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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크리에이터

[매경이 만난 사람] 카리스마 있는 여자 박칼린

[매경이 만난 사람] 카리스마 있는 여자 박칼린
무대는 지독한 곳…제 삶도 마찬가지
기사입력 2010.12.03 15:09:01 | 최종수정 2010.12.03 19:35:14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가장 먼저 무대에 들어서고,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다. 붉은 벨벳 객석에 앉으면 이 자리는 한 뼘의 뒤통수로만 보인다. 하지만 그 자리는 치열한 무대의 리트머스지와 다름없다. 황홀한 오렌지빛 조명을 묵묵히 받으며 땀을 비오듯 흘리면서도 세 시간 동안 공연하면서 흐트러질 수도, 쓰러질 수도 없다. 기침이 나도 참아야 하고, 손끝에서 힘을 놓는 순간 그 극은 실타래처럼 풀려버린다. 뮤지컬 음악감독. 그녀 이름 앞에 18년 동안 따라다닌 `또 다른 이름`이다.

뮤지컬 음악감독 박칼린. 그에겐 최근 또 다른 별명이 생겼다. `남자의 자격` 오합지졸 합창단을 전국합창경연대회 입상팀으로 `환골탈태`시킨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칼마에`로 불리게 됐다. 혹자는 자고 나니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에겐 단지 무대인생에서 작은 쉼표일 뿐이었다. 20여 년 만에 생긴 빽빽한 스케줄표 속 빈 공간. 그로 인해 택한 두 달여 외도로 `박칼린 열풍`이 불었지만, 정작 본인은 언제나처럼 앞으로도 항상 무대에 서겠다는 바람뿐이다. 종종걸음으로 곧장 뮤지컬 `아이다`로 돌아온 그의 치열했던 무대인생. 그 편린을 엿보았다.

`남자의 자격`에서 박칼린은 매혹적이었다. 쉴 새 없이 `플랫`을 외치며 틀리는 부분을 지적할 때는 엄격했고 불같이 뜨거웠다. 하지만 공정했다. 단원을 신뢰했고 소통을 중시했다. 전국합창대회 무대에 오르기 직전 긴장한 단원들에게 "I 믿 You(나는 너를 믿는다)"라며 따뜻한 포옹을 해주는 따스한 리더십엔 온 국민이 감동했다. 사실 연습실에서 그는 오래전부터 `서쪽의 사악한 마녀`로 불렸다. 완벽한 공연을 위해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 탓이다. 1995년 26세에 `명성황후` 음악감독을 맡았던 그는 한국 뮤지컬 1세대다. 황무지에서 오늘날 한국 뮤지컬을 일궈낸 그들에게 창작 과정에서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 연습에 들어간 지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음과 가사를 못 외울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피곤하면 불평도 잘하고 잘 싸우기도 하는데 너무 좋게만 그려진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배우한테 엄청 화도 내고 벽에 머리를 찧기까지 하는데 말이죠. 하하."

박칼린 인생에도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 엄마처럼 돌보며 첼로를 가르쳐준 로즈마리 크로보사, 리처드 마이어 선생님, 음악감독을 응원해준 피터 케이시, 국악을 전수받은 박동진 명창 등이다. 이들에게서 그는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모두 고요하고 부드러웠다. 공통적으로 제자들 말을 끝까지 경청하고, 제자들을 흔들림 없이 그들 길로 이끌어갔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인연은 한 인간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다고 믿는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인연이고 싶어요. 사실 리더라는 말을 싫어해요. 제가 누군가보다 위에 있거나 동등하지 않은 위치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제 군단에서도 물론 제가 나이는 많지만, 그들 얘기를 열심히 들으려고 해요. 동등한 관계이고 싶은 거죠. 사실 위아래 관계면 끌고 갈 수가 없죠. 가장 조심해야 하고, 자신이 마지막으로 가야 하고, 마지막으로 밥을 먹어야 해요. 그런 다음에 정말 힘들 때 한번씩 `미안하지만 도와줄래?`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게 리더가 아닐까요?”

사실 그의 자리는 항상 누군가보다 앞이었다. 지휘봉을 처음 잡은 것은 중학교 시절. 오케스트라 첼로 주자였을 뿐인데도 음악 선생님은 잠깐 자리를 비울 때면 지휘봉을 맡겼다. "심지어 여름에 음악캠프를 가도 항상 지휘는 제 차지였다"며 "키가 커서 그랬을까요?"라며 웃는다. 그렇게 언제나 꼭 앞에 서 있었고 누군가를 이끌고 있었다. 뮤지컬 스태프와 배우들을 이끌면서 그의 앞에는 수십, 수백 명까지 사람들이 늘어났다.

언젠가 공연 연습을 하고 있는데 `투턴(무대에서 두 바퀴 도는 동작)`이 안 되는 배우가 있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며 짜증을 내는 배우에게 그는 따끔한 한마디를 던졌다.

"딱 100번만 해봐. 한 번, 한 번을 진지하게. 주변 사람 시선 의식하지 말고 너만 깊숙이 들여다보며 거울 앞에서 진지하게 해보란 말이야. 그렇게 100번만 해봐. 100번 해서 안 되면 1000번을 진지하게 해보란 말이야." 결국 그 배우는 해낼 수 있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기 실력을 탓하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배우들에게 그는 `진지한 노력`을 요구할 뿐이다. 이런 마음가짐은 첼로를 전공하던 대학입학 초기, 실망스러운 연주로 괴로워하던 그가 선생님께 받은 레슨이기도 하다.

무대 인생이란 시계 같은 삶이다. 배우든 스태프든 그 어떤 이유로도 공연을 펑크내거나 단 1분도 지각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심지어 공연을 위해 차를 버리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기억 속 `동호대교 사건` 전말은 이렇다. 공연을 세 시간여 앞두고 서울시청 앞에서 출발한 차는 공연 30분 전까지도 동호대교를 넘지 못했다. 안절부절못하다 급기야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구조요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차를 버리고 동호대교까지 달렸다. 공연 15분 전, 친구가 타고온 오토바이 뒤에 올라타고 달려 정각에 가까스로 `배달`됐다. 숨가쁘게 오케스트라 피트로 뛰어들었고 물론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

무대 위의 삶이란 감정조차도 다스려야 한다. 가족이 아프거나 다쳐도, 누군가 돌아가셨다고 해도 공연을 못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관객에게 용서라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5년 전 친할머니가 뮤지컬 `아이다` 막을 올리기 전날 돌아가셨을 때도 그랬다. 마지막 연습을 끝낸 밤 11시, 탈진한 몸을 이끌고 부산에 내려가선 이튿날 새벽 올라와 무대 앞에 서야 했다.

"우리 뮤지컬이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이만큼 자란 건 감기에 걸려도 쉰 목소리로 노래한 배우, 강행군으로 팔이 마비되어도 드럼을 두드린 연주자와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자리를 지켜주었기 때문이에요."

그렇게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한국 뮤지컬은 불과 10여 년 만에 지금 이 자리에 올라섰다.

"배우들 실력이 매우 높아졌어요. 우선 기초체력이 많이 쌓였고 몇몇 배우들은 세계적인 수준이죠. 옛날에는 작품 연습을 하기 전 석 달 동안은 트레이닝을 해야 했어요. 투턴도 못하고, 심지어 걷는 것도 못했어요. 발성 연기 춤수업을 죄다 해야 했죠. `명성황후` 때만 해도 정말 배우들이 노래방에서 마이크 잡던 실력, 디스코에서 막춤 추던 생각으로 들어왔거든요."

이미 배우가 샐러리맨처럼 되어버린 브로드웨이에서도 우리 배우들만큼 무대 위에서 열정을 쏟아내진 못한다고 했다. 아직까지 자존심을 지키는 배우들이 사랑스럽다. 탁월한 기술로 무대를 만들어내는 스태프도 세계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라 단언했다.

"그럼에도 `소프트웨어`는 여전히 부족해요. 작곡, 대본, 연출, 가사 쓰는 사람, 안무하는 크리에이터들은 턱없이 부족해요. 훌륭한 우리 자원들을 담아낼 좋은 창작 뮤지컬이 나오기엔 말이죠."

최근 그는 18년간 잡아온 지휘봉을 놓고 연출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2008년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가 첫 작품이었다. 지난해엔 첫 창작뮤지컬로 김영하 원작의 `퀴즈쇼`를 연출했다. 지난번엔 음악감독을 맡았던 `아이다`로 이번엔 연출에 도전한다. 후배들과 10년째 매년 새로운 대본과 작품을 써보는 워크숍도 꾸준히 해오고 있다. 본인 창작 뮤지컬도 내년쯤이면 선보일 작정이다. 이토록 지독하게 매달리는 무대. 그를 참을 수 없이 매혹시키는 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쟁이 짓`을 사랑하는 스태프와 배우들이다.

■ 아빠의 눈물

8세 무렵이었다. 함께 골목길을 누비던 절친한 언니와 공터에서 모래놀이를 하던 소녀에게 덩치 큰 소년들이 다가왔다. "넌 왜, 노랭이랑 노니?" 겁에 질려 우는 언니에게도 그 남학생들에게도 할 말이 없었다. "너네 나라로 가"라는 말에 눈물을 펑펑 쏟는 것밖엔.

그를 맞아준 아빠가 "그건 그냥 니가 다른 사람하고 다르게 생겨서. 그건 그 사람이 몰라서 그런 것뿐이야. 칼린. 여기도 네 나라고, 미국도 네 나라야. 그리고 모든 나라가 네 나라란다"고 위로해주며 흘렸던 눈물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아주 어린시절 미국을 떠나 9세까지 한국에서 살면서 이렇게 작은 아픔은 문득 찾아오곤 했다. 미국에선 다시 영어를 익혀야 했고 그는 불가수행자만큼이나 조용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첼로라는 악기를 택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몰라요. 커다란 악기 뒤에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적성에 맞았죠. 조용한 오케스트라 멤버였던 저에게 어느 날 선생님은 연극 공연 연주자로 초청을 하더니 덜컥 1인 5역 배역을 맡겨버렸어요. 숨어 있길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끼를 끌어낸 건 이토록 신기한 우연이었던 거죠."

그렇게 우연과 우연이 만나기 시작했다. 경남여고 2학년 무렵, 민속마당놀이를 변형시킨 학교 창작공연 `할미전`에서 그는 남장 배역 `한량영감`을 연기했다. 전국 순회공연을 다닐 정도로 극단 실력은 대단해서 전국청소년연극제에서 연기상을 탈 정도였다. 무대의 매력을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자란 그는 이후에도 한국에 들를 때면 부산에서 여러 극단들과 정극, 뮤지컬, 무용 등을 가리지 않고 무대에 섰다. 89년 서울 무대 첫 연극 `Tally`s Folly- 여자의 선택`에서 그는 전례없는 사고를 겪었다. 배우가 둘뿐인 무대 위에서 상대배우가 대사를 까먹고 무대에서 달아나버린 것이다. 황당했지만 무대를 이리저리 누비며 사고를 수습해야 했다. 전무후무한 사고에 놀란 연출자는 `대사 까먹기`에 대비해 노래를 만들어 넣기로 했다. 마침 그의 노래 네 소절을 듣게 된 다른 작품 연출자가 곁에 있었다. 그에게 `뮤지컬` 제안이 들어온 계기다. `명성왕후`로, 그리고 음악감독으로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언제나 음악은 곁에 있었다. 마치 운명처럼.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항상 저희 세 자매 손을 붙잡고 본인이 강의하는 학교로, 빈소년합창단, 발레 공연장 등으로 데려가셨어요. 매일밤 어머니가 틀어주는 말러 교향곡 1번 LP판을 들으며 잠들곤 했죠. 그래서인지 몰라요. 큰언니는 한국 무용, 작은언니는 개나리합창단, 저는 언니를 따라 피아노도 무용도 배웠죠."

■ 박칼린은

1967년 미국 LA에서 한국인 아버지와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자랐고, 성악을 전공한 어머니(아이렌)에게서 언니들(킴벌리, 캘리)과 함께 첼로와 피아노를 배웠다. 칼린이라는 이름은 부모님이 지어주셨다. 칼린은 `아일랜드 소녀`라는 뜻이다. 캘리포니아예술대학에서 첼로를 전공했고 서울대 대학원(국악 작곡)에서 명창 박동진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 명성황후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후 오페라의 유령, 사운드 오브 뮤직, 페임, 렌트, 시카고, 미녀와 야수, 노틀담의 꼽추, 아이다 등 작품을 지휘했다. 지금은 `킥 뮤지컬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호원대학교에서 뮤지컬을 가르치고 있다. 우주인을 꿈꾸며 비행학교를 다니기도 해서 경비행기 조종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다. 곱슬머리 삽살개 해태, 도깨비와 함께 살며 여름이면 이들과 목적지도 없이 국도를 운전하며 길이 부르는 대로 떠나는 `구름투어`를 즐긴다. 항상 새로운 것을 배우길 즐겨 지금은 8개월째 탭댄스를 배우는 중이다. `남자의 자격`으로 인한 유명세로 물론 불편해진 점은 있다. "슈퍼마켓에 가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가 되어 길거리에서 떡볶이 먹는 일도 이제 힘들어졌다"고 했다. 2012년까지 그의 공연스케줄 표에는 이미 빈자리가 없다.

[김슬기 기자 / 사진 = 김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