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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타` 디지털 캐릭터에 진짜 배우들 위기감

국제

`아바타` 디지털 캐릭터에 진짜 배우들 위기감

2010.03.14 01:21 입력 / 2010.03.14 07:06 수정

올 아카데미상 `허트 로커` 품에, 할리우드의 영웅 길들이기

한때 부부였던 두 감독의 대결로 관심을 모은 올 아카데미상은 전 남편의 완패로 끝났다. 시상식은 미국 LA 코닥극장에서 한국시간으로 8일 열렸다. 왼쪽부터 시상식에 자리한 ‘허트 로커’의 감독 캐서린 비글로, 그 뒷줄에 나란히 앉은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과 현재의 부인 수지 에이미스. [로이터=연합뉴스]
“모두가 승자를 사랑한다. 그러나 누구도 승자를 사랑하지 않는다(Everybody loves a winner. But nobody loves a WINNER).”

할리우드의 흥행 귀재 스티븐 스필버그가 아카데미상에서 푸대접을 받던 젊은 시절에 한 말이다. 올해 아카데미상에 드러난 할리우드의 민심도 비슷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할리우드는 사상 최대의 흥행 성적을 거둔 ‘아바타’가 아카데미상에서도 승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8일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아바타’ 대신 저예산 영화 ‘허트 로커’에 작품상·감독상 등 올 최다 수상(6개 부문)의 영광을 안겨줬다.

결과를 놓고 풀이하면 ‘허트 로커’의 약진을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다. 앞서 영국 아카데미(BAFTA)·뉴욕비평가협회·LA비평가협회·미국감독조합 등 여러 곳에서 상을 받은 데다, 아카데미상에도 ‘아바타’와 나란히 9개 부문 후보로 올랐던 상태였다.

‘허트 로커’는 특히 캐서린 비글로 감독이 화제의 초점이 됐다. 이전까지 아카데미상에서 여성은 세 차례 후보에 그쳤을 뿐 감독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또 최근의 아카데미상은 저예산 영화, 독립영화에 상당히 후해졌다. 그래서 이모저모로 ‘허트 로커’가 유리했다고 해석을 붙일 수 있지만, 그래도 놀라운 결과다. ‘허트 로커’는 결과적으로 역대 작품상 수상작 중에도 흥행 수입이 가장 적은 영화다. 지금까지 이 영화의 흥행 수입은 2000만 달러 남짓. ‘아바타’가 벌어들인 26억 달러의 1%가 채 못 된다.

흥행 승자에 박수쳐도 속마음은 달라
‘아바타’는 이런 흥행 성적만이 아니라 3D를 비롯한 기술적 혁신으로 큰 화제가 된 영화다. 그런데도 아카데미상에서는 ‘허트 로커’에 사실상 완패했다. ‘아바타’의 기술적 특성이 오히려 수상에 불리하게 작용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시상식 직후 미국의 영화업계 잡지 ‘할리우드 리포터’도 ‘아바타’의 패인 중 하나로 이런 가능성을 지적했다. ‘아바타’의 주요 등장인물인 나비족은 디지털 특수효과로 만들어진 캐릭터들이다. 캐머런 감독은 출연 배우들의 실제 연기가 바탕이 됐다고 강조해 왔지만, 영화를 본 많은 배우들은 디지털 기술의 위력을 실사 배우의 역할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다. 아카데미 수상작은 아카데미 회원, 즉 부문별 할리우드 주요 종사자 5700여 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회원 중 가장 수가 많은 직종이 바로 1200여 명이나 되는 배우다. 부문별 후보작은 해당 분야 회원들만의 투표로 선정되는데, ‘아바타’는 남녀 주연·조연상 등 연기상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는 12년 전 아카데미 11개 부문을 휩쓸었던 캐머런 감독의 전작 ‘타이타닉’과 ‘아바타’의 큰 차이점이다. 역시 결과론이지만, ‘아바타’는 아카데미가 SF영화에 인색하다는 점도 확인시켜줬다. 과거 ‘스타워즈’ ‘E.T.’ 등도 후보에만 그쳤을 뿐, SF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선례는 찾기 어렵다. 역대 수상작을 살펴보면 아카데미가 가장 선호하는 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벤허’ ‘셰익스피어 인 러브’ ‘글라디에이터’ 등 대규모 시대극이나 휴먼 드라마다. 주로 SF영화를 만들어온 캐머런 감독 역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른 건 시대극인 ‘타이타닉’이 처음이다. 1998년 당시 ‘타이타닉’은 여우 주연·조연까지 후보에 올라 역대 최다 부문 후보작(14개 부문)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런 점에서 캐머런은 역시나 막강한 흥행 감독인 스필버그에 비하면 아카데미에서 운이 좋은 편이다. 20대 젊은 나이였던 70년대에 ‘조스’로 흥행 대박을 터뜨리기 시작한 스필버그는 아카데미상에서 유독 오랜 설움을 겪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 ‘레이더스’ ‘E.T.’ 등 세 차례 후보에만 오르고 좌절한 끝에 94년 ‘쉰들러 리스트’로 감독상을 처음 받았다. 그사이 민망한 대기록도 세웠다. 흑인 여성들의 고단한 삶을 그린 ‘컬러 퍼플’이 86년 무려 11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가 단 한 개의 상도 못 받은 일이다. 이전까지 롤러코스터식 오락영화가 장기였던 스필버그가 이런 영화를 만들었으니, 작심하고 아카데미상을 겨냥했다는 말이 나돌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컬러 퍼플’은 감독상은 수상은 커녕 아예 후보에도 못 올랐다. 할리우드 동업자들의 이 같은 냉대에 스필버그가 적잖은 상처를 입었을 것은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스필버그는 ‘쉰들러 리스트’로 감독상을 처음 받으며 의미심장한 농담을 했다. “난 이 상을 받은 친구들이 많이 있는데, 맹세컨대 내가 이 상을 받는 건 처음”이라고. 그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로 한 번 더 감독상을 받아 한풀이를 했다.

스코세이지는 감독상 후보 37년 만에 수상
이보다 심한 경우도 있다. ‘비열한 거리’ ‘택시 드라이버’ 등 초기작부터 비평가들의 격찬을 받아온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다. 스코세이지는 감독상 5번, 각본상까지 총 7번 후보에만 그친 끝에 2007년 ‘디파티드’로 처음 상을 받았다. 1980년대 초 처음 감독상 후보에 오른 지 37년 만이다. 60대 중반의 스코세이지는 ‘생큐’를 10여 차례 거듭하는 것으로 수상 소감을 시작해, 그동안 수상에 실패할 때마다 주변의 ‘아는 체’에 얼마나 시달렸는 지를 털어놓았다. 스코세이지의 수상 무대에는 스필버그를 비롯한 동료 감독들이 함께 나가 축하를 해주는 보기 드문 장면도 연출됐다.

이들과 달리 캐머런의 98년 ‘타이타닉’ 감독상 수상 소감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타이타닉’의 유명한 대사를 인용, ‘나는 세상의 왕이다!’라는 포효로 소감을 마무리했다. 감사와 겸손이 주류인 여느 수상자들의 소감과 달리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당시 사회자였던 워런 비티를 비롯, 시상식 참석자들의 반응은 퍽 뜨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캐머런이 올해 새로 수상 소감을 말할 기회는 없었다. ‘아바타’가 기술 분야 3개 부문 수상에 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상 결과와 별개로 ‘아바타’는 아카데미 시상식이라는 ‘쇼’에서 제 몫을 했다. 분장상 시상자인 벤 스틸러가 나비족으로 분장하고 나온 것을 비롯해 ‘아바타’의 인기는 시상식 곳곳에서 활용됐다. ‘아바타’에 힘입어 올 시상식은 최근 5년 새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아카데미상 시청률은 2008년 역대 최저까지 떨어진 적이 있다. 미국 시청자들에게 낯선 독립영화나 미국 출신이 아닌 배우 등이 후보작·수상작에 많았던 해다. 반대로 시청률이 가장 높았던 해는 ‘타이타닉’이 11개 부문을 휩쓴 98년이다. 사실 당시에는 캐머런이 이후 신작을 내놓기까지 12년이나 걸릴 줄도, ‘타이타닉’의 흥행 기록을 다시 자기 손으로 깰 줄도 예상하기 어려웠다.

‘아바타’는 이미 속편 제작이 거론되고 있다. 피터 잭슨의 3부작 판타지 ‘반지의 제왕’ 시리즈도 3편 ‘왕의 귀환’에서야 감독상·작품상 등 주요 부문 수상에 성공했다. 비록 올해는 ‘아바타’가 수모를 당했다고 해도,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라도 캐머런이 장차 아카데미에서 올해와 다른 대접을 받을 기회와 가능성은 충분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