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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크리에이터

영화 ‘해운대’ 윤제균 감독과 쓰나미… “영화서 포기했던 원전 폭발… 현실이 됐다”

영화 ‘해운대’ 윤제균 감독과 쓰나미… “영화서 포기했던 원전 폭발… 현실이 됐다”
국민일보|
입력 2011.03.17 18:25
"영화 '해운대' 보는 것 같다." TV로 방송된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화면은 우리에게 영화 해운대를 떠올리게 했다. 인간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재앙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이거였다. 해운대는 지진에 둔감한 한국인이 쓰나미를 얘기할 때 동원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간접경험이다.

얄팍하다는 것, 안다. 10여m 파도가 도시를 잠식하는 컴퓨터그래픽 화면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배우들의 연기를 두 시간 소비한 것으로 일본의 통탄을 헤아릴 수 없다. 그저 1000만 관객이 구매한 영화를 발판 삼아 성난 자연의 위력을 짐작할 뿐이다.

해운대를 만든 윤제균(42) 감독을 14일 서울 논현동 'JK픽쳐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이 영화는 일본 서쪽 해역에서 강진이 발생해 대마도가 가라앉고 초대형 쓰나미가 부산 해운대로 몰려온다는 설정 아래 만들어졌다.

영화 속 지진은 규모 8.5, 쓰나미 최고 속도는 시속 700㎞. 이번 동일본 대지진의 규모는 9.0이었다.

"현실이 더 영화 같고, 영화가 현실 같기도 하고. 막 무섭고 이상하고. 해운대 찍을 때만 해도 쓰나미 규모를 너무 크게 잡은 거 아닌가 했는데 이번 뉴스 화면은 더 끔찍하고 생생하고…. 영화 속 재앙이 현실이 돼 버렸네, 묘하다, 이상하다, 무섭다, 그런 마음이네요. 해운대 찍었던 배우들에게서 전화가 많이 오고요."

그의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열뜬 얼굴의 윤 감독 뒤에는 제작·연출한 영화 포스터가 두 줄로 전시돼 있었다. 짙은 먹구름 밑에서 배우들이 두려운 눈동자를 하고 있는 해운대 포스터는 아랫줄 왼쪽 두 번째 자리에 걸려 있었다.

해운대를 기획한 시점은 2004년 12월. 당시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를 덮친 쓰나미 뉴스가 연일 TV에 나올 때 윤 감독은 해운대에 있었다. TV 화면을 보고 '100만 인파가 몰려든 해운대에서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생각에 빠졌다. 5년 뒤 이 상상은 영화가 됐다.

영화 기획 단계에서 쓰나미 때문에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원자력발전소가 폭발 위기에 놓인다는 설정을 넣으려 했다. 원전 책임자가 폭발을 막으려 고군분투한다는 내용도 검토됐으나 스토리가 복잡해질까 봐 삭제했다고 한다.

"원전 폭발을 영화에 넣으면 결국 방사능 유출 얘기로 넘어가고, 그럼 아무리 영화지만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니잖아요. 도저히 끝맺음이 안 되니까. 원전이란 게 쉽게 가동이 중단되는 게 아니고 또 중단되면 다시 가동하는 것도 쉽지 않다더군요."

재난·모험 영화가 재미를 주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된다. 절대 발생하지 않을 사건을 위험하지 않게 경험하고픈 욕망, 영화를 보고 나서 증가하는 현실의 안락함에 대한 감사. 영화가 개봉된 2년 전, 누구도 한반도 가까이에서 이런 초대형 재앙이 벌어지리라 예상하지 않았다. '12세 이상 관람가' 영화를 12세 이상 국민 4명 중 1명이 관람하고 열광한 배경엔 이런 낙관도 작용했을 것이다. 인간의 계획과 예상은 얼마나 허망한가.

"비행기 타면 고작 1시간 만에 도착할 곳에서 이런 일이 생기니까 인도네시아 쓰나미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느껴지는 거죠. 또 인도네시아 쓰나미는 관광객들이 캠코더에 찍은 영상이 방송됐는데, 이번엔 방송국이 중계하는 압도적인 영상을 우리가 본 거예요. 정말 사람은 나약할 수밖에 없는 거구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들죠."

물은 제 갈 길을 간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고 잠깐 기다려 달라 할 수도 없다. 피하지 못한 집채와 자동차, 사람은 그 물에 떠오르거나 가라앉는다. 한순간이다. 그제야 인간은 인간임을 깨달아 자존(自尊)을 버리고, 순응을 배운다. 종교, 환경주의, 인도주의, 원전 반대 등 각자의 방법으로 방황의 출구를 찾는다. 방향은 다르나 모두 겸손해지는 쪽이다. 수많은 사람이 자연에 살해돼도, 자연을 단두대에 세우는 법은 없다.

"나 혼자 살려고 아우성치지 않고 일본인들이 침착하게 대응하잖아요. 줄을 길게 서도 불평하지 않고, 먹을 만큼만 식품을 사고. 겨울이 온다고 호들갑을 떨지 않는 것처럼 자연재해를 수없이 경험한 일본인들은 순응할 줄 아는 것 같아요."

영화를 찍으면서 윤 감독은 물의 공포를 체험했다. 배우 엄정화가 물이 차오르는 엘리베이터에 갇혀 마지막으로 딸과 통화하는 장면을 찍을 때다. 엄정화의 입술까지 물이 차올라 까치발로 서서 허우적거린다. 그걸 찍을 때 엘리베이터는 물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졌다.

"강한 쇠 빔을 여러 개 박아 만든 엘리베이터였어요. 겨우 물이 반만 찬 상태에서 박살나더라고요. 그 튼튼한 쇠 빔을 쪼개다니, 물의 위력이 이런 거구나, 정말 오싹했어요. 결국 엘리베이터 다시 만들어서 촬영했죠. 겨우 세트장에서의 경험도 그런데 실제로 겪는다면 공포가 오죽할까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거죠."

동일본 대지진 이후 국내 방재 시스템을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부산·경남은 불안감이 크다. 한반도는 유라시아판 안쪽에 있어 큰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높지 않다. 그러나 일본 서쪽 해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한다면 부산까지 여파가 미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05년 3월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 북서쪽 해역에서 규모 7.0 지진이 발생하자 부산의 건물이 흔들려 대피 소동이 있었다.

"가능성이 희박하긴 하지만 일본 서쪽에서 쓰나미가 발생하면 부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를 전문가로부터 들었어요. 제 영화로 인해, 또 이번 재해로 인해 우리나라 재난방지 시스템도 다시 점검됐으면 좋겠어요."

윤 감독이 요즘 기획하는 영화는 '템플스테이'. 외국인 가족이 사찰에 머무는 동안 벌어지는 소동을 그린 모험영화다. 외국 영화 '박물관이 사라졌다'나 '인디아나 존스'류의 영화로 제작비는 해운대(130억원)를 훌쩍 넘는 300억원 이상이라고 한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1' 등 코미디로 시작한 감독의 행보는 미개척 장르로 뻗어가고 있다.

"'해운대2' 얘기도 나오는데 영화적으로 의미가 없을 것 같아요. 재난영화 해보니까 어휴, 정말 힘들고요. 또 이번에 대재앙이 왔다고 해서 그걸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싶지도 않고."

부산 출신인 기자는 왜 영화 속 부산사람은 다들 억세고 과격하냐고 농담 삼아 물었고, 부산 출신 감독은 그런 면이 좀 있는 건 사실 아니냐고 답했다. 시시콜콜한 대화였다. 이러쿵저러쿵 말해 봐야 남의 아픔은 여과돼 찌꺼기는 빠지고 허연 액체만큼만 전달될 뿐이다.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평안함과 고요함에 감사한다면, 이 또한 이기적인 것일까.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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