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行試, 너마저… 고시, 이제 별 볼일 없나

行試, 너마저… 고시, 이제 별 볼일 없나

국민일보 | 입력 2010.08.19 18:24

"고시시대가 저물고 있다."

54년 역사의 고시잡지 '고시계' 편집장 전병주씨의 진단이다. 사법시험, 외무고시 폐지에 이어 행정고시마저 대폭 축소됨으로써 고시제도가 사실상 무너졌다는 것이다.

1949년 국가공무원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된 고시제도는 60여년간 우리나라 관료사회의 근간을 이뤄 왔다. 우리사회에서 고시는 채용제도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그래서 고시의 종말은 기회의 균등이라는 가치, 관료조직의 혁신, 인재상의 변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논점을 던진다.

고시의 종말

지난주 행정안전부는 내년부터 5급 신규 공무원의 30%를 민간 전문가로 선발하고, 행정고시 선발 비율을 2015년까지 50%로 줄이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을 내놓았다. '행정고시'라는 말도 '5급 공채'로 대체된다.

앞서 지난 5월 외교통상부는 2013년부터 외무고시를 폐지하고 1년제 특수대학원인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매년 50명의 외교관을 신규 충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사법시험은 2017년 폐지된다. 2007년 통과된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법에 따라 2017년부터는 로스쿨 졸업자만 변호사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고시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분위기는 서울 관악구 고시촌에서도 감지된다. 관악구 생활경제과 김현석 팀장은 "고시제도 변화로 고시원 업주 대부분은 공실률이 늘어날 거라고 걱정하고 있다"며 "구에서도 고시학원 외에 다른 학원들을 유치할 대책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서림동 김흥겸 동장은 "로스쿨 도입 이후 고시원이 밀집한 서림동과 대학동 인구가 계속 줄고 있다. 고시생 3만명이 빠져나갔다는 소문도 돈다"고 전했다. 신림2동에 있는 고시 전문 베리타스법학원의 정하영 부원장은 "고시학원의 시장 규모가 축소되니까 사업적인 면에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에는 고시제도가 이대로 사라지진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전병주 편집장은 "여당에도 행시 폐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 변동의 여지가 많다"고 했다. 그는 "사시도 로스쿨과 사법시험 병행으로 갈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변호사는 일종의 직업인데 로스쿨 졸업자만 변호사 시험을 볼 수 있다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많다는 것이다.

빛과 그림자

"60, 70년대 고시가 없었다면 공직은 다 '있는 집' 자제들 차지가 됐을 것이다. 고시를 통해 시골 농부의 자식들도 공직에 진출해 커 나갈 수 있었다. 고시는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균등을 상징했다."

행시 출신으로 '고위공무원단(행정기관 국장급 이상 1500여명)'에 들어 있는 이권상 국민권익위원회 상임위원의 말이다. 그는 "고시 출신들은 관 주도 경제성장 시대의 핵심 세력이었다"고 평가했다.

김광웅 서울대 명예교수는 "고시는 있어야 되고 또 없애야 된다. 그게 정답이다"라는 말로 고시제도에 대한 모순된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중앙인사위원장을 맡아 행시에 PSAT(공직적성테스트)를 도입하는 등 시험 방식을 수정했고, 중앙부처 국장직에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공직 개방 흐름을 주도했다. 그랬지만 고시제도의 가치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는 게 그의 입장이다. "신분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시험 문이 열려 있는 고시제도는 우리나라가 기회의 땅임을 보여주는 제도였다. 기회의 땅이라는 가치는 지금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이다.

서영복 행정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은 장기적으로 고시가 폐지되는 게 맞다면서도 우려를 표시했다. 그는 "고시가 사라지면 돈 없는 사람들이 계층 상승을 꿈꿀 수 있는 출구가 막혀버리는 것 아니냐"며 "그렇게 된다면 지역간·계층간 통합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고시는 오랜 세월 기회를 상징했다. 누구나 응시할 수 있고, 고시에만 합격하면 주류 세력에 진입할 수 있었다. 고시가 있어서 학벌이나 배경이 없는 젊은이도 출세를 꿈꿀 수 있었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고시의 역사는 수많은 성공 스토리로 장식돼 있다. 그러나 고시가 드리운 그림자도 짙다. '고시병' '고시낭인' '고시망국론' '고시공화국' 등으로 표현돼온 고시열풍이 그렇다.

각종 고시와 7·9급(국가직) 공채를 포함해 공무원 시험 응시자는 한 해 20만명이 넘는다. 최종 선발 인원은 2500여명에 불과하다. 사시는 2만∼3만명이 응시해 1000명이 합격한다. 합격률은 4% 안팎. 지난해 행시 응시자는 1만4695명으로 경쟁률은 45대 1이었다. 최근 5년간 경쟁률은 꾸준히 40대 1을 넘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공과 상관없는 고시에 장기간 매달려 대학 교육이 황폐화됐고, 국가적으로 인력 낭비가 초래됐다. 이 때문에 고시를 이대로 유지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그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제너럴리스트 VS 스페셜리스트

공무원 채용 방식으로 고시제도가 가진 최대 장점은 공정하다는 것이다. 고시가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한다. 그러나 고시가 고위 공무원을 뽑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보는 이는 드물다. 고시제도를 바꿔야 한다는 얘기는 여기서 출발한다.

이권상 상임위원은 "미국 등 선진국은 서류전형과 면접으로 많이 뽑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신뢰성 문제 때문에 필기시험을 선호해 왔다"며 "고시제도는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는 타당성은 취약했지만, 우리나라가 워낙 객관성에 민감해 불가피하게 유지돼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고시는 '고시형 인간'을 배출한다. 공병호 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은 고시형 인간을 '사각(四角) 진 인재'라고 표현했다.

"고시를 통과하려면 요구되는 스펙이 있다. 공직에 들어가는 단계부터 틀이 딱 잡히는 것이다. 거기에 관료사회의 틀이 또 작동한다. 그러니까 공직사회에 사각 진 인재들이 포진하는 것이다."

공 소장은 정부에서 내는 홍보자료를 예로 들면서 "누가 작성해도 똑 같지 않나. 그 자리에 누굴 앉혀도 똑같은 결과물이 나오는 거다. 제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들어가서 다 그렇게 똑같이 제너럴한 사람이 된다"고 덧붙였다.

연내 퇴임하는 1급 공무원 이모씨는 "몇 과목 달달 외워서 과락 없으면 합격이다. 그 결과로 지난 30년간 고위 공무원으로 잘 지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고시형 인재란 한 마디로 모법답안을 잘 써내는 사람"이라고 정리했다.

관료사회는 고시형 인재들에 포위돼 있다. 2009년 기준으로 중앙부처 고위공무원단 1500여명 중 71%가 행시 출신이라는 집계가 있다. 국토해양부는 고위공무원 28명 중 고시 출신이 아닌 경우가 1명에 불과하다.

고시제도 개편의 핵심에는 관료사회의 다양성과 전문성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가 자리 잡고 있다. 행안부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현재 고위공무원 채용 방식만으로는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가진 전문가를 확보하기 어렵고, 이는 결국 국가경쟁력에 도움이 안 된다는 지적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공병호 소장도 "우리나라 관료 조직에서 기술직에 대한 굉장한 천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고, 그건 우리 사회가 아직 양반사회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라며 전문가 비율이 높아져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공직 문호를 개방해 고시형 인재 중심의 공직사회를 바꿔보려는 흐름은 10여년 전부터 존재했다. 직위공모제, 개방임용제, 외국인채용제 등이 시도됐다. 그러나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중앙행정기관 과장급 직위는 본부에 1483개, 소속 기관에 1947개 등 모두 3430개다. 그런데 본부의 경우 고작 31개(2.1%)만 개방형으로 운영하고 있다. 행안부의 이번 발표는 공직 개방 범위를 과장과 사무관까지 대폭 확대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염재호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는 고시제도 폐지에 앞서 현행 개방임용제의 정비가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이미 개방임용제가 실시되고 있는데, 결과를 보면 일반 전문가들은 거의 안 들어갔다. 관료로 있다가 김앤장법률사무소 같은 데 나갔다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염 교수는 "들어오면 따돌림 당하고, 보수 낮고, 임기 보장도 안 되는데 민간에서 누가 오려고 하겠느냐"며 "이런 문제를 그대로 두고 문호만 넓힌다면, 정부에 들어와서 자기 경력을 높이거나 네크워크 구축한 뒤 나가서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들어올 가능성도 높다"고 우려했다.

치명적 위험, 정실주의 채용

고시 대신 '특채'로 고위 공무원 채용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채용의 공정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이냐가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고시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고시제도 폐지를 현대판 음서제도(과거시험 대신 출신을 따져 관리로 임용하던 조선시대 제도)의 부활로 평가하면서, 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 받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차지할 것이라는 우려가 들끓고 있다. 일각에서는 로스쿨이 배출하는 인력을 소화하기 위해 행시를 축소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특채의 공정성 문제는 외부 전문가와 내부 관료의 화학적 결합 여부와 함께 가속화되는 공직 개방의 성패를 좌우할 거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공병호 소장은 "한국 사회가 평가에서 공정성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며 "실행 과정에서 공정성 문제가 분명히 불거져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특채에 정치권 입김이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1급 공무원 이모씨는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의 핵심은 공직 개방 확대와 이에 따른 정실주의 요소 배제"라면서 "정권의 전리품으로 공직을 차지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김광웅 명예교수는 "정부 조직 내에 정실주의 인사가 횡행하는 게 사실이고, 그나마 정권에 휘둘리지 않고 정부의 중심을 잡으며 버틴 게 행시 출신들이었다"며 "이제는 배후의 힘으로 정부에 진입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우려했다. 그는 "어떤 자리에 회계사 5명이 응시한다고 하면 제비뽑기로 채용하는 게 차라리 낫다. 그 정도로 자리를 둘러싼 암투가 심하다"며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공직을 가지고 장난할 수 없도록 하는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제도의 본질이 훼손될 것은 뻔하다"고 주장했다.

염재호 교수는 "이미 있는 제도들을 개선하면 될 텐데 제도를 너무 쉽게 바꾸는 것 같다"며 "공론화 과정도 없이 왜 이렇게 급하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또 행정가의 자질로 전문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에 대해서도 반론을 폈다.

"행정의 전문성을 우습게 아는 듯하다. 행정가는 전체를 조정하고 관리하고 아울러야 하는 제너럴리스트일 필요가 있다. 스페셜리스트는 연구원이나 교수 등을 활용하면 된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지 않나."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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