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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CEO

[ESSAY] 제 이름이 왜 '참(參)'인지 아세요

[ESSAY] 제 이름이 왜 '참(參)'인지 아세요

  •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 입력 : 2010.09.27 23:30 / 수정 : 2010.09.27 23:51
이참 한국관광공사 사장

내 첫 한국 이름은 '韓佑'였다 한국을 돕는다는 뜻이다 한국사회에 참여하고 싶어 '參'으로 고쳤다 가야의 허황옥은 인도 출신 발명가 장영실은 혼혈 '파란 눈'의 나도 새로운 개방 역사를 쓰고 싶다

한국에 온 지 32년의 세월이 지났다. 또 귀화인 최초로 공기업 수장이 된 지도 어느새 1년이 흘렀다. 돌이켜 보면, 독일에서보다 더 오랜 시간을 한국에서 살고 있다. 이제는 모국어인 독일어가 다소 불편할 때도 있어 민망하다. 내 외모 속에 가려진 몸속 DNA는 어느새 한국인이 되어가고 있다.

1978년 학술 세미나차 처음 한국 땅을 밟았을 때 아는 지식이라곤 분단국가, 김치, 불고기 정도였다. 식당에서 스테인리스 그릇에 음식을 담아주는 것을 보고 이게 식기인지 용도를 의심하기도 했다. 유럽의 식당에선 스테인리스 그릇을 좀처럼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토록 생소한 나라였지만 신비로운 한국 문화에 그야말로 '가랑비에 옷 젖듯' 끌리기 시작했다.

한국에서의 생활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196㎝의 장신이라 버스의 낮은 지붕에 키를 맞추기 위해 환기구에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좌식 생활 문화이기에 내 긴 다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가장 불편한 것은 언어와 사고방식의 차이였다. 독일어 외에 다른 유럽 언어는 6개월 정도만 지나면 쉽게 배울 수 있었지만 한국어는 구조나 발음이 전혀 달라 배워도, 배워도 끝이 없었다. "아가씨, 불고기 계세요?" 꽤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식당에서 이런 우스꽝스러운 표현을 써 사람들을 웃기게 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한글의 과학성과 조직적 짜임새에 감탄했다.

일단 말이 통하니까 사람을 사귀고 생각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없이 도움이 되었다. 그럼에도 낯선 외국인과 결혼을 반대하는 장인에게 결혼 승낙을 받기는 쉽지 않았다. 우선 장모의 환심을 사 내 편으로 만들었다. 그런 뒤 처가에 한복을 입고 무작정 찾아가 장인·장모에게 한국식으로 넙죽 큰절을 하고 가까스로 결혼 승낙을 받기도 했다. 가정을 꾸미고 나니 아예 한국에 정착하고 싶어져 1986년 귀화를 결심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생활인으로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일이 필요했다. 교육방송의 독일어 강의를 시작으로 방송의 고정 게스트와 리포터, '딸 부잣집'같은 TV 인기 드라마에 출연하고 경영 컨설턴트, 대기업 고문 등의 일도 했다. 그럼에도 늘 마음 한구석은 허전했다.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엄연한 한국인이 됐지만 나는 주연은 아니고 늘 조연이었다. 조력 혹은 조언이란 것은 아무리 좋은 내용이어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마음에 들면 쓰고, 아니면 버리지 않는가. '기회만 주면 잘할 수 있을 텐데'란 생각만 켜켜이 쌓았다가 허물곤 하는 시절을 보냈다.

사실 처음 내 한국 이름도 '한국을 돕는 사람'이란 뜻의 한우(韓佑)였는데 아예 한국인으로 한국사회에 참여하고 싶어 이름을 참(參)으로 고쳤다. 그런 이름이 효험을 본 것일까.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작년 7월 말, 내 인생에 최고의 일이 생겼다. 옆자리에만 익숙했던 내게, 조언을 하는 데에만 익숙한 내게, 조직의 수장 자리가 주어진 것이다.

마치 잠에서 깨보니 하룻밤 만에 모든 게 변해 있었다. 오르지 못하기에 넘보기를 포기했던 나무에 올려져 있는 느낌이랄까. 외국인 출신이 공기업에, 그것도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임명된 것이다. 그 '파격'에 나 자신도 놀랐다.

지난달 일본의 교통성 장관, 관광공사 사장 등 관광 수뇌부와 회의를 마친 뒤 그들은 나를 보면서 이제는 한국의 개방이 일본보다 앞섰다며 벤치마킹할 만한 '대단한 발상'이라고 할 정도였다.

어떤 이들은 나를 구한말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인 독일출신 묄렌도르프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래서 난 호기심이 발동하여 우리나라에 귀화한 외국인 '최초'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예전 가야시대의 허황옥은 인도출신으로 금관가야의 집권층이 되었고 신라시대의 처용은 아라비아인으로 추정된다. 또 고려시대 과거제를 도입한 쌍기는 중국 후주 출신이고 조선의 발명가 장영실은 아버지가 원나라 후예로 혼혈이었다. 외국계 인재를 흡수하여 활용하는 개방의 역사가 이리도 길었고 다양한 출신의 '최초'들이 이렇게 많았던 것에 새삼 놀랐다. 이들이 어떻게 우리 사회에 뿌리를 깊게 내렸는지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도 큰 편견 없이 한국사회에 동화되었기에 그런 큰 일을 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작년 이맘때 공사 직원들과의 첫 대면이 생각난다. 나를 '파란 눈의 낙하산'으로 여기던 직원들에게 앞으로의 포부와 계획을 말했다. 오랜 세월 근무한 직원들 앞에 내가 던진 첫 말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아 미안하다"였다. 처음엔 직원들이 나를 배려하려고 각종 행사의 인사말이나 보고서를 쓸 때면 쉬운 우리 말을 찾아 쓰려고 노력하고 때론 영어를 섞어 쓰곤 했다. 하지만 1년여가 지난 요즘, 직원들은 한국의 말과 문화에 대한 나의 내공을 믿어서인지, 이젠 한문까지 섞어 보고를 한다. 직원들도, 노조도 모두 협조적이다. 내가 직원들과 융화하지 못하고 겉돌게 되면 한국사회가 이방인을 배척하는 사회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도 성공한 CEO가 되기위해 더 열심히 일하려고 애쓴다.

최근에 경찰관 등 사회 각 분야의 크고 작은 자리에 귀화 외국인 혹은 다문화가정의 일원을 등용한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32년 동안 내가 체험한 우리 사회의 감동적인 포용력은, 이들이 자기만의 색깔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기여하도록 따듯하게 독려할 것이다. 이참에, 나 이참처럼 무수한 이방인 출신 '최초'들이 배출되어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록을 넘어서는 새로운 개방의 역사가 쓰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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