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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크리에이터

[최보식이 만난 사람] '트위터 팔로어' 43만명… '김연아를 앞선' 작가 이외수

[최보식이 만난 사람] '트위터 팔로어' 43만명… '김연아를 앞선' 작가 이외수

  •  입력 : 2010.10.24 21:56

"글 쓴다고 처자식 굶긴 삶 떳떳하지 않아… 요즘은 내가 대세"
親盧? 난 어느 정파와도 무관… 내 안티는 찌질하다고 생각… 트위터 치킨광고로 장학금 줘
지금은 두 끼 먹고 매일 씻어… 베스트셀러 작가로 30년인데 문단과 평론가는 나를 외면

10여년 만에 다시 만나니, 그의 외양이 상전벽해(桑田碧海)였다. 이외수(64)씨는 분홍색 폴라셔츠에 흰 스웨터를 받치고 백바지까지 입었다. 등과 뱃가죽이 붙어 구부정했던 그의 몸은 거의 직립 상태가 됐다. 안 감는 것을 철칙으로 삼았던 장발머리에는 이제 비듬 하나만 달랑 매달려 있었을 뿐이었다. 부스럼이 피었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내가 계속 카메라를 받고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매일 씻어야 해요. 과거에도 내가 남한테 피해를 주는 일은 안 했잖아요. 알다시피. 남의 결혼식에 가거나 세 사람 이상을 만나거나 작품에 들어갈 때면 꼭 씻고 옷도 갈아입었어요. 이제는 스타가 됐는데 관리를 해야지. 게다가 술 담배를 끊고 나니 입맛도 돌아와 하루 한 끼만 먹던 것을 두 끼를 먹어요."

정말 가장 달라진 것은 그의 대중적 인기였다. 그가 떠드는 인터넷 잡담(트위터ㆍtwitter)의 추종자만 43만명이나 된다. 일본의 아사히 신문에서 '한국에서 김연아를 능가하는 아이콘(우상)은 예순이 넘은 노인'이라며 취재하러 왔을 정도다.

―그 인기는 지난 대선부터 MB를 '까면서' 얻어진 것이죠? 일부 젊은층과 MB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들의 호응으로 비롯된 것으로 보는데.

"거 무슨 말씀을. 옛날에도 인기가 있었어요. 내 작품에는 늘 30만명 이상의 고정독자들이 있잖아요. 오히려 그런 정치적 발언으로 '안티'가 많이 생겼어요. 최초로 포문을 연 것은 당시 후보가 '국어와 국사를 영어로 가르치겠다'고 했을 때죠. '무식을 갑옷처럼 착용하고 계시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나'고 받았지요. 작가는 시대의 감시자라고 생각하니까요. 제일 괘씸한 것은 이런 나를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겁니다. 아버지는 무공훈장을 받고 국립묘지에 누워계시고, 아들 두 놈은 병역 필(畢)이고, 나도 36개월 빡빡 기다가 제대했는데 말입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주의적이었던 1970, 80년대에도 그런 '시대의 감시자' 역할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납니다.

"나는 실천이나 참여문학에 줄 서기만 안 했지, 그때도 비판은 했어요. 작품 속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한마디씩 했지요. 물론 정면으로 한 적은 없어요. 내 작품은 현실문제나 정치적인 것과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일각에서는 이 선생을 '친노파(親盧派)'의 아류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것은 없어요. 난 정치적 성향으로 MB를 '깐' 것은 아니에요. 내가 '이외수의 언중유쾌'라는 라디오프로 DJ를 할 때는 당시 노 대통령을 두들긴 적이 있어요. 욕먹는 사람은 자기 욕만 부각돼 보일 뿐이지요."

그는 산골 속에 앉아 날마다 트위터에 최소 3개, 최대 10개씩 글을 올리고 있다. 거의 주업이다시피 여기에 네댓 시간의 정성을 쏟아붓는다. 서재의 앉은뱅이 탁자 위에는 성능 좋은 컴퓨터와 돋보기들이 놓여 있었다.

―추종자들 사이에는 유명인이 됐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작가로서 이 선생을 염려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내가 언제 글을 쓰느냐 하겠지만, 박지성이 CF를 찍는다고 축구 못하는 것도 아니고, 김연아가 다른 활동을 한다고 스케이트 못 타는 것이 아니거든요. 어느 경지에 올라가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하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내가 글을 안 쓰느냐, 책이 계속 나오잖아요."

―글이란 누구든 못 쓰겠습니까. 좋은 작품, 깊이 있는 작품을 써내느냐가 관건이지요.

"내 글은 다 문학적이라니까요. 꼭 길어야 좋은 것은 아니에요. 트위터는 140자를 넘지 못하는데 전송하고 나면 마음에 안 들어 여덟 번씩이나 고쳐 올리기도 했어요. 살을 발라낸 글이지요. 나름대로는 열심히 트레이닝을 하고 있어요. 권투 시합 전 스파링처럼."

나중에 그가 "내 글에 대해 뭐라고 씹는 놈이 있으면 못 참는다. 그럴 때면 욕설도 불사하고 맹렬하게 맞붙는다"고 애착을 보였을 때, 속이 뜨끔했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 노력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보지만, 경박한 세태에 동조하고 영합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동안 내 방식으로 충분히 살았다는 거죠. 글을 쓰기 위해 방문에 철문을 치고, 내 스스로를 옭아매었고, 글을 쓰려면 수도사처럼 자신에게 가혹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혹독했던 삶이었죠. 여기로 옮기면서 다른 방식의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요. 어차피 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데…. '글 쓰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는 사슬을 다 끊어버렸어요.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쓴다는 겁니다. 벽을 허물 나이잖아요."

―객관적인 잣대는 아니지만, 이 선생 작품은 '들개'(1981년) 이후로 더이상 치열한 맛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쥐어짜는 게 이제 싫다는 거요. 초월적인 삶이 좋지. 고통 중에는 좋은 작품이 나오지 않아요.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는 데 급할 뿐이지. 나는 마흔세 살까지 처자식을 굶겼거든. 그게 결코 떳떳한 삶이 아니에요. 그때 나온 작품이 좋은 작품이 아니에요. 고통이 끝난 뒤에 좋은 작품이 나올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내 과거처럼 그렇게 궁상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고 봐요. 오히려 작가로서 멋있게 사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사는 곳이 강원도 화천이라 했지만, 읍내에서 한참 갔다. 군데군데 군용트럭과 탱크들이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산길을 한참 달리니 검정 새를 그려놓은 이정표가 겨우 보였다. '이외수 감성마을은 새가 바라보는 쪽으로 1.4km'. 혹시 그려놓은 새가 엉뚱한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화천군에서 26억원을 들여 그의 집을 지어줬다. 그는 청춘부터 환갑 때까지 살았던 춘천 생활을 청산하고 여기로 옮겨왔다. 그가 들어오니 첩첩 산속의 땅값이 일곱 배나 뛰었다고 한다. 그 집은 전국에서 '감성'을 갈구하는 이들의 '명소'가 된 것이다.

작가 이외수는“행복해지기 위해 사는 것인데 과거처럼 궁상스럽게 살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형편이 나아지니 인생관도 바뀌는군요.

"가끔 '젊은 날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나'라고 물으면, '아예 안 돌아가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나이가 들면 젊어서 고생은 아름다웠다고 하지만 내가 겪은 젊은 날은 너무 끔찍해요. 처가 식구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저런 놈에게 아직까지 붙어있나 이혼하지 않고' 하는 소리도 들려왔어요. 그런 왕따와 외로움을 모를 겁니다. 요즘도 아내가 '그때 당신 변소에 가서 몰래 운 적이 많았지?' 하면 울컥해집니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첫째예요. 가족이 딸려 있으니까 나도 용의주도합니다. 사람들은 내 외모를 보고 '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나는 많이 노력하고 도전해왔어요."

―TV 드라마와 예능프로까지 출연하니 이 선생이 원래 연예인인 줄로 아는 젊은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전에는 TV에 나오는 걸 꺼렸어요. 얼굴도 받쳐줘야 되고 말도 어눌하니 좀 기피했어요. 하지만 여기에 온 뒤로 예능 프로든 어떤 것이든 심지어 바둑알 까기까지 모두 수용했어요. 해보니까 정말 재미있어요."

―이런 이 선생이 어떤 조사에서는 '우리 시대 최고의 작가'로 꼽혔던데, 다른 문학 대가들은 상당히 기분 나빴을 것 같은데요.

"자기들이 1등 할 때 나는 기분이 안 나쁘겠나요(웃음). 사실 춘천에 살 때 내 문학기념관을 만들자는 논의가 있었어요. 그때 가장 먼저 반대한 쪽이 문인협회요. 당시 글 쓰는 사람은 찬성할 줄 알았어요. 그런 선례가 있으면 다른 작가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지요. 하지만 내가 그 대상이 되니까 인정을 못한 것이죠. 결국 내가 화천으로 오고 나니까, 뒤늦게 춘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게 됐어요. '춘천 3수'로 '막국수·호수·외수'가 있는데 '외수'가 빠져나갔다는 거죠."

―사실 어떤 평가보다 동업자들의 평가가 가장 중요한 겁니다.

"그쪽은 동업자가 아닌 것 같아. 그것이 내 방식대로 더 자유롭게 살 수 있게 조장해줬어요. 나는 더이상 작가로서 눈치를 볼 게 없어진 거죠. 내 작품에는 늘 고정독자만 30만명이 넘습니다. 한번 반짝한 게 아니라, 그런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30년을 유지했어요. 이를 문단이나 평론가가 주목했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실 난 글 잘 쓰는 작가로 인정받는 게 소망이었죠. 하지만 그걸 포기했어요."

―왜 주목하지 않았을까요? 작품성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시기 질투입니까?

"과일이 달면 달수록 벌레가 제일 먼저 꼬이지요, 하하하."

―인터넷상에서 젊은이들과 막 싸우기도 하던데, 나잇값을 못하는 것 아닙니까?

"내 감정대로 하는 거죠. 나이로는 이순(耳順)이라고 하나, 사실 귀는 안 순해졌어요. 내 입장에서는 '안티'는 찌질하다고 봐요. 지난번 학력 의혹을 받은 가수 타블로를 옹호하자, 그를 비방하는 '타진요'회원 20만명이 내 홈페이지를 공격했어요. 그때 '야 찌질이들아 너나 잘해라'고 맞붙었지요. 열 받으면 스트레스가 되지만 난 그걸 즐겨요."

―지난번 트위터상에서 치킨 광고를 해서 시끄러웠지요.

"국회의원이 시비를 걸어 시끄러웠지, 도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어요. 한 달에 네 번 그 치킨을 언급하면 1000만원을 주는데 얼마나 큰돈입니까. 치킨업체가 그렇게 제의했을 때, 마누라가 '이제 1000만원 있어도 살고 없어도 산다'며 기부하자고 해요. 멋있잖아요. 광고 문구를 만드는 것도 쉽지 않아요. '힘차게 하늘을 나는 독수리에게 닭이 말했다. 니가 천년을 날아봐라 치킨이 될 수 있나', '이외수에게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물으니, 치킨이 먼저다'. 그 돈을 농촌 청소년들에게 전액 기부해왔어요. 이를 국회의원이 뒷북치고 찬물을 끼얹을 줄 몰랐지."

―이동통신사 CF를 찍었을 때도 말이 많았죠.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사람만이 광고 모델이 될 수 있잖아요(웃음). 왜 말이 많았겠어요? 자기들이 내 작품을 읽어봤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겁니다."

―무슨 뜻인지?

"내 작품의 주인공은 대부분 자유분방해요. CF를 찍고 안 찍고 쪼잔하게 그런 걸 안 가려요."

그가 살아온 젊은 날에 대해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 같군요.

"나는 옛날이 정상적인 것 같은데, 어쨌든 순리대로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요즘 내가 하는 걸 보면 다들 부러워할 겁니다. 네댓 시간 틈틈이 트위터에서 토닥거리지, 나를 찾아오는 손님들이면 다 만나주고 사진도 같이 찍어주지, 그림을 그리지, 작곡하지, 노래 부르지…."

―요즘도 본인을 약자, 소수, 방외(方外), 비주류로 봅니까?

"요새는 내가 주류요, 하하하."

작별하려는데 응접실에 노래방 기계가 보였다. 아직 해는 지지 않았다. 맨정신에 그는 마이크를 잡고 한 곡 불렀고, 나도 답가를 했다. "이럴 때 술 한잔 해야 하는데…." 절정의 삶을 누리고 있는 그가 아쉬운 듯 말했다. 술 끊은 지 20년 가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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