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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생태계/지식

국가재건 위한 과학강국의 꿈

국가재건 위한 과학강국의 꿈현대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한 지식인들의 노력2011년 04월 26일(화)

한국SF를 찾아서 해방 후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일제로부터 기득권을 인수한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을 위한 대의에 과학기술의 중요함을 깨닫고 조선학술원, 조선과학기술연맹, 조선공업기술연맹 그리고 다양한 유관기술협회 등을 조직했으며 ‘대중과학’, ‘현대과학’, ‘과학세기’, ‘과학나라’, ‘과학과 발명’ 같은 과학잡지들도 다수 발행하였다. 1960년대 이러한 잡지들에 해외 과학소설 작품들이 더러 번역 연재되었던 사례로 보아 이 시기에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필자의 한계로 아직 문헌상으로 확인하지 못하였다. 

안타깝게도 현대국가로 빨리 탈바꿈하기 위해 과학강국의 꿈을 이루려던 지식인들과 과학자들의 노력은 당대 사회전반을 뒤흔든 정치, 사회, 경제적 난맥상과 이념갈등으로 제자리를 잡기 못했다. 그 동안 양성된 소수의 과학자들마저 국립서울대와 김일성종합대학을 놓고 패가 갈리는 와중1)에 국민대중의 관심이 과학으로 연결되기에는 무리였다. 따라서 과학문명의 비전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려냄으로서 존재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과학소설이 대중 앞에 비전을 보여주기에는 현실과의 괴리가 너무나 컸다. 

이는 2차 대전 후 공산화된 중국과 자본주의화된 일본이 과학소설을 각기 나름의 이유로 중흥시킨 사례와 대비된다. 중국은 국민대중(특히 청소년)의 과학인식수준을 끌어올리는 수단으로서, 일본은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 틈새시장(청소년) 공략의 일환으로 과학소설 출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반면 비슷한 시기의 우리나라에는 과학자들부터 자리를 못 잡고 이합집산하며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니 과학소설을 쓰는 행위는 사치스럽기 그지없는 사상누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유토피아 세계를 벗어난 작가, 안동민 

▲ 1955년 국내 출간된 유토피아 소설,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 Lost Horizon; 1933년> 
과적으로 이 시기에 과학잡지에 실리거나 단행본으로 나온 과학소설들의 수는 많지 않아 보인다. 이쪽 관련 사료수집이 어렵다보니 확언하기는 곤란하지만, 1950년대에는 적어도 해외 번역물이 6종 그리고 창작분야에서는 한낙원의 작품이 눈에 띈다. 번역된 작품들의 면면을 보면, 제임스 힐튼(James Hilton)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1933년)’이 1955년, 줄 베르느의 ‘해저 2만 리그’를 번역한 ‘해저여행’이 1956년, ‘80일 간의 세계일주’가 1959년, H. G. 웰즈(Wells)의 ‘투명인간(The Invisible Man; 1897년)’과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 1898년)’이 1959년 그리고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의 ‘멋진 신세계 Brave New World’가 1959년 출간되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서구인들을 야만적이고 무식한 사람들로 그리면서, 잃어버린 이상향 샹그릴라(Shangri-La)에 사는 거의 불사에 가까운 사람들은 진정 지혜로운 사람들로 묘사한다. 서구인의 편협한 유토피아 세계에서 벗어난 이 장편소설의 우리말 역자는 안동민이다. 

안동민은 기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서울대 국문과 출신으로 195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성화’로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한 그는 1991년 정리되어 나온 전집에서 보듯 일반소설과 시, 수필 등을 쓰는 한편으로 과학소설의 번역과 창작 그리고 비평에까지 손을 댔다. 더욱이 40대 이후 심령과학에 심취하여 30여종의 관련 저술로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반향을 일으켰다.2) 여기서는 이 글의 취지에 맞게 과학소설에만 초점을 맞춰 그의 업적을 요약하고자 한다. 

1950년대에 안동민이 ‘잃어버린 지평선’ 외에 어떤 과학소설들을 추가로 번역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으나 1968년 라이트의 ‘수수께끼의 떠돌이별 X’와 1970년 필립 와일리(Philip Wylie)의 ‘세계들이 충돌할 때(When Worlds Collide)’를 번역 출간한 것으로 보건데 해외 과학소설의 우리말 소개에 꾸준한 관심을 보인 듯하다. 더욱이 1972년 그의 창작 중편 ‘2064년’이 한낙원의 중편 ‘우주소년삼총사’와 한데 묶여 단행본(동민문화사 간행)으로 나왔고 1990년대 간행된 안동민 전집 중 제7권에 ‘2064년’을 비롯해서 그동안 발표되었던 그의 과학소설 중단편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안동민은 1950년대~1970년대 초 사이 과학소설 중단편을 여러 편 창작한 듯하다. 

과학소설의 선구자로 활약

왜냐하면 그 이후 작가가 주로 심령과학에 치중한서적만 펴냈기 때문이다. 일본어중역판인 ‘잃어버린 지평선’ 같은 번역물이 어른용이었다면 그의 창작 과학소설은 전부 청소년용이었다. 또한 안동민은 1960년대에 “공상과학소설의 마법(空想科學小說에 魔法)”이란 제목의 학술논문까지 썼다. 이 평론은 1968년 5월 출간된 학술지 ‘세대’에 수록되었다(pp.331-335).3) 따라서 안동민은 해방 이전의 작가들과는 달리 과학소설을 단편적으로 소개하는 차원이 아니라 번역과 창작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학술지에 관련비평까지 게재했다는 점에서 같은 시기 창작 과학소설 분야에서 활발한 작품 활동을 보인 한낙원과 더불어 해방 후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여명을 밝힌 선구자라 할 수 있다. 

▲ 국내 과학소설의 개척자 안동민 
오늘날 과학소설계에 대한 안동민의 기여가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청소년 대상의 과학소설을 썼기 때문이다.4) 하지만 당시 주독자 층이 청소년 위주였다는 현실을 고려하건데, 앞으로 그의 활동의 역사적 가치를 검증하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서 언급한 번역물들 가운데에서 ‘해저여행’은 청소년용이다 보니 완역이 아닌 초역이란 한계를 갖지만 전체 줄거리를 다 우리말로 옮겼다는 점에서 구한말 박용희의 ‘해저여행기담’이 줄 베르느의 같은 원작을 연재하다 중단했던 아쉬움을 달래준다. ‘해저여행’은 동국문화사에서 펴낸 ‘세계명작선집’에 포함된 아동대상 문고판의 일부였다. 1950년대에는 영문학자 권세호가 번역한 ‘멋진 신세계’를 제외하고는 원본의 출처를 밝히기는 커녕 일어판 중역이 대부분인데다 청소년용 초역본들이 반수가 넘어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는 번역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1. 해방 후 귀국한 과학자들 중 약 반수에 해당하는 80여명이 개인적인 이념 때문이 아니라 서울대학교 설립을 둘러싼 분쟁 탓에, 혹은 이 분쟁에 대한 공개적 입장 표명 후 가해진 정부의 압박 때문에 월북했다. (자료원: 박성래 외, 우리과학 100년, 현암사, 2000년, 147~148쪽)

2. 안동민은 종교와 과학 중간에 자리한 심령과학을 추구함으로서 영적 세계를 과학적 원리를 동원해 설명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심령이론에는 초고대문명과 외계인 그리고 초능력 같은 SF적인 소재들이 자주 눈에 띈다.

3. 이 논문이 수록된 학술지 ‘세대’는 현재 국회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4. 안동민은 자신의 자전적인 고백록 ‘나, 과거로의 여행’에서 자신이 사회를 위해 노력한 바에 비해 돌아오는 대가, 즉 사회로부터의 인정이 너무 박해 고독감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작가가 후기의 활동을 심령치료와 연구 쪽으로 선회하게 된 데에는 이러한 요인이 큰 듯하다. 아마 과학소설의 소개와 계몽에 당시 사회가 무관심한 탓에 그가 문단에서 올곧은 인정받지 못한 데 따른 박탈감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장원 SF 평론가·작가, <세계과학소설사> 저자

저작권자 2011.04.26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