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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명사

‘펜은 칼보다 강하다’…한국현대사 증언한 ‘사상의 은사’

‘펜은 칼보다 강하다’…한국현대사 증언한 ‘사상의 은사’

경향신문 | 한윤정 기자 | 입력 2010.12.05 10:24 | 수정 2010.12.05 15:48 |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가려진 허위를 벗기는 이성의 빛과 공기가 필요하다.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가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하는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 했다.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이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괴로움 없이는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금언을 고 리영희 선생만큼 온몸으로 실천한 이가 또 있을까.

지난 6월 27일 서울 연희동에서 리영희 선생의 제자들이 리 선생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 리 선생의 여제자 7명은 이날 아들 집에 머물고 있는 선생을 찾아가 머리에 화관을 씌워드리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선생은 당시에도 복수가 차고 혼자 걷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나빴지만 이날만큼은 제자들과 함께 박수를 치고 어깨춤을 추며 흥겨워했다. 제자들의 노래 선물에 리 선생은 부인의 손을 꼭 잡고 애창곡인 '갑돌이와 갑순이'를 부르며 화답했다. /사진 제공 이지영씨

그는 분단과 전쟁, 냉전, 독재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자신이 목격하고 고민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동시대인의 무지와 비이성을 깨우쳤다. 개인으로 살되 공동체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가르침은 수많은 청년, 대학생을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스스로 택한 지식인의 삶을 위해 아홉 번의 연행, 다섯 번의 투옥,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번의 해직과 복직, 1012일의 옥고를 치른 그를 놓고 프랑스 르 몽드지는 '사상의 은사'로 지칭했다.

[화보]'실천하는 지식인' 리영희 선생 마지막 생전모습 더보기

리영희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첫 저서 < 전환시대의 논리 > (1974)를 내놓으면서 부터였다. 이 책은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 한·일 안보관계의 전망, 베트남 전쟁 등 시사적 주제를 단편적으로 다룬 책이면서도 현대사와 국제정치 현실을 보는 시각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불러일으킨 명저로 꼽힌다.

속편 격인 < 우상과 이성 > (1977)에 가면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서 비롯된 우상의 개념과 그런 허상에 도전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의 면모가 확립된다.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비판적 지성은 이미 어렸을 때 형성된다.

평안북도 삭주의 유복한 집안 출신인 그는 외삼촌 최인모가 1920년대에 일본유학을 다녀와서 소작인들에게 땅을 나눠준 사건을 앎과 삶을 일치시키는 표본으로 삼았다. 월남한 뒤 가세가 기울고 주경야독으로 한국해양대를 거쳐 미 노스웨스턴대에서 공부한 그는 6.25가 터지자 7년간 통역장교로 복무한다.

1957년 합동통신을 시작으로 언론사에 투신한 뒤 외지에 5.16을 반대하는 글을 쓰는가 하면, 유엔의 남북 동시 초청을 기사화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1972년 한양대 교수로 부임하지만, 편역서 < 8억인과의 대화 > (1977)가 중국 공산당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체포돼 복역한다. 1989년에는 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다시 국가보안법에 의해 복역한다.

고인은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 시절에 많은 고난을 겪었으나 그의 행보는 반독재 투쟁에 머물지 않는다.

일찍이 외신부 기자로 일하면서 얻은 다방면의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세계 정세를 꿰뚫어보고 냉전과 분단체제의 본질, 남한 보수세력의 파시즘적 성격, 미래 사회의 전망을 제시했다. 그는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 직후에 펴낸 저서 <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 (1994)에서 좌우의 정치권력이 진실을 은폐, 날조, 왜곡하는 것에 대항해 균형잡힌 이데올로기를 견지할 것을 촉구한다.

주로 사회비평이나 소논문의 형식으로 쓰인 그의 저서들은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북한문제, 통일문제, 한·미관계, 한·일관계, 베트남전쟁, 중국사회주의 등을 파고 든다. 특히 베트남전쟁을 경제논리가 작용하는 '더러운 전쟁'으로 규정하거나, 한·중 관계가 수교에 이르지 못한 것은 물론, 일방적인 폄하에 머물던 당시 인민의 지지기반 위에 세워진 중국사회주의를 평가한 글들은 그의 혜안을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일부 보수세력은 아직까지도 리영희를 가리켜 중국공산당을 찬양한 공산주의자, 북한식으로 '리(李)'라는 성을 고수하는 친북주의자라고 부르는 '레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쓰는 나의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오직 그것에서 시작하고 그것에서 그친다"는 말처럼 그는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시절에도 과거 민주화운동의 동료들처럼 공직을 맡거나 전면에 나서는 대신, 권력과의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집필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2000년 말 뇌출혈로 쓰러져 오른쪽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온 뒤로 10년에 걸쳐 투병생활을 해왔다. 3년 전부터는 간경화로 인해 자주 병원신세를 졌다. 그럼에도 현실 정치에 대한 발언은 간간이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이라크전 파병에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고,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인권의 퇴보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공적인 부분에서는 반성해야 할 만한 자기부정을 시도해본 일이 없다. 그러나 가정생활에서는 아내와 가족에게 너무 많은 고생을 시켰다"고 말했다. 또 삶의 신조로 검소한 생활(simple life)과 높은 이념적 사고(high thinking)을 들었다. 세속적 자기방기를 거부하고 검소하게 생활할 때에만 사유의 도덕적·논리적 수준을 높여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특별한 태도와 사유방식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건강악화로 글을 쓰지 못하는 리영희의 구술을 받아 원고지 2700장 분량의 < 대화 > (2005)를 완성했다. 이듬해에는 < 전환시대의 논리 > 를 시작으로 아직 책으로 묶이지 않은 원고까지 망라한 < 21세기 아침의 사색 > 에 이르는 12권짜리 '리영희 저작집'이 한길사에서 출간됐다. 올초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등이 집필한 < 리영희 프리즘 > 에 이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의 < 리영희 평전 > 역시 출간을 앞두고 있다.

< 리영희 프리즘 > 의 집필에 참여한 고병권 박사(수유+너머R 연구원)는 "리영희는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교육자이기 이전에 각성을 전달하는 교육자"라며 "리영희로 인해 비로소 매너리즘으로 견해를 갖는 것과 다른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생전의 고인은 19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킨 문부식·김은숙 재판의 증인으로 나섰다. 이유는 그들이 리영희의 책을 읽었기 때문에 반미의식의 원천이라는 것이었다. 리영희의 유산은 그런 것이다.

<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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