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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소셜 마케팅

소셜 미디어의 대화 법칙

소셜 미디어의 대화 법칙
by 비전 디자이너 | 2010. 07. 21

(1) 소셜웹

소셜 미디어는 유용한가?

스마트폰이 유행이다. 연말에는 스마트폰이 500만대란다. 아이폰 4G와 갤럭시S를 모르면 원더걸스와 소녀시대를 모르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시사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는 필수다. 박근혜 의원님까지 트위터를 하기 시작했다. 경영을 하든, 정치를 하든, 트위터나 소셜 미디어는 이제 선택과 취향이 아닌, 필요와 전략의 문제가 됐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 같은 유행과 필수의 흐름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전제는 소셜 미디어는 유용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유용할까? 아니 유용해야 할까? 애시당초, 그 유용하다는 말이 실제적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1973년. 이제는 추억으로 기억해야 할 해에, 독일 아동 문학가 미카엘 엔데가 <모모>라는 책을 썼다. 한 마을의 외곽 고대 극장에 모모라는 출신 성분도 애매한 여자아이가 산다. 실상은 거지이지만, 이 아이를 위해 기꺼이 마을 사람들이 돕고 돌보는 것은 이 아이의 ‘듣는 능력’ 때문이다. 이 아이가 듣고 있으면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기꺼이 하게 되고, 그 ‘소통’을 위해서 사람들은 이 아이에게 헌신한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마을에 회색남들이 몰려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 속 정원에 있는 시간의 꽃을 노리고 있다. 좀 더 경제적이고 윤택한 삶을 말하며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그 말에 농락당한 마을 사람들은 예전의 정신적 풍요 대신에 물질적 편리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열심히 못 사는 삶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놓치고 잃었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만, 돌아갈 길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모모는 자기 친구들을 위해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이 시간 사냥꾼 회색남들을 대적하여 싸우기 시작한다. 이 모모를 호라 박사와 그의 거북이 카시오페아가 돕는다. 그들의 덕분으로 출중한 듣기에 탁월한 느림까지 갖춘 모모에게 근면하고 화려한 회색남들은 처절히 무너지고, 마을은 다시 예전의 평화와 행복을 찾는다.

왜 이 모모의 이야기를 할까? 그것은 모모와 우리가 경험해온 ‘미디어’ 소위 ‘매스 미디어’를 비교하기 위해서다.

우리의 매스 미디어는 모모와 얼마나 다른가? 모모는 듣고 있지만, 매스 미디어는 말한다. 매스 미디어는 우리가 말한 것을 듣고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언론학자 마샬 맥루한은 미디어는 그 자체로 대화의 법칙을 결정한다는 의미에서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했다. 그가 이 미디어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 자체가 내부에 콘텐츠를 가지고 있지만, 밤을 낮으로,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변화시켰다는 의미에서, 전구다. 그러나 그 전구는 일방적이다. 그 빛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햇빛처럼 생명을 자라게는 못한다.

그것은 분명 낮이지만, 그렇게 태어난 낮이, 문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더 나은 행복을 가져다 주었을까. 따라서 무언가를 얻었을 때는 반드시 다른 또 무언가를 잃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의미에서 매스 미디어가 우리에게 가져간 것은 모모였다. 우리에게 말하는 큰 목소리(Big Voice)를 얻게 된 대신에, 우리를 통제하는 거대 미디어(Big Brother)를 얻게 된 대신에,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법을, 소통의 법칙을 상실해 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통한다는 것, 말한다는 것은 언어학자 촘스키가 말한다는 것이 인간을 구성하는 가장 본질적 요소라고 말했던 것을 생각했을 때 우리의 ‘인간다움’의 중심적인 성격을 잃어버려왔던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뜬다는 것은, 트위터, 페이스북, 그리고 국내외에 출몰하는 포스퀘어, 아임 등 각종 온오프믹스의 사람들과 사람들을 서로 엮어주는 새로운 방식의 서비스의 등장은, 그 것은 단적으로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미치도록 외로웠는가, 소통을 그리워했는 가를 보여준다. 더 효율적인 삶, 경제적인 삶에 납득을 해오면서도, 그러면서도 놓치고 온 소통의 가치와 나눔의 행복이 소셜 미디어가 회복시킨 우리 삶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스마트폰의 점화로 촉진된 소셜 미디어의 진화가 굳이, 꼭 유용해야 하나? 경제적이어야 하나? 물론 그것은 돈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소셜 미디어의 장기 생존을 위해서 중요한 이슈다. 그러나 모모의 곁에서는 수 백 수 천 가지의 이야기를 지어냈으면서도 회색남들에게 영혼을 판 후에는 전에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고 조합하는 것으로 대신해야 했던 모모의 친구 지지처럼 진정한 장기 생존은 소셜 미디어의 진정성(authenticity)과 자발적 창조성(generativity)가 지켜져야 가능한 문제다.

소통의 가치를 상실한 소셜 미디어는 더 이상 ‘소셜’이란 말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것은 소셜의 가면을 쓴 커머셜 미디어일 뿐이다.

비록 닷컴의 버블에 휩쓸려 가긴 했지만, 1999년 인터넷에 공표됐다가 2000년에 출간된 <클루트레인 선언>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 선언서를 본딴 책은 시장(market)은 원래 시장’터’(marketplace)였다라는 것을 강조한다. 인터넷이 붐을 이루는 것은 원래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 만들어진 경제의 뿌리로, 그곳으로 인간이 돌아가려는 회귀 본능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구촌에 일고 있는 IT라는 플랫폼을 통한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 그리고 그 미디어를 통한 인간과 인간의 대화의 시작과 상호 작용의 극적 확대는 사람들이 그 동안 너무나 서로와 이야기하고 싶어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나눔정신(sharism)이 동서냉전이 끝난, 21세기, 소셜 웹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는 것이다.

1984년, 애플이 조지 오웰이 경고한 빅 브라더로서의 IBM을 격파하는 것을 상징한 <1984> 광고물을 화려하게 선보이며 맥킨토시를 시중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약 20여년 후. 우리는 한 때 MS의 독점 체제에 무너졌던 그 애플이 부활해 아날로그와 디지털, 온라인과 오프라인, 미디어와 IT를 하나로 융합하는 선두에 선 현장을 목격하고 있다. 디지털이 어느 곳에나 있는 사회, 스마트폰과 증강현실, 소셜 미디어가 삶의 일부가 되고 있는 시대, 그럼에도 그 ‘소셜’이 여전히 꿈이고, 이상이고, 열정에 불과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법칙이고, 원리이고, 추종해야 할 변화로 수용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소셜 미디어를 주목하고 있을 때는 그 놓쳤던, 잃었던 ‘소셜’함을 보고 있는 것인가.

소셜 미디어는 유용한가. 아니, 유용해야만 하나.

그 것을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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