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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켓 생태계/도서

지식의 역사

지식의 역사
찰스 밴 도렌 지음|박중서 옮김|갈라파고스|923쪽|3만5000원

과학과 기술의 역사, 정치와 제도의 역사, 경제의 역사, 문화예술의 역사, 사상과 철학의 역사, 이 모든 것을 하나로 통합한 역사를 쓰는 것이 가능할까? 나아가 그것들을 지식의 진보라는 시각에서 일관되게 서술하는 일을 한 사람이 해낼 수 있을까?

20여년간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자로 일하며 글쓰기와 독서법 등에 관한 독특한 저술을 해온 미국의 저술가 도렌은 이 두 가지 모두가 가능한 일임을 이 책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동서고금(東西古今)의 거의 모든 핵심지식을 백과사전 방식이 아니라 역사적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런 성격상 그의 글쓰기는 현란할 수밖에 없다.

먼저 저자는 '4대 문명'을 중심으로 지식의 흔적을 더듬기 시작한다. 이집트는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굳이 고치려고 하지 말 것'을 원칙으로 삼은 덕분에 지식의 진보는 없었지만 기원전 30년 로마에 정복될 때까지 3000여년을 존속할 수 있었다. 인도의 뿌리깊은 카스트제도는 "강력한 사회질서 유지수단을 발견한 최초의 문화일 것이다." 관료제를 만들어낸 중국과 글쓰기를 발명한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인을 짚어낸 저자는 시대적으로는 훨씬 뒤의 문명이지만 성격은 비슷했던 아즈텍과 잉카를 들여다본다. 아즈텍은 글쓰기가 가능했고, 잉카는 글쓰기를 고안하지 못했다. 두 문명은 정치제도를 창안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치는 오로지 공포에 의존했다. 특히 아즈텍에서 공포는 "에스파냐의 침략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매주 1000명의 어린이와 젊은이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를 통해 만들어졌다.

여기서 장면은 바뀐다. 세계 곳곳에서 이뤄진 인신공양 혹은 희생제(祭)가 주제다. "초기의 그리스인과 로마인, 최초의 유대인, 중국인과 일본인, 인도인 그리고 다른 고대 민족들이 각자의 신들에게 인신공양을 했다."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희생제를 점검한 저자는 이어 성경에서 아들 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치려던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다시 장면이 바뀐다. 아브라함을 유대교의 창시자로 그려내면서 자연스레 이야기는 종교로 옮아간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불교에 대한 비교서술이다.

인류사라는 거대한 시야를 가진 저자는 인류 역사에서 지식폭발은 단 두 번 일어났다고 본다. 하나는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 시작된 지식폭발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지식폭발이다. 두 차례의 지식폭발은 양과 질에서 많은 차이가 있음에도 비슷한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첫째 통신 장비의 발견, 둘째 수학을 이용해 지식을 얻는 새로운 방법의 창안, 셋째 물질과 힘에 관한 혁명적인 이론들." 그래서 근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철학과 수학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거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에 의한 '역사'의 발견으로 나아간다. 로마에 대해서는 '로마인들이 알았던 것'과 '로마인들이 몰랐던 것'이라는 재치 섞인 이분법으로 풀어낸다. 로마인들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다. 또 하나는 로마 정치에 만연된 선동주의의 위험성을 로마인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속주(屬州)에서는 로마의 통치가 장점을 발휘했지만, 정작 수도에서는 통치라는 것이 극도로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일종의 게임이었다. 군중, 또는 군대는 특정인물을 권좌에 올릴 수도 있었고 죽일 수도 있었다." 이 고질적인 정치적 질병은 내부로부터 치유될 수 없었다. 결국 제국 주위의 야만인들이 제국을 쓸어버림으로써 그 질병은 사라졌다.

장면이 또 바뀐다. 로마 멸망의 시작을 저자는 기원전 220년에 완성된 중국의 만리장성에서 찾는다. 장벽은 한편으로는 약탈을 막는 효과적인 방법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장벽 바깥을 흉노족의 안전지대로 인정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들은 결집하고 통합했고 군사 기술을 눈부시게 발전시켰다. 서기 1세기가 되면 이들은 한(漢)나라를 공격하게 되고 한나라의 반격에 밀린 흉노는 새로운 땅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흉노는 훈족이란 이름을 얻게 되고, 이들은 결국 로마 멸망의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신앙에 짓눌려 진보가 지체됐던 인류는 이탈리아에서 회생의 실마리를 찾는다. 르네상스다. 여기서 '세계'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유럽인은 몽골제국의 자극을 받아 '발견의 항해'에 나서게 됐다. 세계무역도 이때 탄생했다. 주인공은 콜럼버스다. "명석함과 동시에 광기를 지니고 있었음이 분명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야말로 이 세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서도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

지리상의 발견과 함께 서양에서는 자연세계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이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코페르니쿠스, 튀코 브라헤, 케플러, 갈릴레오, 데카르트 등등 …. 과학적 방법의 발견은 마침내 뉴턴에 의해 완성된다. 이후 혁명의 시대를 거친 인류는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개의 길 앞에 놓이게 된다.

오랜 지적 여행 끝에 우리는 마침내 20세기에 들어왔다. 저자는 20세기를 '민주주의의 승리'로 요약한다. 뒤집어 말하면 '공산주의의 패배'다. 20세기의 눈부신 과학과 기술의 성과들을 선별적으로 그려낸 저자는 특히 미디어의 탄생을 20세기의 성과로 본다. 그래서 '미디어의 이해'의 저자 마셜 맥루언에 대해서는 별도의 장을 마련해 상세히 설명한 다음 "그의 통찰력과 예언의 정확성"을 극찬한다. 이 책을 쓰는 과정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고 고백한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다음 100년'이라는 장으로 책을 끝맺고 있다. 지식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전망해 볼 때 미래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가? 생각하는 기계의 탄생 가능성, 태양계 탐사, 세상의 모든 언어를 입력한 다음 컴퓨터를 동원해 새로운 지식을 걸러내는 이데오노미라는 신생 학문의 출현, 컴퓨터의 반란 등이 그것들이다. 숨 가쁘긴 해도 오랜만에 책을 통해 풍성한 지식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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