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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질서와 모방의 미학"

"한글은 질서와 모방의 미학"

[뿌리깊은나무(하)] 한글 글자꼴 디자이너 이용제

2011년 12월 26일(월)

> 기획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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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세종대왕과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사이언스타임즈는 한글과 관련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KAIST 시정곤 교수, 한글 디자인을 해오고 있는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와 훈민정음 제정, 한글의 우수성 등에 대해 차례로 인터뷰를 가졌다. [편집자 註]

“사람들은 한글 예뻐요 라고 막연하게 이야기해요. 문자 자체로는 안 예쁜 문자가 없어요. 한자도, 알파벳도 예뻐요. 그런데 한글은 조금 다른 면이 있죠. 한글은 제자원리(글자를 만든 원리)가 있어서 다른 데에 적용할 여지가 많으니 아름답죠, 특별한 면이 있어요.”

▲ 이용제 교수의 꽃길체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

한글은 아름다운 글자일까. 막연한 애국심으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한글에 대한 미학적 측면을 알아보기 위해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를 만났다. 이용제 교수는 한글 글자꼴 디자이너로 안상수, 한재준 등 1세대 디자이너를 잇는 차세대 주역으로 손꼽힌다.

- 한글 글자꼴 디자인을 주로 하시는데요. 교수님을 타이포그라피스트라고 소개하면 될까요?

“타이포그라피스트라는 말은 외부인들이 쓰는데, 저희는 타이포그라퍼라고 부르곤 해요. 하지만 이 표현도 자주 쓰지는 않아요. 왜냐면 타이포그라퍼는 활자조판자를 의미하기도 하거든요. 제가 하는 디자인이 그래픽 디자인 범주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픽 디자이너로 통칭해요. 물론 타이포그래피 일을 하지만.

때론 한글디자이너라고 부르기도 하는데요. 한글 디자인이라는 말은 타이포그래피를 뜻할 수도 있고, 다른 디자인을 뜻하는 말일 수도 있거든요. 바깥에서 보시기에는 한글디자인=타이포그래피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론 다른 영역을 뜻할 수도 있어서 한글디자이너라는 말도 정확하지는 않아요.”

- 평소 한글이 아름다운 글자인지 궁금했어요. 교수님의 저서를 보니 아름다움을 하이에크의 ‘질서’ 이론과 ‘모방’의 측면에서 설명하셨더라고요.

“한글의 원리들 '가획의 원리', '소리에 따른 병서법(竝書法)',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규칙성' 등은 한글의 일부만 보더라도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패턴을 부여해요. 그것이 질서죠. 사람이 규정한 질서인 인위적 질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천지인 사상과 음양오행의 우주 원리가 반영된 건 우주의 질서인 자생적 질서라고 볼 수 있고요. 한글은 인위적 질서 체계와 자생적 질서가 합쳐진 구조예요.

한글의 아름다움을 모방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모방은 나쁜 의미가 아니고요. 인간의 모든 행위와 모든 사물은 신의 모방 또는 자연의 모방이잖아요. 한글은 인간의 발성기관을 모방하고, 하늘과 땅과 사람을 모방하여 기하학적인 새로운 문자로 만들어냈어요. 세종의 위대한 점은 그가 눈에 보이는 것을 모방한 게 아니라 우주론, 음양오행 개념 등 형이상학적인 것을 모방했다는 점이에요.”

- 한글 창제 훨씬 이전인 단군시대에 한글과 비슷한 형태인 가림토 문자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교수님은 이를 믿으시나요?

“그건 ‘한단고기’에 나오는 내용이에요. 그런데 ‘한단고기’는 정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잖아요. 제가 역사학자가 아니니까 진짜 한글이 가림토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죠. 단지, 우리가 그것을 실제 역사와 연관시켜 알아보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은 들어요. 설사 신화적인 내용일지라도 말이에요.”

- 디자이너로서 보기에 형태상으로 가림토와 한글이 연관성이 있어 보이시나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는 디자이너로서 그렇게 보인다기 보다는 제가 세종이란 사람을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그는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제가 알기로는 그 당시 문물교류가 아주 활발하게 이뤄졌어요. 지금은 그때 책들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어쩌면 세종 시대에서는 단군시대의 책을 접하고 공부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 이용제 교수의 작품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

- 저서 ‘한글+한글디자인+디자이너’를 읽어보니, 디자이너로서는 특이하게도 가독성에 대해 과학적으로 이야기하시더라고요.

“글자란 게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소통하는 도구로서 만들어진 거잖아요. 기본적인 역할을 잘하는지 확인해보고 싶거든요. 저는 글을 읽을 때 뇌의 어느 부분이 활성화 되고, 사람들에게 편하고 잘 읽히는 글자는 무엇일까가 정말 궁금해요. 그래서 이런 가독성, 인지율에 관심이 있고, 심리학이나 인지과학 쪽에 관심이 많아요. 이런 걸 기반으로 디자인 하고 싶어요.

그런 면에서 심리학자와 협업이 잘 이뤄진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부분적인 시도는 했지만 만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연세대학교 심리학 박사와 함께 연구를 해봤는데 처음에는 대화가 잘 안되었어요. 여러 번 만나보니 제가 간과했던 부분을 그분은 관심 있게 보거나 실험에서 중요하게 여기더라고요. 이야기를 하면서 ‘기초연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서로가 깨달았어요. 

서로 다른 글자꼴의 가독성을 조사하는 이들 뿐만 아니라 윤명조체 가독성만 10년을 연구하는 이, 바탕체 가독성만 10년을 연구하는 이도 있어야 해요. 서로 다른 글자꼴 사이에서 실험 변수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게 불가능하거든요. 누군가에게 익숙한 서체이냐에 따라 속도가 달라져요. 어떤 집단을 어릴 때부터 감금을 시켜놓고 이쪽 집단은 네모꼴 글자만 보게 하고, 저쪽 집단은 탈네모꼴 글자만 보게 하고 그럴 수는 없잖아요.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삼고 있는데다가 글자꼴마다 길이, 비례, 단어 모임 효과, 윤곽의 굵기 등에 따라 가독성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요. 하지만 변수가 크더라도 타이포그래피에서 가독성은 아주 중요하고 이 실험은 계속 해야해요. 그래서 다양한 실험을 다양하게 해야죠. 제 꿈이 나중에 연구소를 차려 심리학자와 공동 연구를 꾸준히 하는 거예요.”

- 말씀 들어보니 뇌파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심리학자보다는 뇌과학자와 협업을 해야하지 않을까요?

▲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의 작품(일부분)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
“요즘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뇌 연구를 해요.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속도 실험을 하지 않고요. 뇌파나 뇌측정에 관심이 많아요. 정확하게 무언가를 얻어내는 게 기존 방법으로는 힘들다는 걸 안 거죠.”

- 좋아하는 한글 글자꼴(서체)는 무엇인가요?

"네모꼴 글씨체(목각 인쇄 시대의 정사각형 모양 글자, 예를 들면 한자와 우리 고전의 글씨체)중에서는 신명조를 좋아해요."

- 어떤 이유로 좋아하시나요, 가독성이 높나요?

“잘 만든 글씨체예요. 왜 좋아하는지 설명을 굳이 한다면 구조, 비례 잘 맞고 곡선이 매끄럽고, 작게 쓰든 크게 쓰든 뭉치거나 흔들림이 없어라고 말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직관적으로 좋아하는 거죠. 탈네모꼴 중에서는 공한체가 잘 만들어졌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마노체도 좋아해요.”

- 교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한글의 가장 창의적인 면은 무엇인가요?

“'이체자'라고 생각해요. 리을(ㄹ), 반치음(ㅿ), 꼭지이응(ㆁ)등 기존 체계와는 다른 글자 말이에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한글은 체계적인 질서로 이뤄져있어요. 다른 글자들은 변화의 원리가 ‘가획의 원리(可劃原理)’로 설명 되잖아요. 그런데 이들은 체계가 다르거든요. 처음에 저는 이들 때문에 한글에 대해 설명하기에 굉장히 불편했어요. 사람들이 한글은 과학적입니다 체계적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늘 이체자가 문제였던 거죠.

그런데 나중에 미학을 공부하다 보니 이들 글자가 있어서 ‘완벽한 질서라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우주도 그렇고, 세상의 어떤 법칙도 규칙적인 게 아니잖아요. 예외사항이나 아직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어요. 예전에는 이들이 있어서 불편했지만 지금은 이체자가 있어서 제 상상력을 넓혀준 것 같아요. 기존 한글 체계만으로도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체자가 그것을 뛰어넘게 해주죠.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이들 글자에 대해 매력을 느끼는 것 같아요. ㄱ과 ㄷ을 붙여놓은 듯한 ㄹ모양, ㅅ과 ㅡ를 붙여놓은 듯한 반치음(ㅿ), ㅇ에다가 줄기를 달아놓은 꼭지이응(ㆁ). 이들은 소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가획만이 아니라 다른 형태를 가져다가 붙일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줘요. 우리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힌트가 이체자가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돼요. 다른 글자는 한국어만을 표기한 거예요. 그런데 이체자는 다른 세계(외국)의 언어를 표현하려고 보니 필요했던 글자예요. 폐쇄적인 세상에 구멍하나를 뚫어 ‘다른 세상도 있어’ 하고 보여주는 거죠.”

반치음과 꼭지이응은 왜 사라졌을까요,  현대에 이르러 사라졌나요?

 

“아니요, 훨씬 이전에 사라졌어요. 우리 조상들이 거의 사용하지 않은 거죠. 발음이 없어졌으니 사라졌겠죠.”

▲ 계원디자인예술대학 이용제 교수  ⓒScienceTimes

- 마지막으로 이번 기획의 또 다른 인터뷰이인 카이스트 시정곤 교수님께서 물어보신 질문인데요. 디지털 시대에 한글 타이포그래피의 적응여부와 미래상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요즘 세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 익숙해서 다양한 서체를 요구할 텐데 이들의 요구를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도 궁금하고요. 

“활자는 디지털화되어 있지만 한글 타이포는 갈 길이 너무나 멀어요. 기계공학자, 전자공학자, 프로그래머들과 만나 풀어야할 문제가 산적해있어요. 우선은 표현이 정확하게 안되는 게 많아요. 여러 가지 한글 폰트가 있지만 표준화가 안 되어 있어요. 같은 서체가 매체마다 위치, 모양이 조금씩 달라요.

또 앞으로는 3D 폰트도 생각해봐야합니다. 가상 공간에 떠오르는 글자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거고요. 전자책이 다양하게 쓰이니까 e-ink의 글자는 기존 종이 인쇄체의 글자와 달라져야 하는가도 생각해봐야죠. 킨들(세계 최대 인터넷서점 아마존에서 만든 전자책용 기기)를 써보았더니 이 상태로 발전하면 전자책용 글자가 따로 필요 없을 거란 생각이 들긴 했어요. 하지만 앞으로 변화의 여지는 있는지 그런 검토도 해봐야하고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늘 판독성, 가독성을 비롯한 여러가지 고민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할 거예요. 이외에도 지금은 황당한 이야기겠지만, 저는 스스로 움직이는 글자를 상상하기도 해요. 글자가 스스로 변하는 상상.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더 다양한 것을 원하겠죠. 대신 기본을 지킬 사람은 있어야겠죠. 사람들이 다양한 서체를 원한다고 그걸 다 좇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돈이 되니까 그런 걸 따르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세상의 유행과 상관 없이 기본에 충실하며 글자를 만들 거예요. 일단 읽을 때 편안해야겠죠. 제 생각에 그것이 기본이에요.”

김수현 객원기자 | writingeye@daum.net

저작권자 2011.12.26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