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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 Success] 정직만큼 위대한게 또 있을까요

[Business & Success] 정직만큼 위대한게 또 있을까요
기사입력 2010.12.31 16:36:28 | 최종수정 2010.12.31 17:39:44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나는 이 친구가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이를 `정직의 힘`이라고 말했다. 그와 거래했던 많은 한국 기업들은 가격과 제품으로 장난을 쳤지만 나는 모든 일을 정직하게 해줬다고 평가했다.

1987년 초 무역회사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영국 공항에 입국하는데 나를 미개국가에서 온 사람으로 취급했다. 무척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이날 이후 나는 "창업하게 되면 회사명을 `에프에스코리아(FSKoreaㆍFrom Seoul Korea)`로 정해 제일 먼저 영국 시장을 제패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확히 창업 5년 만에 부츠, 테스코, 슈퍼드러그와 같은 영국 화장용 브러시 시장을 40% 장악하며 화장용 브러시 시장 세계 1등이 됐다.

1970~1980년대 사회는 대부분 학생이 어렵게 공부하던 시대였다. 나 역시 대학 시절 대부분을 화장용 브러시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고학을 해야 했다. 그때까지 이 단순한 아르바이트가 내 운명을 바꾸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졸업 후 무역회사에서 2년 근무한 나는 글로벌 시장에 대해 눈을 뜨게 됐다.

1987년 말 나는 브러시와 글로벌 시장에 대한 화두를 스스로에게 던졌다.

"전 세계를 무대로 화장용 브러시를 팔아보자."

내가 살던 서울 쌍문동 19평 아파트 안방을 사무실로 해서 1988년 3월 창업을 했다. 이때 만 30세에 창업자금은 180만원이 전부였다. 사무 비품은 책상과 팩스 겸용 전화기, 전시용 브러시가 전부였다. 하지만 나는 커다란 외국 시장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는 글로벌 고객을 발굴하기 위해 무역협회로 달려갔다. 화장용 브러시를 만드는 업체가 아니라 화장품 케이스를 만드는 업체 명단을 1000여 개 찾아냈다. 영문 카탈로그를 보냈다. 기적적으로 나이지리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두 군데서 주문이 들어왔다. 기뻤지만 첫 선적은 실패였다. 나이지리아에서 받은 수표가 부도난 수표였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600만원을 날려버렸다. 당시 대학 졸업자 초봉이 40만원이었기 때문에 타격이 컸다.

오히려 오기가 생겼다. 은행에선 돈도 빌려주지 않았다. 집을 담보로 300만원을 대출받고 신용카드를 6개 만들어 30만원씩 현금서비스로 사업자금을 연명했다.

다행스럽게 사우디 대기업인 후세인&가자즈에서 주문이 이어지면서 빚을 조금씩 갚아나갈 수 있게 됐다. 그 이후 영국 콜린 브룩스에서 한국 지사장 제의가 들어왔다. 당연히 수락했고 이 회사는 영국 랑콤과 부츠까지 소개해줬다.

집에 사무실을 둔 덕분에 바이어 주문과 문의에 대해 24시간 즉답을 보낼 수 있었다. 한밤중에 따르릉 울리는 팩스 소리는 나에게 큰 기쁨을 줬다. 즉시 일어나 화장실 변기 위에서 답변을 작성해 보냈다. 이것이 주문업체들을 감동시켰다. 놀랍게 창업 첫해 23만달러 매출을 올릴 수 있었다.

창업 2년째인 1989년 큰 행운이 찾아왔다. 대형 무역상을 운영하는 미국인 부부가 찾아와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사업을 시작했습니까?" 나는 "새장에 갇혀 주인이 주는 먹이를 먹기보다 세상 밖에서 내가 먹고 싶은 먹이를 찾고 싶어 사업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그 후 몇 달 만에 부부의 아들이자 현재 20년 지기 사업파트너가 된 앨런 로버트 웜서가 사무실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공항에 프라이드를 몰고 마중을 나갔다. 차가 정차할 때마다 키 190㎝인 웜서는 "억, 억" 소리를 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큰 차로 못 모셔 미안할 따름이었다. 아파트에 마련된 `골방 사무실`과 10명이 일하는 소박한 공장을 보고 그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회사가 우리처럼 큰 회사와 일할 수 있겠느냐"는 말을 남기고 웜서는 떠났다.

나는 기대를 접었다. 그런데 몇 달 뒤 거래를 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직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자신이 만난 많은 한국 사람들은 사무실을 빌리거나 사람들을 동원해 겉모습을 보여줬는데 나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줬다는 것이었다.

웜서는 `풋케어용 돌` 공장까지 소개하며 9000달러 오더를 보내왔다. 곧이어 미국 메이블린 화장품회사에 납품할 화장용 브러시 100만개를 주문했다. 돈이 없어 할 수 없다고 하자 그는 4만달러를 선금으로 보내왔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만에 30만달러 오더와 함께 30만달러가 선입금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나는 웜서를 통해 신뢰경영에 대한 소중함을 배웠다. 그가 보내준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최고 품질로 보답했다.

그리고 이 보답은 눈덩이 같은 결과를 가져다 줬다. 웜서는 나에게 직원 150만명을 거느린 다국적회사 에이븐을 소개해줬다. 담당 부사장이 "이렇게 작은 회사와 어떻게 거래하느냐"고 말하자 그는 "내가 보증을 서겠다"며 추천했다.

웜서는 내게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는 방법, 협상 노하우 등을 전수해줬다. 1993년 그가 가르쳐준 방법대로 영국 에이븐을 찾아가 150만달러 주문을 따냈다.

1994~1995년 중국 문이 열리면서 고객들이 중국 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나는 고품질ㆍ차별화 전략으로 승부를 걸었다. 국제박람회장을 찾아다니며 지방시 로레알 랑콤 보디숍 부츠 막스&스펜서 등 세계적 브랜드 회사들을 공략했다. 중국과 동두천에 공장을 세운 데 이어 홍콩과 톈진에 사무소를 열었다. R&D센터를 만들어 디자인 역량을 강화했다.

품질에 대한 자신감으로 제품에 결함이 생길 땐 납품가가 아니라 주문업체 판매가로 물어주겠다고 약속하고 이를 실천했다. 품질에 주력한 결과 지식경제부에서 선정하는 전 세계 일류상품에 2006년부터 5년째 1등을 할 수 있었다. 재정경제부 장관상을 비롯해 수많은 상이 뒤따랐다.

2001년 국내 기업 최초로 `착한 기업` SA8000인증을 받았다. 주 44시간 노동, 18세 이하 고용 금지, 공장 안전 등 근로자 권익보호 실천기관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근로자 복지를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100만원 넘는 직원 의료비는 물론 부모 건강검진을 전액 회사에서 부담하고 있다. 전세자금은 무이자로 빌려준다.

[황재광 에프에스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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