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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자전: 유쾌한 비틈과 이야기의 힘

방자전: 유쾌한 비틈과 이야기의 힘

신승일 한류전략연구소장

애초에 <방자전>이 있었다. 주인공 방자는 반상의 차이가 엄격하여 이몽룡이 점찍은 춘향 아씨를 대놓고 가까이 하지 못했지만, 춘향과 방자의 마음은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이몽룡이 남원을 떠날 때 몸종 방자는 남원에 남게 되어 춘향과 사랑을 불태운다. 남원을 떠나 한양에서 마음잡고 과거에 급제한 이몽룡은 어사 직을 제수 받는 과정에서 환관으로부터 괄시를 당한다. “당신은 내가 우습게 보이지. 나도 당신이 우습게 보여” 요즘으로 치면 행시나 사시를 패스하고 연수원 다녀와서 사무관 직이나 검사 판사에 임명되는 시점에서 환관이 또 말한다. “다들 비슷비슷해. 뭐라고 할까? ‘나만의 이야기’ 같은 것이 없어.” 요즘 말로 하면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얘기다.
  
한 해 수백 명에서 천 명 가까이 고시에 합격하여 행정 부처나 검사 판사직에 임명된다. 그들은 계급의 사다리를 타고 오르기 위해 안간 힘을 쓰고, 조직의 울타리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내부적으로 단결한다. 엘리트 군상들의 모습이 예나 그 때나 비슷했나 보다. ‘미담’이 없는 개인은 일개미처럼 일만 열심히 했지 승진하지 못한다. 실력은 대체적으로 고만고만하다. 자신만의 브랜드가 갖추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출세의 황금률이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몽룡은 여기서 힌트를 얻는다. 벼슬을 제수 받은 동기 중 한 명이 남원에 부임할 신임 사또 후보인 변학도였는데, 그의 취향과 여성관에 대해 알아차리곤 그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계략을 꾸민다. 그에게 춘향의 존재에 대해 일러주고, 남원에 부임하거든 춘향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일러 준다.
  
방자와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던 춘향은 이몽룡이 어사로 남원에 왔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 또한 정략적으로 이몽룡을 이용하여 출세하고자 한다. 춘향은 이몽룡과 계략을 꾸민 후, 끝내 고문을 참아 암행어사 출두로 승자가 된다. 변학도는 제수 동기인 이몽룡에게 이용당하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다. 춘향과 몽룡은 오래 전에 약조했던 ‘백년 가약’을 맺는다. 사랑보다는 정략에 의해 결합한 것이다. ‘미담’의 주인공으로 떠오른 몽룡은 2계급 특진하고, 춘향 역시 정실부인으로 부귀영화를 누린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춘향전>이다. 방자는 이러한 계략과 음모를 담은 오리지널 <방자전>을 세상에 내놓는 대신, <춘향전>으로 대신할 것을 대필 소설가에 주문한다. 방자는 몽룡의 춘향에 대한 살인 미수로 맛이 간 춘향과 살면서 ‘마음만은 주인공’으로 살면 된다며 자위한다.
  
<방자전>이 상영 두 달이 안 되어 관람객 300만 명을 동원했다. 월드컵이 끼인 6월 한 달에만 273만 명이 관람하여 흥행 1위를 차지했다. <음란서생>의 김대우 감독은 <춘향전>의 줄거리를 대부분 차용하지만, 원전을 유쾌하게 비틀어 그럴 듯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방자전>이 원전이 아닐까 착각하게 만든 것은 설득력 있는 이야기의 힘이었다.
  
툭 기술, 뒤에서 보기, 은꼴편, 차게 굴기 등 고금을 통해 진리처럼 사용되는 남녀 간의 사랑기술도 눈여겨 볼만하다. 춘향을 조종하는 월매, 그리고 <춘향전>에는 없던 방자의 사부 마노인이 재미를 더해 준다.
  
결국은 이야기다. 방자와 몽룡 두 남자를 주무른 춘향이를 홍살문을 세울 열녀로 만들고, 평범한 엘리트인 이몽룡을 왕실에서 발굴한 미담의 주인공으로 변신시키고, 변학도의 독특한 여성 취향이 파멸로 가는 재료로 사용된 것도 이야기의 힘이었다. 춘향의 신분상승 욕망과 이몽룡의 속물적인 출세지향주의가 맞물려 ‘인생사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비틀어 <로미오와 줄리엣>에 버금가는 <춘향전>을 만든 것이다. 상상력과 창의성이 깃든 이야기는 불황 가운데서도 시장과 관객을 보장한다.
  
소재의 빈곤을 탓할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버무리고 비틀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유능한 작가나 감독의 필살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