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비스/C-TIPS

신경숙과 한옥에 앉아 창밖 보다가… 울어버린 美편집자

신경숙과 한옥에 앉아 창밖 보다가… 울어버린 美편집자

 

입력 : 2011.10.12 03:07

한국 체험 나선 '엄마를 부탁해' 美편집자 로빈 데서
왜 우나 묻자 "스탕달 신드롬" - 美 두번째 소설 배경 거닐다
한국 와서 처음 본 한옥에 "판타스틱, 인크레더블" 눈물
흥행 비결 '아름다운 패러독스' - 한국 고유 소재에 엄마 더해
인류 보편적 감성으로 담아… '엄마를 부탁해' 美 9쇄 찍어

소설가 신경숙(48)과 은발의 백인 여성이 10일 오후 서울 가회동 한옥마을을 느릿느릿 올라갔다. '인크레더블(incredible·믿기 힘드네요)'과 '판타스틱(fantastic·환상적이군요)'이라는 감탄사를 무한 반복하던 이 중년 여성의 이름은 로빈 데서(Desser·51). '엄마를 부탁해'를 미국에서 펴낸 미국 유력 출판사 크노프의 부사장이자 작가 신경숙의 전담 편집자다.

한국은 처음. 공식적 방한 이유는 지난 7일 있었던 파주북시티 국제출판포럼의 참석이었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비공식적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작가의 미국 출간 두 번째 책이 될 '어디선가 나에게 전화벨이 울리고(미국 제목: I'll be Right There)'의 공간적 배경을 함께 걷는 일. 그리고 무엇보다 뉴욕 연수를 마치고 지난 8월 귀국한 작가와의 해후(邂逅)다. 이 자리에는 (이르면 내후년 미국에서 출간될) '어디선가…'를 번역 중인 이화여대 통·번역학과 김소라 교수도 함께했다. 작가·편집자·번역자의 의기투합인 셈이다.

"책의 무대가 된 곳을 작가·번역자와 함께 본다는 것은 정말 각별한 경험입니다. 이건 특별한 우연이자 기쁨(Serendipity)이죠. 편집자로서 실제 작품의 배경을 보고 느낀 감동을 독자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아요. 우리가 함께 볼 수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이날까지 이틀 동안 삼총사는 서울 구석구석을 종횡무진했다. 전날은 '어디선가…'의 무대 중 하나인 서울성곽 트레킹. 낙산부터 동대문, 인왕산, 부암동까지 무려 4시간을 걸었고 이날 오전에는 '엄마를 부탁해'의 무대였던 지하철 서울역을 찾았다. 소설에서 엄마를 잃어버렸던 바로 그 장소. 작가는 "로빈을 잃어버릴까 봐 손을 꼭 잡았다"며 웃었고, 편집자는 "소설을 읽고 내가 상상했던 서울역이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다"고 답했다.

10일 오후 서울 가회동의 한옥에서‘엄마를 부탁해’의 편집자인 크노프출판사 부사장 로빈 데서(왼쪽)는 울음을 터뜨렸다. 신경숙(오른쪽)의 제안으로 다리를 쭉 펴고 앉은방, 한옥의 창으로 보는 풍경이 참으로 매혹적이었다고 했다. 우리 고유의 한옥에서 우러나온 세계의 보편적 감동. 그는 이를‘아름다운 패러독스’라고 불렀고, 한국 문학 세계 진출의 전략으로 제안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가회동 한옥 방문은 이제는 친구가 된 벽안의 편집자에게 한국의 아름다움을 소개하려는 작가의 환대 중 하나. 이날은 '나무와 벽돌' 윤영주 사장의 가회동 한옥집 무무헌(無無軒)을 찾았다. 소박한 한옥의 단정한 아름다움에 역시 감탄사를 반복하던 편집자는 주인의 제안으로 잠시 다리를 뻗고 혼자 앉아 보게 된 한 평 남짓한 방에서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벽에 등을 대고 바로 그 자리에 앉아 보니 정면의 창(窓)으로는 쪽빛 하늘과 초록 감나무, 창살의 무늬들이 오목조목 고운 조각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데서 부사장은 '스탕달 신드롬'을 이야기했다.

전통차를 나눠 마시며 이 20년 넘는 경력의 베테랑 편집자는 한국 문학의 해외진출에 대한 제안과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로서는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얻은 자산이자 교훈이다. 지난 4월 미국 출간 이후 '엄마를 부탁해'가 거둔 성취에 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데서 부사장이 확인해 주는 숫자들은 이렇다. 초판 10만부 인쇄 이후 6개월 지난 현재까지 9쇄. 전자책은 3만부 이상. 그는 "이 모든 것이 출간 6개월 동안 일어났으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며 "20년 넘게 편집자로 일한 나로서는 처음 겪는 경험이고, 크노프 전체에서도 극히 드문 현상"이라고 했다.

그는 또 표피적 숫자를 넘어 문화적 의미를 강조했다. 3억이 넘는 인구에 한 해 30만종을 출간하면서도 번역서는 2~3%밖에 되지 않는 나라 미국. "그 미국의 독자들에게 한국을 제대로 알게 해 준 첫 번째 책"이라는 것이다.

데서 부사장은 미국 출판시장에서 외국 소설이 사랑받기 위한 조건으로 '아름다운 패러독스(Beautiful Paradox)' 전략을 이야기했다. 그 나라 고유의(authentic) 소재를 인류의 보편적(universal) 감정으로 담아내는 것. 한옥에서 터져 나왔던 눈물이 바로 그런 것이고, '엄마'를 이야기했던 신경숙 문학이 바로 그런 '아름다운 패러독스'라는 것이다. 그는 "다른 문화권에 건너가서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그 속의 울림이 보편적이고 진실되어야 한다"면서 "호머가 살았던 오래전부터 해리포터가 등장한 이 순간에도 소설은 그렇게 계속 국경을 넘어가고 있다"고 했다. 한옥의 창을 통해 바라다보이는 쪽빛의 조각 하늘에서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 스탕달 신드롬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이 1817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있는 산타크로체 성당에서 귀도 레니(Reni)의 회화 ‘베아트리체 첸치’를 감상하고 나오던 중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황홀경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일기에 적어놓은 데서 유래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미술작품이나 문학작품을 감상하다가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거나 격렬한 흥분과 감흥, 눈물 등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