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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크리에이터

패션계의 '하얀 거인' 스러지다

패션계의 '하얀 거인' 스러지다

  • 입력 : 2010.08.13 03:01

앙드레 김 별세
국내 최초 남성 디자이너로 세계와 소통한 '패션 외교관'
스타들도 무대 서려고 경쟁… 대중적 인기도 많이 끌어

마지막 꿈속에서도 그는 '새하얀' 실과 천으로 바느질 땀을 떴을 것이다.

1935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난 앙드레 김(75)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열정을 보였다. 사람들의 말처럼 그는 오랫동안 뜨거운 열정과 활력으로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았던 디자이너였다. 그는 1950년 6·25 때 부산으로 피란을 갔다. 이때 우연히 접한 영화 '퍼니 페이스'에서 오드리 헵번이 드레스를 입고 나온 모습을 보며 옷을 향한 열망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혼자 습자지에 의상을 스케치하며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품었다. 1961년엔 최경자씨가 설립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입학생 30여명 중 단 셋밖에 없었던 남학생이다.

패션의 ‘꿈과 환상’을 강조했던 그는 여성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독창적인 패션 세계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사진은 2008년 제주도에서 패션쇼를 마친 앙드레 김이 관객들에게 인사하는 모습이다. /이종현 객원기자
은막(銀幕)을 동경하는 마음에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적도 있다. 1959년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감독 박종호)가 그것. 1962년엔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열었다. 그해 학원을 졸업하고 서울 중구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를 차렸다. 대한민국 최초의 남자 디자이너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창이 달랑 하나 달린 작은 가게. 옷 10여벌을 걸어놓으면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비좁은 공간에서 앙드레김은 그렇게 대한민국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서 비상(飛翔)을 꿈꿨다.

1966년 프랑스 의상협회 초청으로 연 첫 파리 컬렉션. 당시 르 피가로지(紙)는 그가 내놓은 화려한 드레스와 보석이 박힌 옷을 보고 "선경(仙境)의 마술"이라고 호평했다. 1968년엔 미국 뉴욕에서도 패션쇼를 열었다.

그는 다채로운 문화 콘텐츠를 만들어 외국과 소통했던 패션 외교관이기도 했다. 이집트 피라미드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에서 패션쇼를 열었고,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공식 초청으로 바르셀로나에서 화려한 무대를 선보였다.

"앙드레 김 무대에 서야 스타로 인정받는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그의 무대는 연예인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의 무대엔 김희선·이영애·장동건·최지우·배용준·김태희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잇달아 섰다. 팝스타 마이클 잭슨과 배우 나스타샤 킨스키, 브룩 실즈도 그가 디자인한 옷을 입었다.

(사진 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앙드레김은 데뷔 초창기부터 수많은 연예계 인사들과 우정을 나눠왔다. 사진은 1970년대 당시 영화배우 윤정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기념 패션쇼를 마치고 카메라 앞에 선 앙드레김. 왼쪽은 아들 중도씨다. / 1987년 앙드레 김이 미국 배우 브룩 실즈와 함께했다. / 캣워크에서 그는 언제나 화려했다. 세계적인 모델 나오미 캠벨(왼쪽)도 그가 창조한 미학에 동참했다. 사진은 2007년‘코리아 패션 월드 인 서울’패션쇼. /연합뉴스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던 그는 1982년 당시 18개월이던 아들 중도씨를 입양했고 2005년에는 쌍둥이 손자를 얻어 할아버지가 됐다. "남들은 인생의 반쪽을 여인에게서 찾지만, 나는 이미 패션에서 그 반쪽을 찾았다." 평소에 고인이 지인들에게 하던 말이다.

그 반쪽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앙드레 김은 일흔이 넘는 나이에도 의욕적으로 일을 했다. 올 들어서도 지난 3월 중국 베이징에서 단독 패션쇼를 열었고, 8월에는 전국 3군데에 란제리 매장을 확대 오픈하며 나이를 초월한 열정을 보였다.

패션 디자이너 1세대로 분류되는 진태옥씨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인데 우리 곁을 떠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패션 디자이너 손정완씨는 "평생을 남다른 열정으로 살았던 분인 만큼, 더 오래오래 우리 곁에 계실 거라고 믿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2008년 문화훈장 보관장(3등급)을 받았다. 말년엔 보석과 도자기, 속옷, 안경 등 다양한 분야로 '앙드레 김' 브랜드를 잇따라 런칭하며 사업을 성공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월에 덧씌인 피로감을 못 이기는 모습을 보여 주위를 안타깝게 하기도 했다. 뜨거운 '화이트'의 창조자, 그리고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할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거인(巨人)이 하늘로 갔다. 유족으론 아들 중도(30)씨가 있다. 발인 16일 오전 6시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02)2072-2091

앙드레 김이 남긴 말

앙드레김은 평생 품위를 잃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머리칼을 흐트러뜨린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서는 법이 결코 없었고, 매일을 한결같이 눈(雪)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 왔다. 그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긴 숱한 어록 역시 앙드레김이 평생 추구했던 삶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보여준다.

"나의 실제 나이는 67세지만 나의 정신연령은 20대다."(2002년 회고록 '마이 판타지')

"고독과 아쉬움이 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인터뷰 중 평생 독신으로 사는 심정에 대해)

"저는 테이블에 걸터앉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사진 촬영 중 탁자 위에 앉아달라는 요구에)

"제 손은 투박하지만 제 옷은 눈물겹게 섬세하죠."("유난히 투박한 손을 지녔다"는 기자의 말에)

"난 항상 시를 쓰고 싶었다. 내가 무대 위에 늘 거대한 서사시를 만들어 올리는 이유다."(조선일보 창간 90주년 행사에 참석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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