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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

[조선데스크] 자원 빈국의 축복

 

차학봉 산업부 차장대우
얼마 전 현대중공업·STX 등 우리 기업인들이 이라크 바그다드를 찾았다. 석유플랜트·화력발전소·주택건설 등 전후 복구사업을 수주하기 위해서다. 의향서(MOU)를 체결한 석유플랜트사업만도 32억달러나 된다. 자살 테러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국 기업들이 이라크를 방문한 것은 석유매장량 세계 3위의 자원 부국이기 때문이다. 오일쇼크로 유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이라크와 같은 석유 부국은 우리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이라크의 지금 처지를 보면 정말 격세지감을 느낀다.

과거 석유는 우리 국민의 비원(悲願)이었다. 그래서 제7광구에서 석유가 나기를 기원하는 '제7광구'라는 노래까지 유행했다. 하지만 석유 같은 천연자원이 오히려 경제발전을 가로막는 덫이 되기도 한다. 이라크만이 아니다. 석유·다이아몬드·코발트 등 자원이 많은 나이지리아·앙골라·차드·콩고는 끊임없는 유혈극 속에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천연자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말까지 나온다.

'천연자원의 저주'는 후진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네덜란드는 1959년 북해에서 엄청난 천연가스를 개발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렸지만 재앙이 됐다. 가스 판매로 인한 외환 수익은 자국 통화가치를 급등시켜 수출경쟁력을 급락시켰다. 또 노조는 더 많은 분배를 요구, 노사갈등도 심화돼 제조업 경쟁력이 급속도로 하락했다. 영국의 경제전문잡지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자원이 오히려 국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네덜란드 병'(Dutch diseas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냈을 정도이다.

최근 다시 글로벌 금융위기의 재발 우려를 낳고 있는 그리스·스페인도 또다른'천연자원의 저주'에 걸려 있다. 이들 나라는 기후가 좋고 아테네신전·알람브라궁전 등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갖고 있어 국민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관광객이 밀려드는 축복받은 관광국가이지만 너무 방심했다.

국가뿐만 아니라 도시의 운명도 천혜의 입지가 축복만은 아니다. 석탄·철광석 등이 많이 나는데다 사방팔방의 교통 여건을 바탕으로 20세기 전반기 성장세를 구가하던 디트로이트·버펄로 등 미국의 전통 산업도시들은 새로운 산업을 찾지 못해'녹슨 도시'(Rust belt)로 전락했다. 반면 21세기 미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는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리서치트라이앵글파크(RTP)의 발전은 오히려 빈약한 천연자원과 입지 덕분이다. 가진 것이 별로 없다 보니 새로운 기업과 인재를 유치, 끊임없는 혁신으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하버드대학 글레이저 교수는 "천연자원에 지나치게 기댄 성장은 지속가능한 경제성장을 가로막는다"고 했다.

천연자원이 없다고 모두 경제 성장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더 노력하고 혁신했던 자원 빈국의 성공사례는 많다. 서유럽과 홍콩·싱가포르·일본이 그런 예이지만 대표적인 나라는 한국이다. 1950년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됐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넘어, '세계 수출 순위 톱 10'으로 우뚝 선 것도 자원 빈국이라는 약점을 강점으로 승화시킨 결과이다. 유가가 폭등할 때마다 '제7광구'라는 노래가 떠오르지만, 한국은 이제 산유국을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 아버지 세대의 피와 땀은 석유보다 값지고 위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