표선수로 밀어넣고 있고, 신흥 경제대국 중국은 해마다 7~8개의 새로운 기업을 포천의 명단에 추가하고 있다. 미래의 애플과 구글을 꿈꾸는 한국의 벤처기업인들은 이 생태계 오작동의 책임이 대기업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기술을 가로채고, 핵심 인력을 빼내가며, 분기마다 납품단가를 깎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글이 직원 150명에 매출 5000만달러에 불과한 3년밖에 안 된 모바일광고회사 애드몹을 7억5000만달러에 사들이고, 애플 역시 비슷한 규모의 콰트로를 2억5000만달러에 인수하는 모습을 한국의 대기업에선 꿈꿀 수 없다.

정부는 대기업의 팔을 비틀어 말뿐인 투자약속을 받아내는 데 힘을 뺄 필요가 없다. 기업들은 대통령이 투자하라고 해서 투자하는 게 아니다. 돈 벌 기회가 있으면 대통령이 말려도 투자하는 게 기업의 생리다. 돈 벌 데가 없는데 대통령이 투자하라면 그럴듯한 숫자를 내놓으면서 거짓말을 한다. 어느 시대, 어떤 경우에도 기업들의 계산은 바뀌지 않는다. 이것이 시장과 기업의 논리다.

문제의 본질은 여기에 있지 않다. 우리 사회와 정부,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기술과 아이디어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이 풍토만 만들어지면 지금 대기업 몇개, 몇십개보다 더 가치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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