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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예술, 사회-자연 등 모든 경계가 무너진다” 브뤼노 라투르, 백남준 국제예술상 수상 강연

“과학-예술, 사회-자연 등 모든 경계가 무너진다” 브뤼노 라투르, 백남준 국제예술상 수상 강연 2010년 11월 29일(월)

매우 특별한 인물이 한국에 왔다. 예술, 철학, 과학기술, 영상과학, 인류학, 정치학 등 여러 영역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사고방식과 지식으로의 길을 열고 있는 석학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63)가 그 주인공.

파리 정치학교 교수이면서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분야에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기도 한 그는 26일 백남준 아트센터로부터 국제예술상을 받았다. 이어 27일 오후 센터에서 열린 수상 기념 강연회를 통해 자신의 매우 특별한 이론을 전개해나갔다.

그는 인류가 지난 100여 년간 근대화를 부르짖었지만 “결코 어떤 사람도 근대인으로 있었던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과거 서구사회는 ‘근대화(modernization)’을 통해 미래에 ‘낙원(utopia)’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는 것.

기후변화는 ‘근대화’가 초래한 명백한 비극

라투르 교수는 “최근의 기후변화와 그에 따른 생태적 위기는 유토피아는커녕 지구 자체를 없어질 위기로 몰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라투르 교수에 따르면, 이는 과거의 고루한 경향인 ‘근대화’의 조류가 초래한 명백한 비극이다. 그는 근대화로 비롯된 잘못된 오해를 극복함으로써 지금의 사태를 해결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 27일 오후 열린 백남준 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자, 브뤼노 라투르 교수의 강연회 

라투르 교수는 이어 “지난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세계를 이끌어온 근대화 흐름 자체에 큰 오류가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구인들은 보편성을 지닌 근대화가 서구에서 비롯됐으며, 근대화를 통해 미래 세계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으로 믿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

지금의 상황을 보았을 때 근대화는 서구의 독점물도 아니고, 보편성을 인정받고 있지도 않으며, 미래 세계 역시 근대화와는 동떨어진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라투르 교수는 근대화란 용어에 대해 “단순한 역사해석이었을 뿐이지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라투르 교수는 이어 “백남준의 작품에서 근대화의 허구를 해체하려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남준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표현하면서 TV를 사용한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 백라투르 교수에 따르면 백남준은 근대화 풍조가 만연했던 당시 시대상황 속에서 서구 근대화의 영향력을 전자매체로 해체시켰다.

백남준은 당시 서구사회가 주장했던 서·동양의 담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항 속에 들어있는 물고기를 TV화면으로 재연하면서 근대화를 상징했던 전자매체, 즉 TV를 통해 자연의 종말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지금의 많은 사람들은 자연의 종말인 기후변화 문제를 애써 외면하고 있다.

라투르 교수는 백남준의 에너지가 절정에 달했을 때 세계는 근대에서 비근대식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평했다. 그리고 지금 백남준의 예언대로 세계 각 분야에 걸쳐 과거에 정해놓은 근대식 경계선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과학기술의 역사 또 다시 전면 부상

동·서양 지역 간의 경계는 물론 학문의 경계, 과학기술과 예술의 경계, 기후변화와 정치의 경계 등 거의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경계선이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이제는 더 이상 구분이 불가능한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말했다.

▲ 브뤼노 라투르 파리 정치대학 교수 
라투르 교수는 “근대화의 산물인 인간(human)과 비인간(non-human), 사회와 자연, 주체와 객체, 인문학과 자연과학 등의 이분법이 허물어지는 대신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요소들의 결합(composition)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 인간·비인간 경계에 의해 독가스, 원자탄을 만드는 악한 수단이었던 것처럼 매도됐던 과학기술의 역사가 또 다시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라투르 교수에 따르면 과학기술은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중요한 방식이 될 수 있다다. 그는 “과거 원근법이 미술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것처럼 과학기술이 지금의 인류역사를 변화시켜나가면서 또 다른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을 보는 라투르 교수의 관점을 설명할 때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약칭 ANT)을 빼놓을 수 없다. 과학학자였던 그는 1982년부터 ANT 창시자인 미셸 칼롱(Michel Callon)과 더불어 ANT를 이론화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ANT 이론을 세계적으로 널리 알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특히 라투르는 ANT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고 그 방법론을 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는데, 이날 강연 내용은 이 ANT 이론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백남준 아트센터는 매년 수상자를 선정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심사위원회, 자문위원회와의 논의를 거쳐 백남준의 사유를 발전시키고, 그의 철학과 창조적인 생각을 이해하고 지원할 이론, 혹은 기획 분야 인물로 라투르 교수를 선정키로 했다.

심사위원인 자비에르 두루(Xavier Douroux) 프 콩소르티움 관장은 “이 상의 수상자는 백남준의 사유를 지성과 지각에 관산 실제적인 실천과 연결하는 고도의 중재자여야만 한다”고 말했다.

철학, 인류학에 이어 과학학에 몰두

다른 심사위원인 안느 마리 뒤게(Anne Marie Duguet) 파리 1대학 교수는 “브뤼노 라투르의 사유가 백남준의 사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보았으며, 라투르만큼 급진적이고 깊은 사유를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1947년 출생한 라투르 교수는 부르고뉴의 디종(Dijon)대에서 철학 및 성경해석학자로서 학위를 받았고, 그 후 군복무에 해당하는 프랑스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아프리카로 건너가 인류학적 현지조사 훈련을 통해 사회과학에 관심을 돌린다.

그리고 1975년 아프리카와 대조되는 문화를 탐구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 실험실에 대한 민속지 연구를 수행하면서 본격적으로 과학학 분야에 뛰어든다. 그리고 미국 소크생물학연구소에서 영국 과학사회학자인 스티브 올가(Steve Woolgar)와 함께 ‘실험실 생활, 과학적 사실의 사회적 구성’이란 책을 발간함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된다.

1982년부터 그는 미셀 칼롱과 함께 ANT를 이론화하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그리고 파리 정치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UCSD, 런던 경제학교, 하버드 대학의 초빙교수 등으로 활동했다. 현재 파리 정치학교의 교수로 있으며, 정치학교 연구소의 부소장이다.

다음은 라투르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

Q. 자신이 어떤 식으로 불려지기를 원하는가.

A.
나는 철학자다. 그런데 철학자들이 나를 받아주지를 않는다. (웃음) 사회과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나의 모든 관심은 학문 영역이 아니라 과제다. 언제나 과제를 보고 일한다.

Q. 당신의 말대로 모든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서구에서 말했던 서구와 비서구 간의 경계도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 잔재가 남아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기후변화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서구 진영의 우월의식 같은 것을 말한다.

A.
물론 부분적으로 근대적인 것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한국을 비롯한 중국, 일본 등 아시의 재부상이 있다. 그 영향력이 매우 커졌다. 지금 서구란 용어 자체가 없어졌다. 서구와 비서구 사이에 그 차이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서구와 비서구의 차이를 보지 말고 우주를 보아야 한다.

Q. 백남준의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A.
백남준은 매우 순수한 예술가다. 현실을 표현하는데 있어 에너지를 통해 사실을 과장하지 않았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을 전개하는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전통적인 아방가르드(前衛藝術, avant-garde)를 계승한 위대한 예술가다.

그는 특히 근대화 의식에 물든 서구의 우상들을 ‘과장을 추가하지 않고’ 정확히 지적했으며, 정확히 파괴했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들은 근대화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된다. 그는 매우 클래식한 자세로 근대화를 비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11.29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