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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조선왕조 기틀 닦은 ‘멀티플레이어’ 역사 속 호모 컨버전스 - 정도전

500년 조선왕조 기틀 닦은 ‘멀티플레이어’ 역사 속 호모 컨버전스 - 정도전 2010년 12월 16일(목)

모든 역사가 그러하듯 한 국가의 멸망 시기는 부패와 혼란이 극에 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려 말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시스템이 붕괴하고 상부층만 편안할 뿐, 하층민은 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정도전은 ‘왕이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면 바꿀 수 있다’는 맹자의 사상 ‘역성혁명’에 근거해 조선왕조를 건립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조선왕조 성립의 최대 공신인 정도전은 민본사상을 바탕으로 다방면에서 조선의 기틀을 다져나갔다. 그가 닦은 기반 아래 조선왕조는 500년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민본 중심의 정치가

▲ 국가 시스템을 하나의 원리로 볼 수 있었던 능력을 정도전은 갖고 있었다.  ⓒwikipedia
백성의 경제생활 안정에 많은 힘을 기울인 정도전은 유민을 없애고 농업인구를 늘리기 위한 방법 찾기에 고심했다. 이미 고려 말부터 그는 토지개간과 권농정책을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극도로 편중화된 토지소유에 의한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토지개혁운동을 시작했다. 비록 기득권층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도전은 과전법 제정으로 개혁을 이룰 수 있었다.
 
과전법이란 귀족들의 대토지 소유에 따른 국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시한 토지 제도로 토지의 국유화를 원칙으로 공전(公田)을 확대하고 사전(私田)의 소유에 일정한 제한을 둔 제도이다.

정도전은 빈민을 위한 복지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먹고 살기 어려운 빈민을 위해 곡물대여제도인 의창제도를 만들었다. 빈민 질병치료를 위해 일종의 국영 의약품 판매제도인 혜민전약국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는 민생과 직결되는 천문과 관계되는 역법과 의학 등 기술적 실용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생전에 역산서인 ‘상명태일제산법’과 의서인 ‘진맥도결’을 쓰기도 했다. 특히 진맥도결은 진맥에 관한 여러 학자의 설을 참고해 그림을 그리고 요점을 들어 내용을 설명한 책으로 당시 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유익하다는 칭송을 받았다.

500년 조선왕조의 기틀 잡아

조선왕조가 단순히 왕조교체가 아닌 사회진보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도전이란 인물의 역할이 컸다. 정도전은 새 물건은 새 그릇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금의 한양 천도를 주동한 인물이다. 한양 천도가 결정되자 한양의 도시계획을 지휘하고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경복궁을 비롯한 궁과 문의 모든 칭호를 정했다.

▲ 정도전은 한양 천도가 결정되자 한양의 도시계획을 지휘하고 궁궐과 종묘의 위치를 정하기도 했다.  ⓒwikipedia
그릇을 만들 흙과 그릇의 형태를 디자인 했으니 빚는 것도 제대로 해야 하는 법. 그는 태조 3년에 새 왕조가 길이 규범으로 삼아야할 ‘조선경국전’을 저술했다.

조선경국전은 후에 조선의 헌법인 ‘경국대전’의 기초가 되는 책으로 조선 왕조의 통치규범을 설명한 책이다. 이 책이 완성됨으로서 조선은 명실상부 법치국가로서 위상을 세울 수 있었고, 일종의 입헌군주제에 가까운 국가형태를 보일 수 있었다.

이후 정도전은 경제문감 상하권을 발간했다. 권력구조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쓴 책으로 상권에서는 역대 왕조의 재상제도의 변천 과정과 득실을 설명하고 재상의 역할을 기술했다. 하권에서는 감사, 수령 등의 직책을 논했다.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과 ‘경제의론’에서 군주의 직책과 몸가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혔는데, 조선왕조의 틀을 잡는데도 이런 사상들이 기반이 됐다. 그는 또한 수령에 대한 감시에 기준을 제시한 ‘감사요약’도 저술했다. 한마디로 그는 중앙과 지방 통치자에 대한 기준을 엄격하게 세운 것이다. 이외에도 정총과 함께 방대한 ‘고려사’ 37권을 태조 4년에 완성하는 등 역사학자로서의 면모도 보여줬다.

자주국방 기반 닦은 군사 전략가이자 철학자

그의 치적 중 군사제도와 병법의 개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이런 일련의 개혁은 요동 수복 전쟁을 위한 준비였지만 결과론적으로 자주국방의 기반을 닦는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 셈이다. 정도전은 우선 고려 말에 거의 사병화 된 군대를 단계적으로 혁파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그는 병법서를 저술하는 데도 집중했다. 먼저 ‘팔진삼십육변도보·오행진출기도·강무도’ 등 중국 역대의 병서를 종합 절충해 우리나라 현실에 맞게 책을 만들었다. 이후 실제적인 군사훈련 지침서인 ‘진법’을 완성했다. 진법은 제식훈련내용과 창검과 궁시를 가지고 직접 공격하는 방법인 전투훈련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과거 병법과 다른 점은 실제 전투 기술을 익히도록 하는 데 있었다. 정도전은 이 진법에 따라 실제로 군사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통한 진보적 사회개혁사상가로서 조선을 유교사회로 만드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조선왕조의 건국 뒤 체계적으로 불교 배척 운동을 실행하며, 성리철학을 완성시킨다. 

정도전은 우리나라 학자가 쓴 최초의 성리학 교재 ‘학자지남도’를 저술했다. 또한 ‘심기리’ 3편과 ‘불씨잡변’ 등 새로운 철학 사상인 성리학과 비교해 불교와 도교의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는 글을 썼다.

정도전이 조선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던 이런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모든 것을 하나의 원리로 꿰뚫어 펼쳐낼 수 있는 일이관지(一以貫之)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즉 국가 시스템을 하나의 원리로 볼 수 있었던 능력을 정도전은 갖고 있었던 셈이다. 한마디로 그는 정치에 있어 타고난 호모 컨버전스였다.

김연희 객원기자 | iini0318@hanmail.net

저작권자 2010.12.16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