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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융합과 혁신의 선구자"

"세종대왕은 융합과 혁신의 선구자"

[뿌리깊은나무(상)] 카이스트 시정곤 교수 인터뷰

2011년 12월 22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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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세종대왕과 한글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사이언스타임즈는 한글과 관련 다수의 저서를 집필한 시정곤 교수, 한글 디자인을 해오고 있는 이용제 교수와 훈민정음 제정에 대해 차례로 인터뷰를 가졌다. [편집자 註]

“(강채윤)도대체 전하의 글자는 몇이나 됩니까? 오천 자요? 아님 삼천 자, 천 자입니까?”
“(광평대군)스물여덟 자.”
“(강채윤)천스물여덟 자요?”
“(광평대군)아니, 그냥 스물 여덟 자.”
“(강채윤)그게 말이 됩니까? 이 헛간 안에 물건 만도 스물여덟 개가 넘습니다. 헌데 글자는 세상을 다 담아야 되는 거 아닙니까? 고작 스물여덟 자로 만 가지, 이만 가지를 다 담을 수 있다 이 말입니까?”
“(광평대군)만 가지 이 만 가지가 아니다. 십만 가지, 백만 가지도 담을 수 있다.”

-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15화 중에서

한글 이야기보따리라 칭할 수 있는 시정곤 교수를 만나기 위해 20일(화) 대전 카이스트(KAIST)를 찾았다. 카이스트 인문사회과학과 시정곤 교수는 대중들이 우리말을 제대로 알도록 동료 교수들과 뜻을 모아 ‘우리말의 수수께끼’, ‘한국어가 사라진다면’, ‘역사가 새겨진 우리말 이야기’, ‘한글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조선언문실록’ 등의 한글 대중서를 발간해왔다.

▲ 자질문자로서 한글에 대해 설명 중인 KAIST 시정곤 교수  ⓒScienceTimes

- 한글이 정말 우수한 글자가 맞는지, 우리 민족만이 가지는 자부심에 불과한 건지 궁금합니다.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이 얼마나 우수한 글자냐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서양의 비저블 스피치(Visible speech)와 비교하곤 해요. 비저블 스피치는 벨이 1867년에 만든 글자로 발음기관을 본떠 만들었죠. 기본자를 중심으로 이를 조금씩 변형시켰다는 점에서 한글 ‘가획의 원리(加畫原理, 가령 기본글자 ㄱ에 획을 더해 ㄲ, ㅋ으로 변형시키는 것)’와 유사한 점이 많아요.
 
서양에서는 발음기관을 본 떠 만든 최초의 문자는 비저블 스피치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글이 소개되면서 이것이 비저블 스피치와 원리는 같은데 420년이나 먼저 나온 문자라는 걸 알게 된 거죠. 하지만 벨의 문자는 상용화가 10년 조금 넘게 이루어지다가 사라졌어요."

- 왜 더 이상 쓰지 않았을까요?

"불편하니까 쓰지 않았겠죠. 한글과 같은 원리인데 한글은 왜 몇 백년 넘게 번성하고 있고, 벨의 문자는 왜 겨우 몇 십년만 사용되었을까. 제 생각에는 벨의 글자가 100자가 넘기 때문이에요. 한글은 겨우 스물여덟 자, 현재는 스물네 자잖아요. 벨의 글자는 좋게 표현하면 아주 치밀하게 만든 글자예요. 하지만 일상에서 상용하려면 힘든 거죠. 둘 중에 어느 문자가 더 우수한 문자냐 그런 질문도 받았어요. 제가 다른 문자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벨의 글자는 사라졌고, 한글은 현재 전 세계에서 1억 명 가까운 이들이 쓰고 있는 문자예요. 그런 면에서 글자의 수도 굉장히 중요해요."

- 알파벳도 한글과 비슷한 개수인 스물여섯 자인데 그러고 보면 인간이 소화할 수 있는 글자의 개수가 그 정도네요.

"그 숫자가 우연의 일치가 아니죠. 인간들이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대략 그 정도인 거예요. 만약 한글이나 알파벳이 50개 또는 100개로 이루어졌다면 운명이 달라졌을 거예요. 하지만 알파벳과 한글은 같은 수준의 문자가 아니에요. 영어도 훌륭한 문자라고 하지만 영어사전에 보면 발음기호가 있어요. 그 말은 그 글자대로 읽으면 안된다는 뜻이거든요. 글자와 소리가 일대일로 대응이 안 되잖아요. 국어사전은 발음기호가 필요 없어요. 표기 자체가 발음기호니까. 다양한 소리가 아니라 하나의 소리만 나죠.

대중들은 영어와 한글을 똑같이 소리를 표현한 음소문자 정도로 생각하지만, 학자들은 한글에 대해 이렇게 말하죠. 차원이 다른 문자, 자질문자(Feature System)라고.

우리 학자들이 이것을 먼저 생각해냈으면 좋았을 텐데 우리는 당연하다고 여겼던 걸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이 ‘문자체계’라는 책에서 자질문자라고 말했어요.

한글은 음성적으로 같은 계열에 속하는 글자들이 그 모양에서도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기본자에 획을 더함으로써 새로운 문자를 파생시키잖아요. 속에 들어있는 속성(자질)까지도 비슷하니 ‘자질문자’라고 불러야한다는 거죠. 영어는 ‘t’와 ‘d’, ‘k’와 ‘g’가 소리가 비슷하지만 모양에서는 하나도 공통점이 없잖아요. 한글은 모양도 비슷한데, 소리도 비슷한 거예요. 현재 쓰이는 문자 중에는 한글만 그래요. 사실 비저블 스피치도 자질문자였지만 글자가 많았죠. 우리는 단순하면서도 배우기 쉽고, 자질까지 반영한 문자죠.

이런 한글의 성질을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 외국 학자 눈에는 놀라웠던 거죠. 우리는 그런 성질 덕분에 휴대폰도 천지인으로 쓰고, 문자생활이 편리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이론적으로는 이야기를 못했죠."

-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후에 최만리가 반대상소를 올렸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만리를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는데 당시 그는 그럴 수 있어요. 당시 신하 중에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이 최만리였거든요. 집현전은 왕립연구소인 셈이고, 거기 최고 우두머리가 최만리예요. 대제학 정승은 겸임을 했기 때문에 상징적인 위치였고, 실제 집현전 우두머리는 부제학 최만리였어요. 최만리 입장에서는 이제 조선왕조가 막 들어섰으니, 중국의 눈치를 봐야하고, 중국의 성리학 이념을 펼쳐야하는데 왕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니까 엉뚱한 짓으로 보였겠지요. 

중국은 초창기 조선에 대해 견제를 많이 해요. 조선을 바라보는 관점이 별로 안 좋았어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지 않았다면 요동 땅을 정벌했을 거잖아요. 그래서 중국 입장에서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곱지 않았죠. 정도전은 이성계의 핵심 브레인 역할이었잖아요. 중국입장에서는 정도전도 굉장히 위험인물로 봐요. 정도전을 꺾으려고 하죠. 정도전이 중국에 보낸 표문에 트집을 잡아요. 당대 최고 문필가인 정도전이 쓴 표문 어휘가 불경하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이거 쓴 사람을 당장 소환하라고 요구하죠. 조선에서는 정도전을 안 보내려고 몸이 아파서 못 보낸다고 핑계를 대다가 결국 다른 사람을 보내요.

그런 위험한 때를 지나 이제 겨우 틀이 다져졌는데 아주 이상한 글자를 만들어서 중국이 오해하게 만들 일을 왜 지금 해야 하느냐하는 거죠. 그동안 썼던 이두나 향찰은 한자와 관련이 있는 문자잖아요. 한글과는 다르죠.

그러고 보면 세종은 이상주의자예요. 최만리의 상소는 그 당시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만들어서 밀어붙였다는 게 세종의 대단한 점이죠."

▲ 우리말의 일화를 소개해주는 KAIST 시정곤 교수  ⓒScienceTimes

- 그럼 세종이 한글을 만들어서 나라 정세를 위험하게 했나요?

"세종이 한글을 만들면서 ‘내일부터 한자 쓰지 말고 모조리 한글만 써’ 이러지는 않았어요. 그는 이상주의자였지만 비현실적인 사람은 아니었죠. 실제로 한글이 우리나라 국문이 된 건 1894년 갑오경장 때였죠."

- 그런 반대 세력이 있는데도 궁극적으로 세종대왕은 왜 한글을 창제했을까요?

"왜 만들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글을 만들고 난 후에 했던 일을 보면 대략 짐작할 수 있겠죠. 일단 훈민정음에 쓴 것처럼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서 만들었겠죠.

이 외에 정치적으로 해석하자면 한글 창제하기 전에 경상도 진주에서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요. 유교사상을 국가의 이념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서 이런 패륜 범죄가 일어났으니 당시 충격이 컸겠죠. 그래서 세종은 백성들에게 충과 효에 대한 사상이 제대로 뿌리 깊게 자리잡아야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교의 기본적인 개념인 충과 효에 대해 배우면 해괴망측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 않을까.
 
이 사건 후에 세종은 삼강행실도를 간행해요. 행실도라는 명칭처럼 그림책이었죠. 왜 그림책을 만들었느냐하면 백성들이 아직 문자를 모르니까 그림으로 유교사상을 표현한 거예요. 삼강행실도를 만들고 난 후에 훈민정음이 나와요. 그 다음에 세종은 기존 삼강행실도에 한글로 말풍선 같은 걸 넣은 삼강행실도언해를 만들어요. 백성들이 충과 효에 대한 사상을 잘 받아들여야 사회가 안정도 되고 유교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 세종이 한글 창제 후 처음으로 간행한 동국정운 - 한자표준발음사전에 해당한다  ⓒScienceTimes
그리고 동국정운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동국은 우리나라, 정운은 바른 소리라는 뜻이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한자의 표준발음사전이에요. 수많은 한자가 있는데 그 발음은 우리나라 동네마다 다르고, 중국과도 다르고 하니 한글로 써서 소리를 통일시킨 거예요. 발음기호로 필요했던 거죠. 세종이 제일 먼저 한 일이 이거예요. 세종대왕 시절에 사역원이라고 지금으로 따지면 통역사를 교육하는 곳이 있었어요. 그곳 교재를 보면 외국어 밑에 한글로 써서 학습을 했어요. 그런 걸 통해보면 한글이 발음기호로서 충실한 역할을 했구나 하는 걸 알 수 있죠.
 
이 두 가지를 합치면 전 국민을 유교사상으로 똘똘 뭉치게 하고, 지금의 맞춤법 통일안처럼 한자발음통일안을 만들어서 정치 체계를 바로잡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기여하고자 한글을 만든 거라 볼 수 있어요."

- 그럼 한글 창제의 원래 목적은 유교적인 목적도 있었는데 창제 후 석보상절 같은 불교서적을 간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입니다만 그런 책들은 부인인 소헌왕후를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아요. 부인이 불교에 의지를 많이 했거든요."

- 세종대왕의 장인이 태종의 손에 죽었잖아요, 그런 영향이 있었을까요?

"네, 그렇죠. 세종대왕 아버지 태종 입장에서는 왕권을 튼튼히 하려면 외척세력을 견제하는 게 필요했어요. 세종의 장인도 정승으로 높은 직책이었는데 결국은 반역죄로 몰아서 죽이죠. 나중에 신하들이 반역자의 딸이 왕비인 건 문제가 있으니 폐비를 시키자고 주장을 해요. 세종이 아버지를 설득해서 그것만은 막았죠. 세종 입장에서는 부인에게 평생의 빚을 지고 사는 것이죠.

제 생각으로는 세종이 부인을 굉장히 사랑해서, 부인이 쉽게 알 수 있는 말로 불경을 간행한 것 같아요. 부인이 죽고 난 뒤에도 아들에게 엄마를 위해서 불경을 만들라고 지시하고, 죽어서도 부인과 합장을 하잖아요."

- 합장이 드문 경우인가요?

"그렇죠, 왕릉에서 합장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조선시대 최초의 일이었죠."

- 스물여덟 자를 창제했지만 점차 네 글자가 사라졌어요. 앞으로 한글에 또 다른 변화가 있을까요?

"글로벌 시대라 다른 나라 글자들이 들어오고, 이들 표기를 해야 하니까 사라진 네 글자를 복원하자는 움직임도 있어요. 하지만 글자수가 늘어났을 때 오는 불편함이 분명 있을 거예요. 국립국어원에서도 기존대로 쓰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요. 

디지털 시대라서 문자가 달라지기도 해요. 실제로, 독일어 같은 경우에는 베타(β) 글자가 있었거든요. 이것이 컴퓨터에서는 치기가 불편해서 β를 없애고 비슷한 발음인 ss로 바꿔버렸어요. 중국도 꼭 컴퓨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한자를 2,238자의 간체자로 줄였고요.

이런 면에서 보면 한글은 마치 디지털시대를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적응을 잘 하고 있어요. 마치 세종대왕이 이 시대를 예견한 것처럼. 간결성, 가획의 원리, 천지인 조합 방법, 활용력 등은 컴퓨터와 잘 맞아요. 영어에 기본 글자와 활용글자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한글은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 훨씬 더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거죠.

▲ 한글 원리를 이용한 시각장애인용 어플  ⓒKAIST 한글공학연구소
저는 얼마 전에 다른 교수님들과 KT와 협력하여 이곳 카이스트에 한글공학연구소를 만들었어요. 현재 한글 원리를 응용한 시각장애인을 위한 쉬운 한글문자판을 만들고 있어요. 어플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해봤는데 반응이 좋아요. 한글 원리가 쉬우니까 가능한 일이에요."

- 교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세종의 가장 창의적인 면은 무엇인가요?

"한글처럼 우수한 글자를 만들었다는 사실도 대단하지만, 가장 놀라운 건 세종이 시대상황을 무릅쓰고 한글을 추진했다는 사실이에요. 최만리처럼 가장 훌륭했던 학자가 한글 반대상소를 올렸던 그러한 시대에 세종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죠.

신기전, 측우기, 농사직설 등. 과학, 농업, 의학, 음악 등 모든 분야에서 우리의 독자적이고 새로운 스타일을 만들고 그것을 정착하려고 시도를 했죠. 그것이 굉장히 혁신적이죠.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는 다른 우리 스타일에 맞는 표준을 만들었어요. 당시 중국의 눈치도 봐야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추진했다는 게 대단한 거죠.

그는 동양의 레오나르도 다빈치죠. 하지만 다빈치는 정치는 못했잖아요, 그런데 세종은 모든 분야에서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으로 시도했죠. 옆 연구소에 신기전을 복원하시는 분이 계세요. 그 분과 이야기하다보니 그 분도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시도가 있었던 때가 바로 세종의 시대라고 하더라고요. 이 뿐만이 아니에요. 장영실, 새로운 과학자잖아요. 그 시대가 어느 시대인가요? 세종 시대예요. 모든 혁신이 세종으로 귀결돼요. 그 모든 게 세종이기 때문에 가능했구나 그걸 알게 돼요. 그는 모든 학문을 섭렵한 것 같아요. 융합의 가장 선구자는 세종이었죠."

김수현 객원기자 | writingeye@daum.net

저작권자 2011.12.2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