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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기독교문화 콘텐츠 계발을 통한 선교와 목회

한국 교회의 기독교문화 콘텐츠 계발을 통한 선교와 목회

 최성수 기초신학연구소

미디어와 문화

IT산업의 발달로 인해 미디어들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사이월드, 블로그, 페이스 북, 트위터 등은 현대인의 사회적 관계망을 구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다양한 측면에서 문화를 변화시키고 있다. 분명한 것은 미디어가 문화를 변화시킨다는 사실이다. 미디어 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직접적인 선교가 결코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기독교가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는 미디어를 통한 선교가 절실하다. 미디어 선교를 위해 새롭게 등장하는 매체들에 익숙해지고 이것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간과할 수 없지만, 일반적인 미디어 활용 능력에 비교해 볼 때 뒤처져 있는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다양하고 신선한 콘텐츠를 계발하는 일이다. 필자는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이런 사실이 왜 쉽게 극복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면서 혹시 고리를 잘못 엮었기 때문이 아닐까를 생각해 보았다. 기독교 문화 콘텐츠 계발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며 그 가능성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과거 미디어를 통한 목회와 선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교회는 미디어의 발달과 더불어서 그것을 활용하는 일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다. 면대면(face to face) 커뮤니케이션이 익숙한 시대에는 거리 전도에 나섰고,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시작된 문자 시대에는 문서를 통했으며, 전파 미디어가 중심이 되던 시기에는 TV나 라디오를 활용한 방송선교에 열심을 내었다. 아직 드라마까지 제작할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 단순히 간증과 설교 혹은 찬양을 전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다큐멘터리와 시사 토론과 같은 각종 교양 프로그램들을 운영하였다. 컴퓨터가 일상화되면서 컴퓨터 기반 프로그램들이 많이 생산되었고 또 웹 선교를 위한 노력들이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최근에는 TGIF시대에 맞는 선교 방식을 개발하기 위한 노력이 한창 진행 중이다. 선교와 목회는 그간 이뤄진 선교의 노력들과 그에 따른 선교의 결실들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간단하게 말해서 기독교 문화선교와 문화목회는 세상문화를 따라가기에 분주했다. 얼마나 빠르게 적응하느냐에 따라 성공이 좌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기독교 문화를 통한 선교와 목회의 미래를 생각하며 다소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면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기독교적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문화에 신학적인 의미가 부재했던 적은 없었지만, 현대 기독교가 문화를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이제는 문화다”라는 구호가 말해주고 있듯이, 소통의 중심에 문화가 있기 때문이다. 이성 중심의 사고에서 감성, 상상력, 직관, 창의성, 영성 등을 중시하는 시대로의 변화가 가장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실은 문화에 대한 욕구는 이전부터 있었다. 문화에 대한 욕구가 간절했던 시기는 교회문화가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다양한 신앙 표현들을 인정하지 않은 때였다. 먼저는 일방적인 소통 방식을 고집하는 교회의 관행에 식상함을 느꼈던 성도들에게서 표출되었고, 그 후에 이것은 소통의 의미로 확대되었다.

세속화가 한편에서는 교회의 위기의식으로 여겨졌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교회의 벽이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는 인식도 있었다. 이런 경향에 따라 기독교 문화는 교회의 중심주제가 되었고, 소위 소통과 관련해서 중심적인 화두가 되었다. 교회적으로는 문화목회가, 그리고 교회 밖을 향해서는 문화선교가 다양하게 실험되었다. 학교에서는 문화목회와 문화선교를 도울 수 있는 방안들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관련 주제에 대한 강의가 개설되고 학과가 세워지기도 했다.

기독교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면서 기독교 문화가 세상 문화와 달라야 한다는 것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떻게 달라야 하는 것인가와 관련해서는 확실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단순히 성경적이고 교회적인 혹은 건전한 내용이 다뤄져야 하며 세상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원칙이 전부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이렇게 되면서 오직 그리스도인들만 즐길 수 있는 문화 생산과 변혁을 위한 문화 비판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소통을 위해 준비된 기독교 문화 행사에 그리스도인들만 있고 비그리스도인들이 외면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게 되면서 문화선교와 문화목회에 대한 비판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통 역시 목회에서 중요한 일이기 간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오늘날 관심의 중심에 있는 기독교 문화는 그리스도인들만을 겨냥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비그리스도인들의 문화소비만을 목적으로 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뜻하지 않게 기독교 문화의 핵심이 소외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연이나 전시만 있고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가 부재하는 축제로 끝날 수도 있다.

기독교 문화는 한편으로는 다양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본질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문화가 하나의 산업 아이템이 됨에 따라 이제는 창의적인 것이 문화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따라서 다양성과 본질, 그리고 창의성, 이 세 가지는 기독교 문화 콘텐츠를 계발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둘째, 공연 및 전시 혹은 교육 위주의 문화 행사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콘텐츠가 빈약했다. 복음성가와 교회절기 행사로 갖는 합창과 촌극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간혹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종교영화들과 순교자들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들이 상영되어서 갈증을 해소시켜주었지만 한국인에 의한 기독교 문화 생산은 저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들이 모일 수 있는 카페가 곳곳에 세워지고, 기독인 예술인들의 다양한 활동들이 무대 위에서 혹은 전시장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전개되는 것을 볼 때 시대의 변화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과거 기독교 문화가 빈약하고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시절에는 교회가 세상문화에 대해 지나치게 높은 벽을 쌓는다고 비난했지만, 최근 들어서 문화사역자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으뜸은 기독교 문화의 본질적인 가치이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다양한 문화를 생산하고 또 세상 문화를 기독교적으로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확인된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본질적 가치를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소통을 위해 노력해온 문화사역들이 오히려 복음보다는 문화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의 목소리이면서 동시에 문화목회와 문화선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정적으로나 기술적으로 열세에 있는 중소교회들은 문화사역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대화되고 있다.

 

셋째, 기독교 문화 콘텐츠 계발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관이 부족하다.

기독교 영성 가운데 하나는 표현의 능력이다. 성경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장르들은 성경기자들의 영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 경험은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예술적인 매개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된다. 표현은 단지 매체를 능숙하고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에만 있지 않으며, 분명한 주제들을 매체 안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문화가 산업의 형태로 나타나는 현실에서 문화 생산은 생산자의 입장만을 고집할 수 없으며 소비자의 필요와 문화적 욕구를 고려해야 한다. 기독교 문화는 우선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소비할 것을 겨냥하지만 또한 비그리스도인들도 함께 공유할 수 있도록 배려되어야 한다. 하나님 경험을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은유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축적된 노하우를 익혀야 하는데, 오늘날 이런 작업은 개인적인 관심의 차원에 머물러 있을 뿐,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곳은 소수에 불과하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기독교 문화의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 학교와 교회는 콘텐츠 계발을 위해 서로 힘을 합쳐 인재를 길러내야 하지만 이것의 한계는 결코 무시될 수 없다. 기독교 대학 내에 기독교 문화 콘텐츠를 계발하기 위한 학과가 없지는 않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활동이 미미하다. 오히려 일반 학교에 다니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문화에 뛰어들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또 그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더욱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적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 즉 전문 기독교 문화 사역자들을 제대로 양성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문기관 운영에 있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문화목회와 문화선교가 지금과는 다른 관점에서 돌파구를 모색해야 한다.

 

넷째, 기독교 문화 콘텐츠는 불법적으로 유통 혹은 소비되고 있다.

교회는 대체로 선교라는 미명하에 콘텐츠에 대해 무료를 요구하는 편이다. 주로 헌금에 의존하다 보니 당연하겠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기독교 문화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가 된다. 영화의 예를 든다 해도 과거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수많은 교회들이 불법 다운로드로 영화를 감상했고, 이스라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박해와 선교 현장을 다큐멘터리로 담은 <회복>의 경우 교회에서 대개 무료 상영을 요구하기 때문에 갈등을 겪는다는 말을 들었다. 가끔 교회에서 상영되는 영화 가운데 대다수가 불법이다. 공개 상영일 경우에는 일정한 개런티를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이다. 방송 출연료나 기독교 잡지나 신문들에 게재되는 글들에 대한 원고료 지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문화 생산에는 많은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 법이다. 비록 교회에서 후원하여 제작된 경우에도 지속적인 생산을 위해 콘텐츠에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한다. 교회가 지속적으로 후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고액의 제작비를 생각해본다면 결코 그럴 수도 없다. 만일 기독교 문화를 소비하는 일에 선교라는 미명하에 대가를 지불하기를 거절한다면 기독교 문화는 영원한 숙제가 되고 만다.

 

문화목회와 문화선교에서 블루오션을 위하여

기독교 문화사역의 미래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교회가 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신앙의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매개를 찾기 위함이며, 교회 내외적으로 복음을 소통하려는 데에 있다. 문화는 하나의 형식일 뿐 결코 본질이 될 수 없다. 미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헌신하는 사람에 있다. 복음을 교회에서 혹은 세상에서 소통하기 위해 필요한 문화생산과 유통을 위해 인재를 키우는 것이 중요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기술적 재정적인 측면에서 세상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필자는 문화를 내적 문화와 외적 문화를 구분하기를 주장하였다. 공연 및 전시 위주의 문화가 표현을 주로 하는 외적인 문화라고 한다면, 내적인 문화는 정신적인 가치나 성품 같은 것을 가리킨다. 외적인 문화를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라 현재 전적으로 손을 놓고 있는 정신적인 가치문제나 덕스런 성품을 갖추도록 하는 일에서 교회가 대안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블루오션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내적 문화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손을 놓고 있는 내적 문화를 교회의 과제로 삼을 때 복음의 본질적인 측면들이 두드러질 것이며, 이렇게 될 때 복음을 표현하는 외적 문화는 전혀 다른 형태의 옷을 입게 될 것이다.

사실 복음은 외적인 표현보다도 내적인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복음으로 인한 변화도 본질적으로 내적인 가치와 성품, 그리고 태도에 있어서 변화를 의미한다. 내적 문화가 외적 문화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 반대는 결코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면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문화 콘텐츠 계발도 필요하지만, 이와 병행해서 기독교적인 가치를 내면화시킬 수 있는 문화 프로그램도 블루오션의 전략의 일환으로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