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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봉준호 감독에게 자기복제를 강요하나

누가 봉준호 감독에게 자기복제를 강요하나

기사입력 :[ 2013-07-24 10:00 ]



‘설국열차’, 봉준호니까 꼭 그래야 한다고?

[엔터미디어=듀나의 영화낙서판] 얼마 전 봉준호의 <설국열차> 시사회가 한국과 미국에서 있었다. 지금까지 버라이어티, 스크린 인터내셔널, 트위치에 평이 올라왔고 모두 호평이다. 국내 반응은 미적지근하거나 찬반이 갈리는 편. 이해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영화 가장 그의 개성이 덜 보이는 작품이며 가장 예술적으로 불균질한 작품이기도 하다. 내 의견을 묻는다면, 나는 (<괴물> 때 그랬던 것처럼) 어느 방향으로도 갈 수 있다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한 쪽을 택하라면 (역시 <괴물> 때 그랬던 것처럼) 이 영화를 옹호하는 쪽을 택하게 될 것 같다.

우선 ‘봉준호다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그가 <설국열차>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 영화가 이전 '봉준호 영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작품이 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우리가 익숙해져 있는 그의 개성은 장르물의 관습 안에서 한국 역사와 사회의 독특한 성격을 담아내는 방식에서 나온다. 이런 시도가 가장 완벽에 가깝게 구현된 작품이 <살인의 추억>이며, 이후 거의 모든 봉준호 영화의 비평에서 이 영화는 ‘봉준호다움’의 기준점이 된다.

당연히 이러한 시도는 <설국열차>처럼 거의 추상적인 세계를 다루는 시도에서 제거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의존하고 기대했던 '봉준호스러움'이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영화에서 우리가 생각하는 봉준호다움을 찾고 그것이 없는 게 분명한 영화에서 그 '결여'부터 먼저 챙겨본다면 그건 많이 지치는 일이 아닐까? 그건 영화가 갖고 있는 고유의 재미를 놓쳐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감독에게 자기복제를 강요하는 불필요한 족쇄이다.

그리고 <설국열차>는 그런 결여가 그렇게 많이 보이는 영화도 아니다. 캐릭터가 단순한 원형에 가깝고, 멜로드라마의 공식이 지배하는 영화인 것은 맞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연기와 스토리에는 기존의 봉준호 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다른 재료들이 있다. 예를 들어 틸다 스윈턴의 요크셔 억양은 영어권 사용자 관객들에게 한국어의 지역 사투리에 비할 수 있는 자극을 줄 것이다. 켈리 마스터슨이 참여한 영화의 대사 역시 <베를린> 때와는 달리 단순한 한국어의 번역이 아니다. 한반도라는 구체적인 공간의 역사가 사라지긴 했지만, 이 자리는 한국영화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장르 SF 논리가 차지한다. 다시 말해 연기에서부터 설정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 당연히 우린 그것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각도로 읽어야 한다.



아까 말을 뒤집는 것 같지만, 그 결과물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더 봉준호답고 심지어 더 한국적이기도 하다. 영화 막판에 송강호와 고아성 캐릭터를 이용하는 부분을 보라. 송강호의 한국어 대사와는 상관없이, 이 부분에서는 강한 한국적인 개성이 할리우드스러운 다국적 설정 속에서 꼿꼿하게 살아있다. 단지 캔버스가 넓어졌을 뿐이다.

영화의 재미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액션물로서의 재미가 중반 이후 떨어지고 템포가 느려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만약 관객들이 예고편에서 본 액션이 영화 끝까지 이어진다면 그건 <올드보이>에 나오는 장도리 액션신의 횡스크롤을 일인칭으로 바꾸어 영화 내내 무한반복하는 것이 될 것이다. 당연히 무언가 다른 것이 나와 그 액션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관객들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 점점 힘센 상대와 점점 더 강도 높은 액션이 클라이맥스에 최종보스를 상대하는 구조를 상상했을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그냥 그게 아니다. 영화가, 우리가 예상하는 구조를 택하지는 않았다고 해서 그게 계약위반은 아니다.

심지어 <설국열차>는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만큼의 액션영화도 아닌 것 같다. 나보고 말하라면 이건 액션물이라기보다는 탐험물이라고 말하겠다. 영화의 이야기나 구조는 은근슬쩍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을 닮았다. <설국열차>는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언급만 되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찾아 일직선으로 연결된 폐쇄적인 세계를 여행하는 탐험가의 이야기다.



장르를 이렇게만 바꾸어도 관객들이 기대하는 리듬은 달라진다. 액션물의 관객들은 클라이맥스까지 일직선으로 가속하는 구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탐험가의 이야기를 보러 가는 사람들은 여정의 보다 느긋한 호흡조절과 심지어 그 여정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일시적인 액션의 정지도 원할 것이다. 그 논리를 따라 생각해본다면 <설국열차>의 리듬은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동일한 크기의 객차에서 직선 이동하는 주인공들'이라는 테마를 라벨의 <볼레로>처럼 끊임없이 변주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바꾸어가는 형식을 고려해보면, 이 영화는 사실 중간에 속도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케스트라의 비유를 연장한다면, 단지 타악기와 브라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연주하던 선율을 몇몇 변주에서는 첼로가 연주할 뿐이다. 그렇다고 막판에 액션이 없는 것도 아니다.

<설국열차>는 봉준호 최대 걸작도 아니고 가장 완벽하게 만들어진 영화도 아니다. 아마 그렇게 철저하게 이치에 맞는 영화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건 우리가 그의 성공작으로 기억하는 <괴물>도 마찬가지였다. (여러분은 한강에 괴물이 나타났는데, 엉뚱하게 감염자들만 사냥의 대상이 되는 설정이 납득이 되는가?) 한 감독이 만들었다고 해서 그가 만든 모든 영화들이 한 줄로 서야 하는 것도 아니고, 그 영화들이 모두 걸작이나 완벽함을 추구할 필요도 없다. 모든 예술작품들이 그렇듯 영화는 필연적인 불완전성 속에서 자기 목소리를 낸다. 여러분은 <설국열차>의 그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었는가.

칼럼니스트 듀나 djuna01@empas.com

[사진=영화 <설국열차>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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