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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체계/상상력

지킬의 후예에 필요한 건 ‘창조적 다중인격’

지킬의 후예에 필요한 건 ‘창조적 다중인격’
한겨레 한승동 기자기자블로그
» 정여울 /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청소년인문학 /

나쁜 남자, 사이코패스, 팜 파탈로 대표되는 대중문화 콘텐츠의 단골 악역들. 최근 드라마나 영화에서 눈에 띄게 급증한 악역들은 하나같이 인간의 ‘어둡고 은밀하고 사악한’ 본성에 호소한다. 결국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나던 기존의 스토리와 달리, 최근 급증하는 악역들은 인간의 사악함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악인 예찬으로 흘러가는 듯한 심상찮은 사회 분위기는 ‘착한 사람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통념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인간의 사악한 본성에 대한 탐구가 억압되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곧바로 그 사악함의 ‘결과’에 노출된다. 인간이 어디까지, 어떻게, 왜 사악해지는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이 악역들은 심지어 참신한(!) 캐릭터로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는 이런 악역들이 최신 트렌드를 반영하는 신상품이 아니다. 로버트 스티븐슨의 <지킬 박사와 하이드>는 인간의 사악함이 탄생하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로서 최근 유행하는 ‘도시형 악역 캐릭터’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악인은 ‘우리는 결코 저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경계심으로 다가와, 나에게도 혹시 저런 욕망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심어준다. 우아하고 지적이고 모범적인 지킬 박사의 또 하나의 자아인 사악하고 야만적이며 폭력적인 하이드. 그는 어떤 도덕과 법률에도 지배당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을 자극한다. 지킬 박사는 남들 앞에서 모범적인 자아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지나치게 억압한다. 그의 위태로운 가면이 찾은 탈출구가 바로 하이드다. 체면이나 명예는 물론이고, 자신의 악행에 대한 죄책감조차 사라진 괴물적 신체, 하이드. 하이드는 지킬이 자신의 ‘저급한 요소’라 불렀던 부분이 육화된 것이었다.

지킬 박사의 실패는 단지 과학적 실험의 실패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출발한, 인간에 대한 왜곡된 ‘사유’ 자체가 문제였다. 지킬 박사의 실패는 단지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사유의 실패고 삶의 실패다. 하이드의 천인공노할 범죄 행각은 인간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벌어진 참극이었다. 하이드는 오직 체면과 명예만이 지상 목표인 위선적인 삶이 도출해낸, 억압된 무의식의 그림자다. 바람직한 사회생활을 위해 요구되는 각종 복잡한 에티켓과 화려한 처세술은 인간의 솔직한 욕망을 은폐하고 조작하는 ‘도시형 라이프스타일’의 끔찍한 대가였던 것이다.

각자의 취향과 기분에 따라 마음에 드는 자아 이미지를 디아이와이(DIY)처럼 자유로이 고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아한 자아’를 극대화하면 ‘솔직한 자아’가 울고, ‘신중한 자아’를 택하자면 ‘성급한 자아’가 울게 마련이다. 내 속엔 내가 너무나 많아 나 자신조차 쉴 곳이 없어질 지경이다. 내 맘에 드는 자아 이미지, 더욱 ‘나다운 나’의 가면을 가꾸고 다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가면을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 가면 때문에 더 큰 고통을 겪는 지킬 박사처럼, 남들이 아는 가면과 자신만이 아는 가면의 차이로 이중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매일 ‘가면의 아이디’를 쓰고 컴퓨터 뒤에 숨어 타인을 비난하면서 쾌감을 얻는 악플러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아한 가면’에 비해 ‘초라한 내면’으로 고통 받는 지킬 박사의 후예들과는 달리 자신에게 딱 맞는 가면을 찾아 행복해지는 가면들도 많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근엄한 정체성의 가면을 훌쩍 벗고 그 어떤 직함도 아닌 그저 ‘나’로서 행복해지는 사람들. 자신이 만든 블로그 공간에서 일상생활보다 더 열정적이고 행복한 ‘또 하나의 삶’을 가꾸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굳이 다채로운 가면을 바꿔가며 쓸 필요가 없는, 어디서나 투명한 자기 자신인 채로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닐까.

가면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가면이 많은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위급할 때 쓸 수 있는 가면이 전혀 없을 때다. 우리는 남에게 보이는 ‘사회적 자아’만으로는 인간 본성의 다양성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체면이나 지위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일상이라는 무대 뒤편에서 심각한 자아의 붕괴현상을 겪기 쉽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꼭 맞는 가면을 쓸 수 있다면, 억압된 본성을 해방시키면서도 자신을 파괴시키지 않는 저마다의 맞춤형 가면을 발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는 갑갑한 일상의 책무에서 벗어나 자신의 개성과 욕망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내면의 아이디, 진심의 가면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는 어떻게 ‘나다움’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자기 안의 다양한 가능성개발하는 ‘창조적 다중인격’의 가면을 발명할 수 있을까.

정여울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