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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름다운 길 걸으며 사유(思惟)했다니… 부러울 뿐"

"이 아름다운 길 걸으며 사유(思惟)했다니… 부러울 뿐"

  • 입력 : 2010.03.28 23:28

[길위의 인문학] 두 번째 탐방 '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
낙동강 끼고 청량산까지… 기암괴석 절벽아래 '예던길'
"山처럼 어질게 살라"는 퇴계의 가르침 절로 새겨

"한 차례 꽃이 피면 또 한 차례 새로워, 차례차례 하늘이 내 가난을 위로하네. 자연의 조화는 무심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우주의 이치는 말도 없이 절로 봄을 머금었네…."

성우 배한성씨가 경북 안동시 도산서원 앞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시 '꽃구경'을 읊었다.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가슴에 담고자 동행했다"는 배씨는 "이곳에 오니 물질에 찌들었던 영혼이 맑아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문학을 일상생활 속에 심자는 취지로 조선일보·국립중앙도서관·교보문고가 주최하고 문학사랑·한국도서관협회·대산문화재단·한국연극협회가 후원하는 '길 위의 인문학' 캠페인의 두 번째 탐방인 '인문학,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가 26~27일 경북 안동에서 펼쳐졌다. 퇴계는 중앙 정계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이곳에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다.

“눈 녹고 얼음 풀려 맑은 물 흐르는데 살랑살랑 실바람에 버들가지 휘날리누나….”26일 오후‘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탐방단이 퇴계가 걸으며 사유했던 오솔길인 예던길을 따라 걷고 있다. /안동=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이번 탐방에는 10대 1의 치열한 경쟁을 뚫고 선정된 참가자 35명과 함께 소설가 김주영씨, 최근 퇴계의 마음공부법을 고찰한 '함양과 체찰'을 펴낸 신창호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가 초빙강사로 함께했다. 첫째 날 코스는 안동시립도서관~도산서원~퇴계종택~퇴계묘소~예던길(단천교), 둘째 날 코스는 예던길(농암종택)~청량정사~예던길(청량산)로 이어졌다.

서울에서 4시간 차를 달려온 탐방단이 굽이굽이 산길을 한참 휘돌아 들어가니 아담한 산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도산서원이 눈에 들어왔다. 신창호 교수가 "추울 땐 밖에 나가지 않고 공부만 하고, 더울 땐 산을 오르며 시를 쓸 수 있도록 깊은 골짜기에 서당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탐방단은 퇴계를 모시는 사당인 서원 내 상덕사에 들어가 위패를 배알하는 알묘(謁廟) 의식을 거행했다. 퇴계의 14대손(孫)인 이원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위원이 "도산서원 알묘는 여성에게 거의 허용되지 않는데 '길 위의 인문학' 캠페인을 위해 특별히 허가했다"고 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퇴계의 길을 따라 걷다’탐방단이 도산서원에서 퇴계의 위패를 배알하는 알묘(謁廟) 의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유생들이 착용했던 도포를 입고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다. /안동=이태경 기자
이번 탐방의 압권은 퇴계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예던길' 걷기였다. 도산서원 근처 단천교에서 시작해 낙동강을 끼고 봉화 근처 청량산까지 죽 올라가다 보면 병풍처럼 둘러싼 산줄기 아래로 오솔길이 펼쳐져 있다. 찾는 사람이 드물어 조용히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신창호 교수는 전망대에 올라 "현명한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고 했다"며 "앞을 막는 바위가 있으면 물처럼 돌아서 가되 옳다고 생각한 것은 절대 바꾸지 않는 산처럼 현명하고 어질게 살라는 퇴계의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기자"고 말했다.

둘째 날 찾은 농암종택에서 옹달샘까지 예던길은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절벽이 수려한 절경을 자랑했다. 김주영씨는 절벽 사이에 매달린 벌집을 가리키며 "퇴계 집안에 200년 동안 꿀을 제공한 말벌 집안"이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고, 여행작가 이해선씨는 "퇴계 선생이 이토록 아름다운 길을 걸으며 사유를 했다니 그저 부러울 뿐"이라고 감탄했다. 옹달샘부터 5㎞ 정도는 사유지(私有地)로 출입이 금지돼 있어 탐방단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발길을 돌려야 했다.

1박2일은 생각보다 훨씬 짧았다. 김건수(56·경기도 성남)씨는 "30년 넘게 줄곧 일만 하다가 내 삶의 좌표가 어디쯤 와 있는지 되새겨보고 싶어 휴가를 내고 왔는데 제일 잘한 일 같다"며 "전문가 교수님과 상상력 풍부한 소설가가 가는 곳마다 설명을 곁들여주니 더욱 맛깔 나다"고 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들과 함께 온 김태영(48·서울 상암동)씨는 "1000원권 지폐에서 봤던 퇴계 선생에게 끊임없이 수양하고 반성하던 삶의 자세를 배우고 간다"며 "아들이 아빠랑 이번 탐방에 참여한 걸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탐방의 마무리는 청량산 아래에서 이뤄졌다. 탐방단은 "하루만 더 있다 가면 안 되느냐"고 진행팀을 졸랐다. "만남과 이별이 길 위에 있더라"고 말해 박수 세례를 받은 홍성자(56·서울 삼성동)씨는 "'길 위의 인문학'을 함께하니 평범한 가정주부인 내가 이런 유식한 말도 다 하게 됐다"며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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