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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한현우의 커튼 콜] 쪽박날 거란 영화들로 대박 행진… '명필름' 심재명 대표

[Why] [한현우의 커튼 콜] 쪽박날 거란 영화들로 대박 행진… '명필름' 심재명 대표

날 키운건 열등감 그리고 딱 그만큼의 꿈…
"'박쥐' 시나리오 들고 다니던 박찬욱 감독에 'JSA' 맡겨 대박"
조선일보 | 한현우 | 입력 2012.06.02 14:52 | 수정 2012.06.02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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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만 돌파 '건축학개론'_밋밋하다며 10년째 퇴짜… 고치다 엉망 된 시나리오, 폭력·시한부 설정 다 빼고 원래 감성 복구시켜 흥행
그녀만의 '영화학개론'_美大너무 가고 싶었지만 화실도 못 갔던 어린 시절… 유일한 위안 '주말의 명화' 접속·우생순·시라노… 이유없이 사람 죽지 않고 사람냄새 나는 얘기로 승부


방 두 칸짜리 셋집에서 2남2녀를 포함한 여섯 식구가 살았다. 부친의 섬유 관련 사업이 뜻대로 되지 않아 식구들은 늘 쪼들렸다. 이 집 맏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궁즉통(窮則通)이 아니라 궁즉열(窮則劣)이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여자 아이에게 곤궁함은 곧 열등감이었다. 그림을 곧잘 그렸으나 화실 보내줄 돈이 없던 부모는 "미대는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말도 없고 친구도 없어 늘 혼자 다니던 아이는 토요일 밤 TV 앞에서 '주말의 명화'를 보며 멋진 사람들의 멋진 세상을 구경했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천천히 자신이 꿈꾸는 세상 쪽으로 움직였다. 이제 그는 자신이 꿈꾸던 세상이 먼저 다가오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조선일보]심재명 대표는 작년 애니메이션‘마당을 나온 암탉’의 카피를‘한국영화의 아름다운 도전’이라고 썼다. 그것이 명필름이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고 했다.‘ 한국영화 2.0’을 개척해 온 그녀의 도전은 진정 아름다웠다. / 채승우 기자

↑ [조선일보]심재명은 현재 '충무로 최고의 여성 제작자'로 불리지만, 그 말은 '최고의 제작자'로 수정돼야 마땅하다. 그는 "전국 2000개 스크린 가운데 예술영화 전용관이 100개는 넘어야 하고, 그런 영화의 다양성이 결국 영화산업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 영화계는 '멋진 1등'을 갖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 [조선일보]

그가 영화사 '명필름'의 대표 심재명(49)이다. 회사 설립 직후 영화 '접속(1997)'을 내놓아 충무로를 깜짝 놀라게 하고, 영화 평론 원고료로 생활하던 감독 박찬욱을 캐스팅해 '공동경비구역 JSA(2000)'를 터뜨렸다. '와이키키 브라더스(2001)' '그때 그사람들(2005)'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시라노 연애조작단(2010)' 같은 화제작에 이어 작년 가을 애니메이션 '마당을 나온 암탉'으로 220만명을 끌어모아 한국 애니메이션 최다 관객을 동원했다. 명필름이 마케팅을 총괄한 올 초 영화 '부러진 화살'은 350만명을 기록했다. 제작비 5억원의 저예산 영화였다. 지난 3월 개봉한 '건축학개론'은 한국 멜로영화 사상 최다인 410만명이 관람했다. 이 기록은 'JSA' 580만명에 이어 명필름 역대 2위다. 대나무 쪼개듯 쩍쩍 나아가는 기세가 보통 맹렬한 게 아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작년 가을부터 지금까지 명필름의 성과를 보면 영화 선구안과 퀄리티 조절 능력이 단연 충무로 최고"라며 "흥행하기 어려운 장르, 소재, 시나리오에 제작사의 색깔을 입혀 흥행시키는 감각이 놀랍다"고 말했다.

서울 사직공원 근처 필운동 2층 단독주택을 개조한 명필름 사옥은 오랫동안 드나들던 친구네 집 같은 분위기였다. 반려견으로 이름난 골든리트리버 암컷이 단풍나무 그늘 아래서 상팔자(上八字)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난달 29일 오후 이곳에서 '현재 충무로 최고의 제작자' 심 대표를 만났다.

"만년 대리처럼 일하는 사람"

―영화 제작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한집안의 가장 같은 존재죠. 감독이 재능을 꽃피울 수 있도록 해주고, 먹고살 돈을 마련하는 사람이에요. 영화의 출발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재능과 돈을 모으는 거간꾼이라고 할 수 있죠."

―제작자는 창작자입니까, 사업가입니까.

"창작 마인드와 비즈니스 마인드를 동시에 갖고 있는 제작자가 경쟁력 있고 오래갑니다. 저희 회사는 저와 공동 대표를 맡고 있는 이은 감독(그는 심 대표의 남편이기도 하다)과 제가 조금씩 성향과 역량이 달라 그 두 가지를 각각 보충하고 있어요."

―한국 영화계에 제작자라는 개념이 도입된 게 언제인가요.

"1990년대 초반에 우선 영화 기획자의 시대가 시작됐어요. 영화사 신씨네의 '결혼이야기'를 필두로 영화 기획의 중요성이 부각됐고, 자연스럽게 그런 마인드를 가진 영화인들에게 대기업이 투자를 시작하면서 제작자 시대가 열렸죠. 90년대 후반 '살인의 추억'을 제작한 차승재 대표를 비롯해 제작자 중심 영화들이 활발하게 만들어졌어요."

―'건축학개론'이 410만명을 동원했는데 소감은.

"관객들이 좋아할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어요. 영화를 만들 때 늘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 영화는 140만명만 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란 판단은 어느 시점에 합니까.

"완성된 시나리오를 보고 해요. 그때 판단하지 않으면 왜 영화를 찍겠어요. 대부분 영화는 시나리오 개발 과정을 거쳐 관객들이 좋아하겠다고 판단하면 파이낸싱과 캐스팅을 하며 구체적인 준비를 시작합니다."

―모든 영화가 '관객들이 좋아할 것'이란 전제하에 만드는 건데 왜 흥행하는 영화는 적은가요.

"관객이란 잠재 소비자들의 수요를 읽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아요. 한국 영화 10편 중 2편만 손익분기점을 넘는 이유도 거기에 있죠."

―'건축학개론'으로 명필름이 얻는 수익은 얼마쯤 됩니까.

"어림잡아 20억원쯤 됩니다. 400만이란 숫자에 비해서는 굉장히 적은 편이죠. 저희 회사 1년 경상비가 10억원쯤 되니까 매년 '건축학개론'이 한 편씩은 나와야 빚지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거죠."

최초의 여성 영화 카피라이터

심 대표는 동덕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1987년 출판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신문사, 광고회사, 영화잡지사처럼 글 쓰는 직장에서 일하고 싶어했던 그는 '이른바 일류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한 것도 아니어서'몇 군데 입사 시험에서 낙방한 뒤 출판사로 방향을 틀었다. 4개월여의 고된 출판사 막내 시절 어느 날 그는 신문 구인란에서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 모집'이란 광고를 봤다.

첫 여성 영화 카피라이터
출판사서 일하다 광고 보고 극장 들어가 맨땅에 헤딩… 전임자는 이준익 감독 아직도 영화 카피 직접 써


충무로 新인류의 등장
'노는 계집 창' 개봉한 날, 조명·촬영·음악·미술… 완전히 다른 영화 '접속' 신인 전도연과 돌풍 일으켜


대박? 본전만 건지자
처참하게 망한 감독·제작자… 다음영화 하기 정말 힘들어 한국영화 10개 개봉작 중 손익분기점 넘는 건 2편뿐


'불후의 명작'을 위해…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흐 그림이 촌스럽지 않듯 '대부'는 유행타지 않는 영화
그런 흠결 없는 작품 꿈꿔

―그렇게 서울극장에 취직하게 된 건가요.

"원래 하고 싶은 일은 광고 카피라이터였어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에 대한 꿈은 있었지만 그건 감독이나 배우처럼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영화 광고 카피라이터'라니, 영화와 광고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이게 웬 기회냐 싶어 용기를 냈죠."

―그때 영화계에 여성 카피라이터가 있었나요.

"없었어요. 그나마 그 구인 광고를 알아볼 수 있었던 건 영화에 대한 꾸준한 관심 덕분이었죠. 대학 다닐 때 영화 잡지 '스크린' 학생기자로 일했어요. 그 잡지를 열심히 읽다 보니까 명보극장의 김정률씨를 비롯해 영화 카피로 유명한 분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죠. 학교 다니면서도 카피라이터 입문서나 광고 책들을 읽은 터라 카피를 쓴다는 게 낯설지는 않았어요." 심 대표는 지금도 명필름 영화 카피를 직접 쓴다. 한동안 그와 함께 명필름을 운영했던 친동생 심보경(보경사 대표)은 "어떻게 아직도 카피를 직접 쓰고 만년 대리처럼 일을 하느냐고 타박해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이 심재명 대표"라며 "집에서 함께 뒹굴고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을 함께 영화 일을 하면서 알게 됐다"고 했다.

―영화계에 여성 인력이 거의 없을 때였죠.

"저 이전에 서울극장에서 카피를 쓰던 분이 이준익 감독님이에요. 이 감독은 광고 디자인 회사를 만들어 독립한 상태였죠. 서울극장으로 출근했더니 다들 '어, 여자가 왔네' 하면서 '미스 심'이라고 불렀어요."

―왜 영화계에 여성 인력이 없었습니까.

"영화가 굉장히 육체적으로 강도 높은 일이고 촬영현장도 주야를 가리지 않죠. 그러다 보니까 기회가 아예 차단된 것 같아요. 예전에는 현장에서 오직 스크립터만 여자였고, 그 사람을 '스크립걸'이라고 불렀어요. 우리나라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은 현장에 아기를 업고 와서 '레디, 액션!'을 외쳤고 여자란 이유로 스태프 밥도 손수 지어 먹였다고 하죠."

영화 '몽파르나스의 등불'의 충격

―직장을 그렇게 쉽게 바꿀 만큼 영화를 좋아했습니까.

"영화광까지는 아니어도 영화를 열심히 보는 아이였어요. 매주말 밤마다 '주말의 명화'를 봐야만 했죠. 집에 비디오 플레이어가 없어서 친척집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죠. 중학교 때 꿈을 발표하는 시간에 '영화감독'이라고 말한 적도 있고요. 중·고등학교 때는 미성년자 관람 불가 영화를 몰래 보고, 일기장에 꼬박꼬박 영화 감상문을 썼어요. 대학 때는 프랑스문화원에서 매주 화요일에 영화를 봤죠. 학교 축제 때면 혼자 영화 상영회 대자보 붙이고 빌려온 외국 영화 비디오를 시청각실에서 틀기도 했어요. 1인 동아리처럼 말이에요. 뭔가 본격적으로는 하지 못하고 변방에서 우물쭈물하는 그런 아이였지만 계속 영화에 관심을 갖고 있었죠."

―집안이 어렵던 시절에 영화로 위안을 받은 건가요.

"아주 어렸을 때는 화가가 되고 싶었어요. 중1 때 미술선생님이 작업실을 혼자 쓰게 해줄 만큼 그림도 잘 그렸어요. 그런데 집에서는 미대는커녕 화실도 보내주지 못했죠. 그런데 중2 때 프랑스 최고의 미남 배우 제라르 필립이 나온 '몽파르나스의 등불'이란 영화를 '주말의 명화'에서 보게 됐어요. 모딜리아니의 전기영화였는데 그걸 보면서 너무 놀라고 두근거려서 밤을 꼴딱 새웠어요. 나는 미술을 하고 싶지만 미대를 갈 수 없는데, 내가 좋아하는 화가의 인생을 저렇게 영상으로도 표현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죠. 어떤 화가를 그림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본 것은 충격이었어요. 그 영화가 제 인생의 계기가 됐어요. 그날 밤 저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면 영화를 해야 하나'하고 나름대로 심각하게 고민했어요."

―어머니께서 충분히 뒷바라지 못 해준 걸 가슴 아파했겠네요.

"그렇죠. 그래도 저는 독립심이 강해서 부모님을 원망하지는 않았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주인집 꼬맹이한테 한글을 가르치고 받은 돈으로 중학교 갈 때 입을 옷을 산 게 제가 처음 한 아르바이트였어요. 그때부터 대학 졸업할 때까지 아르바이트를 쉰 적이 거의 없었죠. 집이 어렵기도 했지만 스스로 뭔가 이뤄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어요."

―주인집 아이를 가르쳤다는 건 세 들어 살았다는 뜻이군요.

"마당을 두고 'ㄷ'자로 꺾어진 집의 방 두 칸을 세 들어 살았죠. 서울에서도 변두리인 면목동이었어요. 부모님과 2남2녀가 방 두 칸에 살아야 했으니… 참, 별 얘기를 다 하네." 어떤 이들은 과거의 궁핍을 현재 성과의 광택제로 쓰지만 심 대표는 그렇지 않았다.

서울극장 카피라이터 심재명은 피곤한 줄 몰랐다.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이었는데도 일을 아주 빠르게 알게 됐다"고 했다. 그녀는 극동스크린이라는 영화 제작사로 직장을 옮겨 기획실장 직책까지 맡았다. 그곳에서 영화 제작에 대해 배운 그는 1992년 '명기획'이란 영화 마케팅회사를 세웠다. 충무로에 마케팅 전문 회사는 처음이었다.

'접속'과 영화 엘리트의 출현

―'명기획' '명필름' 모두 소박한 이름이네요.

"단순하고 평범하고 직설적이죠. '명기획'은 제 이름에서 따오긴 했지만 '명기획자'라는 뜻도 되겠다 싶어서 택했어요. 사실 그런 작명법은 명필름 영화들 제목에도 적용돼요. 어렵지 않으면서 스트레이트하고 본질을 담고 있죠. 멋들어진 외래어를 쓰거나 하지 않고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지요."

'명기획' 3년 만에 그는 95년 '명필름'을 세웠다. 그 전해엔 이은 감독과 결혼도 했다. 심재명은 이른바 '충무로 세대'의 마지막 주자였으나 이은 감독은 '오! 꿈의 나라(1989)'로 대표되는 영화운동가 출신이다. 대학가에서 영화운동을 하던 남자와 충무로에서 영화 마케팅을 개척하던 여자의 결혼은 명필름 첫 작품 '코르셋(1996)'에 이어 내놓은 '접속'에서 엄청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접속'은 '오! 꿈의 나라'를 공동 연출한 장윤현 감독이 PC통신 세대의 사랑을 영상 언어로 풀어낸 작품이었다. 제작자도, 감독도, 이 영화로 데뷔한 배우 전도연도 모두 새로운 얼굴이었는데 말 그대로 '대박'이 터졌다. 당시 '접속'은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했다. 건너편 단성사에서는 '노는 계집 창(娼)'이, 서울극장에서는 '마리아와 여인숙'이 개봉됐다. 명필름 영화는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달랐다. 이 영화가 서울에서만 68만명을 동원했다. 전산 집계가 없던 시절이지만 전국 500만명가량이 관람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 영화는 충무로에 신인류가 등장한 사실을 선언하는 상징적 작품이 됐다.

―한국 영화계를 현재 시스템으로 도약시킨 '영화 엘리트'의 출현이라고 봐도 됩니까.

"'접속'은 말 그대로 '웰메이드 영화'였어요. 조명, 촬영, 음향, 미술까지 혁신적이었죠. 그리고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충무로 출신이 아닌 성분이 다른 사람들이었어요. 그들을 영화 엘리트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그 사람들과 충무로 마지막 세대인 제가 만나서 그간의 한국 영화와 결이 다른 작품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어요. 정말 놀라운 시절이었어요. 96년에 김기덕 감독이 '악어'를 들고 나왔고, 홍상수 감독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내놓았죠. 98년엔 허진호 감독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개봉했어요. 젊은 영화 세대가 폭발하듯이 나타난 시기였죠."

심재명은 현재 '충무로 최고의 여성 제작자'로 불리지만, 그 말은 '최고의 제작자'로 수정돼야 마땅하다. 그는 "전국 2000개 스크린 가운데 예술영화 전용관이 100개는 넘어야 하고, 그런 영화의 다양성이 결국 영화산업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했다. 한국 영화계는 '멋진 1등'을 갖고 있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공동경비구역 JSA'를 박찬욱 감독에게 맡긴 것도 의외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박찬욱 영화 계보와는 많이 다른 영화잖아요.

"'올드보이'나 '박쥐'와는 많이 다른 영화죠. 'JSA'를 박 감독에게 맡길 때 박 감독은 이미 '박쥐' 시나리오를 가방에 넣고 다녔어요. 박 감독이 그때까지는 흥행작이 없었지만 굉장히 독특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광이며 지적인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에 흔쾌히 맡겼죠. JSA는 용기를 많이 냈던 작품인데 상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냈어요. 워낙 제작비가 많이 들어서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을지 불안했거든요."

―손익분기점이 목표라는 건 본전을 바라보고 사업을 한다는 뜻인가요.

"영화는 다른 사업과 달라서 참여한 사람이 손해를 보지 않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한 번 손해를 내면 다음 영화를 만들기가 워낙 힘들기 때문이죠. 처참하게 실패한 감독에겐 연출을 맡기지 않고, 손해를 낸 제작사엔 투자사가 붙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작자가 얼마를 남기겠다는 생각보다 손해를 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리스크 관리하는 게 매우 중요해요."

―여전히 '대박'을 노리고 뛰어드는 제작자들이 있잖습니까.

"제작자의 마인드를 보면 결과가 어떨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요. 한방에 해결하려는 사람은 곧 영화계를 떠날 사람이죠.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노하우를 축적하는 사람은 오래 버티고요. 그래서 결국 사람을 잘 지켜보는 게 제 일이에요. 감독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배우는 어떤 자세로 연기를 하는지 계속 눈여겨봐야 하는 거죠."

'궁극의 영화'를 향한 열망

명필름은 2004년 강제규필름과 함께 'MK픽처스'를 설립해 투자·배급업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결과는 초라했다. 그때 명필름은 서울 반포로 사무실을 옮겼으나 MK픽처스를 접으면서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MK픽처스 때 말고는 계속 강북의 오래된 주택가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저희 영화에 강남이 무대인 작품이 없어요. '건축학개론'만 해도 정릉이 주무대잖아요. 이쪽이 마음이 편하고 기운도 맞고, 또 사람 사는 곳 같기도 해요. 저는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 집과 좋아하는 곳이 그 사람의 가치관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요. 일본 애니메이션 회사인 지브리 스튜디오에 가보면 그 마을 풍경이 지브리의 영화와 닮은 걸 알게 되죠. 명필름 사옥, 영화 제목, 로고들이 모두 영화사의 성향을 말해주는 거죠."

영화계에서는 '명 색깔', '명 취향'이란 말로 통용되는 은어가 있다. 명필름 영화들만의 특성인데, 별 이유 없이 사람이 죽는다든가 하는 내용은 시나리오 단계에서 삭제된다. 그 대신 아기자기하고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 가족의 가치 같은 것을 선호하는 명필름의 취향을 뜻한다. '건축학개론'의 이용주 감독은 시나리오를 10년 전부터 들고 다니면서 계속 퇴짜를 맞다가 명필름을 만났다. 퇴짜를 맞은 주요 이유가 "이야기가 너무 밋밋하다"는 것이어서 그는 계속 시나리오를 고쳐 왔다. 그러나 명필름은 이 시나리오에서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다 빼고 애초의 원고와 비슷한 감성으로 복구시켰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를 고치다 보니 극 중 한가인이 아이돌 가수 출신인데 남편에게 맞는 설정까지 갔었다"며 "그것도 안 통하면 '시한부 인생' 카드를 쓰려고 했을 때쯤 명필름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는 심 대표에 대해 "흥행될 영화보다는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 사람"이라고 했다.

―흥행에 실패한 경우엔 심경이 어떻습니까.

"수익이 -90%까지 떨어진 영화가 있었어요. 막무가내로 표현하면 아, 죽고 싶다,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죠. 엄청난 자기 모멸과 내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에요. 그래도 역시 기억에 남는 영화는 실패한 영화예요.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하고요."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입니까.

"영화 한 편이 누구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마음을 흔드는 영화, 오래 기억되는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런 궁극의 영화를 만든다는 게 그만큼 어려운 일이죠. 바로 그것이 영화라는 예술에 대해 경외감을 갖는 이유이기도 해요. 흠이라곤 없는 '절대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 영화라는 매체가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대부'는 결코 유행을 타지 않는 영화죠. 마치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흐 그림이 촌스럽지 않은 것처럼."

―아직도 그런 영화를 보면 가슴이 뜁니까.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이를테면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어두운 공장지대에서 범인을 잡으려고 질주하며 눈을 부라리는 장면을 볼 때 이 영화가 끝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영화와 함께 심 대표의 삶은 점점 좋아졌습니까.

"굉장히 그리고 점점 더 좋아지고 있어요. 영화를 통해서, 별것 없던 제가 그나마 조금씩 나아졌어요. 영화를 통해 만난 사람들, 영화가 만들어낸 결과 덕분에 제가 예전보다는 큰 그릇이 됐어요."

―과거의 총합이 현재의 나라고 가정할 때 과거의 어떤 부분이 현재에 가장 크게 기여했습니까.

"결핍과 열등감 그리고 딱 그만큼의 꿈이었어요. 그 세 가지가 저를 만들었어요. 상처받고 주눅들었던 시절에 재능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호기심은 더 많았어요. 절박하게 내 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런 게 있었어요."

심 대표는 자신의 삶을 수식하고 포장하는 데 인색했다. 별수 없이 영화계 인사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는데 그로부터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는 이러했다. '간장 종지만한 사람이 영화 덕분에 김치 보시기 정도 그릇이 된 것 같은데 매우 큰 그릇이 됐다고 떠벌린 건 아닌지 염려됩니다. 여하튼 영화는 나의 사랑, 고마운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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