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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전문가

방송 블랙리스트와 박재범 사태의 교훈

방송 블랙리스트와 박재범 사태의 교훈
<김헌식 칼럼>수용자에 대한 콘텐츠 자체로 평가해야
김헌식 문화평론가 (2010.07.14 10:04:23)
대개 주말에는 인터넷 콘텐츠에 대한 페이지 뷰 수가 현저히 떨어진다. 하지만 2009년 9월 5일, 토요일. 이날은 예외인 날이었다. 한국의 3대 일간지 가운데 하나인 신문의 인터넷 판 때문이었다. 이 매체에는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예전에 작성한 글을 문제 삼은 기사가 떴다.

이 기사가 포털에 연동되면서 주중의 모든 인터넷 기사에 대한 클릭수를 넘어설만큼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낼 줄은 아무도 몰랐다. 더욱 몰랐던 것은 그 기사에 대한 파장이 해를 넘기면서 한국사회의 뜨거운 감자가 된 사실이었다. 그것도 몇년전에 쓴 글이 말이다.

당시 아이돌 가수가 쓴 글은 4년 전의 글이었다. 글의 제목은 이런 문장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국 역겨워… 미국 가고 싶다.’ 그 기사의 제목에는 가수의 이름이 버젓이 같이 기재되어 클릭을 유도했다. 그것도 미국 교포출신에 한참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였다. 한국인에 대한 정체성이 강하거나 한국에 대한 애정이 있을수록 클릭의 유혹은 강력할 것이다. 물론 그 클릭의 유도를 부르는 내적 감정의 요인은 ‘분노’였다.

분노의 심리에 대한 분석은 학술적이었다. 분노를 이끌어내는 요인을 학술적인 단어로 규정하는 것이 저널리스트들의 호사가적 취미와 같은 일이라고 표현할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러한 규정을 했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 멤버가 아이돌 그룹에서 쫓겨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이에 대한 비판은 반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혐오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때로는 미국출신의 교포에 대한 휴머니즘 혹은 연민과 배려의 차원에서 그를 두둔하는 일도 빈번했다. 잊지말아야 할것은 그가 음악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가수라는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음악이나 활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서 평가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가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시간문제였는데, 그의 음악적 활동보다는 복귀 자체가 더 중요했다.

2010년 여름, 그 멤버는 굴지의 소속사로 옮겼다. 이전의 소속사가 음악에 한정되어 있었다면, 새로운 소속사는 음악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도 제작하는 대형업체였다. 그 주인공은 바로 2PM의 박재범이었다. 음악적 활동을 넘어 영화, 드라마에도 출연하는 그는 결과적으로 거물이 된 것이다. 그 거물이 된 것은 음악적 활동 때문이 아니라 노이즈 때문이었다.

'논란' 그 자체 속에서 콘텐츠의 내용에 관계없이 수익을 안게 되었다. 즉 대중들에게 음악적 결과물로 큰 인기를 얻은 것이 아니라 한국인들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희생당한 존재라는 프레임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결국 작품이나 활동의 내용과 질이 아니라 다른 평가 기준 때문에 많은 영향력 있는 대중적 지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대중적 각인을 통해서 '선호 경쟁' 이른바 몸값이 높아지는 현상은 빈번하게 팬들은 물론 대중문화콘텐츠의 수요자들에게 피해를 주고는 한다. 스포츠선수와 같이 실질적인 결과에 따른 인지도를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 자체를 보증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적인 기준을 가지고 노이즈를 일으켜내는 현상은 수요자의 만족과 문화콘텐츠의 진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하지 않다.

대중문화는 시장의 논리가 철저하게 작용한다. 대중이 원하는 콘텐츠가 아니면 외면당한다. 이러한 점은 방송도 마찬가지다. 방송을 접하는 시청자가 원하는 콘텐츠나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 외면당한다. 따라서 특정한 리스트를 작성해서 인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이러한 시장의 논리에 어긋나는 것이다. 방송에 출연하는 이들은 나름의 시장적 선호와 예측에 따라서 고정화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수요자의 외면을 받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방송을 유지할수 없게 된다.

방송 프로그램을 정치적 이념으로 평가하는 것은 이 때문에 위험하다. 특히 진보와 보수의 관점에서 방송출연자들을 구분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특정 출연자들을 이념적인 잣대로 배제하거나 적극 옹호하는 것은 수요 공급의 원칙에 벗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방송에서 보이는 행태들을 살피며 평가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청자들의 수용권이 박탈당하는 사태가 온다. 결국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수용자들이기 때문이다.

특정 방송사나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면 진보인사가 되는 일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혹은 그 방송사나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지 않으면 보수인사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진정한 진보적 인사나 보수인사들에게 무력감과 분노를 일으키게 한다. 만약 가치가 개입한다면 방송의 공영성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블랙리스트 논란은 그 자체가 공정한 원칙을 해치면서 수용자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적대적 공생관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양측이 적대적인 것 같지만 서로 공생하는 구도에 블랙리스트가 있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거나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노이즈를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자칫 시청자-수용자의 선호와 만족에 관계없이 특정한 방송 지위를 부여할 가능성이 높다. 특정인사를 배제하는 것은 그에게 도덕적 우월성을 가져다주고 그가 가진 콘텐츠와는 관계없이 영향력을 확증시키는 기제가 되기 때문에 위험하다. 배제된 사람은 자신의 입지와 지위를 도덕적으로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을 활용하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블랙리스트의 존재유무가 증폭되는 가운데 당사자가 마치 도덕적으로 우월한 위치가 되어 갖고 있는 콘텐츠에 관계없이 유명인사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에서는 특정 인사들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대변할 이들을 전진시키려고도 한다. 이때 명분으로 정치적 색채론을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수용자는 그러한 색채론에 관심이 없다. 방송이라는 마당은 거간꾼의 장터와 같다. 수요자(시청자)와 콘텐츠(작품, 인물)를 매개하는 곳이다. 만약 매개의 원칙에 다른 기준은 없다. 그들이 원하는 콘텐츠를 보여준다면 설령 진보이건 보수이건 따지지 않는다. 기계적인 안배와 배분도 사실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특히 방송은 대중미학의 대표적인 아이콘이기 때문에 즉응적 특성이 크다. 쓰면 뱉고 달면 삼킨다. 진보이건 보수이건 시청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방송제작진은 공정한 룰과 필드를 제공할 책무가 있다. 그것을 누군가가 외부적이든 내부적이든 아니면 당사자가 인위적으로 구성해낼 수는 없다. 그것은 수용자의 방송 주권자 원칙에 기반한 공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