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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생태계/지식

한국의 엔지니어… 기적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 진공관 라디오 ‘금성 A-501’

한국의 엔지니어… 기적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 진공관 라디오 ‘금성 A-501’ 2011년 01월 03일(월)

한국공학한림원은 한국전쟁 60년째인 2010년을 마감하면서 60년 동안 '한국 號'를 이끌어온 '100대 기술과 주역'을 발표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신년을 맞아 한국경제가 약 300배 성장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해온 100대 기술의 역사적인 이야기들을 연재한다. [편집자 註]

한국공학한림원이 선정한 100대 기술에는 1950~1970년대 국내 섬유업계의 혁신을 이뤄낸 인조섬유 ‘나일론’, 국산차 ‘포니’,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 포스코의 ‘파이넥스’ 등 1950년 이후 대한민국의 산업 발전을 이끌어 온 주요 기술들이 총 망라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재에 가까울수록 국보급 기술들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1950~1970년대까지 100대 기술에 포함된 기술은 24개였다.

그러나 1980년대 18개, 1990년대 24개, 2000년대 34개 등 후기 30년 동안 76개의 기술이 100대 기술에 포함됐고, 이는 1950~1970년대 24개와 비교해 3배가 넘는 수치다. 최근 한국의 기술력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있다.

“기술수준이 낮으면 외국서 배워오라”

100대 기술 중 첫 번째로 선정한 기술은 국내 최초의 국산 진공관 5구 라디오인 A-501이다. 지금 상황에서 구닥다리처럼 여겨지겠지만 이 라디오가 개발된 1959년 11월 15일은 국내 공학사에 있어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 골드스타란 브랜드로 시중에 판매된 국내 최초의 진공관라디오 '금성 A-501'(사진: LG전자 제공)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없던 당시 한국에서 미국 PX를 통해 흘러나온 진공관 라디오는 한국인들에게 경이로운 물건이었다. 플라스틱 상자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가격도 비쌌다. 최고급 라디오로 치던 미국 제니스 라디오는 암시장에서 45만환에 팔렸는데, 이는 당시 쌀 50가마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를 설립한 구인회 회장은 ‘럭키크림’, ‘럭키치약’ 등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1957년 금성사(現 LG전자)를 설립하는데, 구 회장의 마음 속에는 항상 라디오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라디오 개발에 주역으로 참여했던 이헌조 LG전자 고문(77)은 1958년 4월 구 회장이 임원들을 모아놓고, 오랫동안 생각해왔던 라디오 개발의 가능성을 타진했다고 회고하고 있다.

임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임원들이 “기술수준이 낮아서 힘들다”는 의견을 내놓았는데, 구 회장은 이 말을 듣고 “기술수준이 낮으면 외국에 가서 배워오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외국에서 기술자를 데려오면 되지 않느냐”며 임원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임원들은 수입 라디오를 수리하던 전파사 사장들을 엔지니어로 임명하고, 라디오 설계를 맡긴다. 수입 부품을 사올 자금이 모자라 대부분의 부품을 직접 제작했다. 그리고 개발을 시작한 지 약 1년여 만인 1959년 11월 15일 최초의 국산 라디오 ‘금성 A-501’이 출현한다.

엔지니어 김해수 씨 라디오 개발 총지휘

당시 금성사에서 국산 라디오 개발에 직접 참여한 엔지니어는 2005년에 작고한 김해수 씨(金海洙, 1923~2005)다.

▲ 금성 라디오의 첫 수출은 1962년 11월 이루어졌다. 미국 아이젠버그사에 62대의 라디오를 수출했다. (사진: LG전자 제공) 

그의 딸이면서 박노해 씨 부인인 김진주 씨에 의해 발간된 ‘아버지의 라디오(느린걸음 출판)’에 따르면 1923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 하동에서 자란 그는 15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공(東京高工)을 졸업한다.

1943년 일본 군부에 의해 인천 조병창의 전기주임으로 발령을 받았으나 그 곳을 탈출해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었다. 강원도의 광산에서 전기 책임자로 일하다가 해방을 맞이하게 된 그는 1945년 가을부터 고향인 하동에서 전기사업을 하는 ‘창전사’를 개업했다.

그러나 해방 직후 좌우익 분쟁에 휘말려 구속, 수감됐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폐결핵을 앓게 된다. 소안도에서 요양을 하던 차에 1950년 6·25전쟁이 터졌다. 전란 중의 부산에 자리 잡고 ‘화평전업사’와 미군 PX의 라디오 수리점을 운영하기도 했는데, 전축 제조업 등의 사업에서 실패하고 건강이 악화돼 큰 수술을 받기도 했다.

1958년에 공채시험을 통해 금성사(현 LG전자)에 입사해 국산 라디오 첫 제품(금성 A-501호)의 설계와 생산을 책임지게 된다. 그리고 힘든 과정과 우여곡절 끝에 국내 최초의 진공관 라디오를 개발한다.

금성 라디오가 처음 선보일 당시 첫 해 생산량은 87대에 불과했다. 가격은 2만환으로 당시 대학을 졸업한 금성사 직원 월급이 약 6천환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세 달치 월급을 모아야 하는 적지않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미군 PX를 통해 시판되던 제니스 라디오에 비해서는 훨씬 싸다는 강점이 있었다.  

금성사는 미제보다 싼 가격에 큰 기대를 걸고 시장에 첫 제품을 내놓았다. 그러나 시장 반응은 시큰둥했다. 이헌조 LG전자 고문(78)은 “하루종일 청계천 일대의 전파사를 돌아다녔지만 상인들은 국산 라디오를 어디에 쓰겠냐며 머리를 가로저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 판매망에 돌파구 열어줘

실제 금성사 초기 제품은 접촉 상태가 나빠 소리가 끊기는 사례가 빈번했다. 비싼 수입 부품 대신 국산 부품을 쓴 이유도 있지만, 당시 전력사정이 워낙 좋지 않아 100V 전압을 유지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방송국 사정도 열악해 서울 외곽으로 조금만 나가도 전파를 수신할 수 없었다.

이처럼 시장에서 고전하던 금성 라디오를 살린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1961년 9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된 박 대통령은 곧 부산 연지동에 있던 금성사를 방문, 실무자에게 “어떻게 하면 전자산업을 살릴 수 있겠느냐”고 묻는데, 당시 설계 책임자였던 김해수 과장이 “밀수품과 미국 면세품 유통을 막아야 살 수 있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 말을 듣고 곧 ‘전국 농어촌에 라디오 보내기 운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매년 1만대도 못 미치던 라디오 생산량이 13만대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힘을 얻은 금성사는 라디오 성능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제에 버금가는 라디오를 탄생시킨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 금성라디오를 모르는 사람은 간첩으로 통할 만큼 전 국민들로부터 인기를 얻었다.

자금이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금성사는 다른 제품에 눈을 돌린다. 1965년 냉장고, 1965년 전기밥솥, 1966년 흑백TV, 1968년 에어컨, 1969년 세탁기 등을 잇따라 선보인다. 1960년대 뚜렷한 경쟁사가 없었던 금성사의 사업 역시 탄탄대로였다.

LG전자 관계자는 “창업 초기에 국산 부품을 생산한 덕에 후속 상품을 쉽게 개발할 수 있었다”며 “당시 수입 부품을 썼더라면 지금의 LG전자는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첫 제품인 ‘금성 A-501’은 섀시, 트랜스, 너트, 코드 등 60% 이상의 부품을 자체적으로 만들고 진공관과 스피커 등 일부 핵심 부품만 외국에서 들여왔다.

그러나 라디오를 통해 얻은 자신감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금성사의 엔지니어들은 물론 다른 과학기술자들까지 열심히 하면 된다는 한국 기술의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한국의 전자산업은 물론 한국 과학기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1.01.03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