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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인의 사명은 새로운 사업의 창조`

`기업인의 사명은 새로운 사업의 창조`

2010.02.01 10:38 입력 / 2010.02.01 13:14 수정

고 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 그에게 경제의 길을 묻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생전에 고 정주영(오른쪽) 현대그룹 회장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중앙포토]

“고(故) 이병철 회장은 걸출한 사업가였다. 치밀한 판단력과 혜안으로 대그룹을 일구었다. 삼성이 한국이란 울타리를 넘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놓았다.”
현대그룹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한 말이다. 두 사람은 최대 라이벌이었다. 재계 1등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퉜다. 하지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인가. 정 회장은 이 회장을 높게 평가했다. “성공을 위한 치열한 승부 근성을 갖고 자신의 단점을 되짚어 고쳐가며 성공의 길을 현실화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삼성의 성공 비결을 이 회장의 기업가 정신에서 찾은 것이다.

오늘날 삼성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한 토대는 모두 고 이 회장이 닦았다. 그 바탕 위에서 이건희라는 또 다른 걸출한 2세 기업가가 꽃을 활짝 피운 것이다. 평생을 개척과 도전 정신으로 살았다. ‘돈 병철’이란 수군거림에, ‘재벌 망국론’의 대표적인 재벌이라는 비난도 들었다. 위암도 걸리고 뇌종양 수술도 받았지만 그는 1987년 타계할 때까지 기업인으로만 살았다.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무리수를 두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고, 이익이 날 만한 사업은 과감히 도전했다.

그리고 손 대면 무조건 일등을 하려고도 했다. 기업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치욕도 감수하겠다는 기업가 정신, 사업으로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사업보국’ 신념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였다. 다음 달 12일로 그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된다.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건 이 때문이다. 그가 살아있다면 지금 우리 경제와 기업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그가 살아있다면 투자 부진, 신수종 사업 부재, 일자리 부족 등의 고민으로 우리 경제가 시달리고 있지 않을 것도 같다. 하늘 나라에 있는 이 회장과의 가상 인터뷰 형식을 빌려 그의 기업가 정신을 살펴봤다. 답변은 '호암자전''호암어록''호암의 경영철학' 삼성그룹사에서 발췌했다.

-이건희 회장은 최근 삼성전자가 일본의 큰 전자회사 10개사보다 이익을 더 많이 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소니와 파나소닉 등에 대해 신경은 쓰지만 겁은 안 난다고 했습니다. 69년 전자산업에 진출할 당시 일본에서 기술과 자본 지원을 많이 받았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일 듯합니다. 당시 일본에서 수모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는 일본 산요전기로부터 도움을 받아 전자산업에 진출했어. 그쪽에서 자본도 40% 대고, 기술도 줬어. 하지만 70년 말 공장이 완공되자 산요가 달라지더군. 기술 정보 제공에 비협조적이었고, 부품과 원자재 가격도 상당히 높았어. 이 때문에 상당한 긴장 관계가 형성되기도 했어(삼성전자 20년사 152쪽). 64년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설립할 때도 그랬지. 플랜트를 들여오려는데 일본 비료 업계가 결사 반대하는 거야.

중앙포토
우여곡절 끝에 미쓰이물산을 창구로 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이 회사의 중간간부가 고압적으로 나오는 거야. 당신들 실력으로 가능하겠는가 하고 말이야. 그래서 화를 냈지. 나중에 이 사람이 여섯 번이나 찾아와 사과했던 기억이 나(자전 149쪽). 83년 반도체산업에 진출할 때도 마찬가지였어. 일본 반도체 업계가 도저히 기술을 줄 수 없다는 거야. 샤프에서 기술을 도입하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이 때문에 샤프는 나라의 역적이라는 비난까지 들었어(자전 238쪽).”


“창업 순간 쇠망 위기에 직면하는 게 기업의 운명”
고 이병철 회장 탄생 100년, 그에게 경제의 길을 묻다


기술적 스승이던 산요전기는 지난해 파나소닉전기에 흡수합병되면서 망했다. 반면 삼성전자는 세계 1위의 가전업체로 부상했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삼성의 전자산업 진출에는 국내 기존업체들도 반대했다. 과당경쟁이 일어나 전자업계 전체가 공멸한다는 논리였다. 특히 59년 국내 처음으로 라디오를 생산한 금성사(지금의 LG전자)의 반발이 심했다. 공교롭게도 금성사는 이 회장의 사돈 기업이었다. 창업자인 고 구인회 회장의 아들이 이 회장의 사위였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반대하던 정부도 설득했다. 결국 내수 판매는 못하고 전량 수출하는, 불리한 조건으로 겨우 진출할 수 있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전자산업에 진출하려 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단계에 꼭 알맞은 사업이라고 생각했거든. 전자제품의 대중화를 촉진하고 수출전략 상품으로 육성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맡아보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야(자전 205쪽). 당시 국내 기업은 상당히 낙후돼 있었어. 50년대 전자공업에 진출한 일본은 미국·유럽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컸는데, 국내 기업들은 외국 부품을 들여다가 조립하는 단계에 불과했어. 가격도 엄청나게 비쌌고(자전 206쪽, 삼성 50년사 191쪽). 또 가전으로 시작해 기반을 다지면 반도체와 컴퓨터 등 산업용 분야로 발전시킬 요량도 있었어(자전 205쪽).”

이 계획은 후일 실행됐다. 가전이 자리를 잡은 70년대 후반부터 통신기기와 반도체에 잇따라 진출했다. 삼성전자의 오늘을 있게 한 결정이었다. 그때 이 회장이 도전하지 않았더라면 반도체·TV·LCD 세계 1위, 휴대전화 세계 2위인 오늘의 삼성전자는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국내 전자산업이 세계 최강이 된 것도, LG전자가 삼성전자에 버금가는 전자업체가 된 것도 삼성의 도전이 낳은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업가 정신이 나라를 얼마나 발전시키는지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였다. 이 회장도 “삼성의 참여가 한국 전자산업에 어떤 자극과 활력을 주게 되었는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때 예견한 대로 우리나라 전자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지 않았는가(자전 207쪽)”라고 말했다.

요즘 화두인 기업가 정신으로 화제를 돌렸다. 기업 투자는 부진하고 일자리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어서다. 잠재성장률도 급속히 추락하고 있다. 기업가 정신이 과거만큼 충만하지 않은 때문이다. 중소기업은 중견기업으로 크려고 하지 않고 대기업이 되는 중견기업도 거의 없다. 기업을 키우고 싶다는 의욕보다 적당히 기업을 키운 후 편안하게 지내려는 기업인들이 많아진 듯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기업가 정신을 북돋울 수 있을까.

-일각에서는 정부 규제를 과감하게 풀어야 한다, 망하면 재기가 불가능한 사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고 합니다. 이 회장께서 사업하시던 당시에는 경영 환경이 더 열악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업가 정신이 충만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 사업 내용이나 경영관리 방식에 대해 조언을 구할 수가 없었어. 혼자서 궁리하고 검토하고 해결책을 찾는 길뿐이었지(자전 4쪽). 사업을 한 후에도 온갖 비난을 받았어. 심지어 심혈이 맺힌 기업을 뺏기기도 했어. 재산도 몰수당했고 기업이 송두리째 흔들릴 뻔했던 적도 많았지. 하지만 나는 그때마다 용기를 냈어. 분노와 비애를 삼켰지(자전 3쪽, 24쪽). 내가 사업을 한 목적이 일신의 영달이나 축재가 아니었기 때문이지.

53년 제일제당을 설립한 지 불과 2년 만에 거부가 됐어. 나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어. 하지만 나는 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는 게 내 사명이라고 생각했지(자전 71쪽). 황무지에 공장이 들어서고 수많은 종업원이 일에 몰두하고, 생산된 제품들이 트럭과 화차에 잔뜩 실려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게 정말 좋았어. 기업가가 아닌 사람은 그 기쁨을 몰라. 그게 창조의 기쁨이고 국가 경제발전의 원동력이지(자전 71쪽). 기업가 정신은 도전과 노력 정신이야. 누가 뭐래도, 아무리 환경이 나빠도 계속해서 선구적으로 신기축을 열어가는 것이지(자전 233쪽).”

기업을 키우는 기쁨,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사명감이 기업가 정신의 요체라는 얘기다. 요즘 기업인들이 경영환경 운운하는 건 변명에 불과하다고 꾸짖는 듯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또 하나의 창조는 이 회장이 73세 때인 83년 시작됐다. 반도체 사업 진출이다. 마지막이자, 가장 화려한 꽃을 피웠던 도전이었다. 한국 최대 그룹이었던 삼성에도 엄청난 모험이었다.

반도체가 돈 먹는 하마여서다. 처음 시작했던 64KD램과 256KD램을 개발·생산하는 데 들어간 투자비만 6500억원이었다. 82년 삼성전자 매출액(4264억원)이나 총자산(3874억원)의 두 배 가까운 돈이 2~3년 새 투입된 것이다. 게다가 반도체는 제품 사이클이 기껏해야 2~3년이다. 선발주자인 미국·일본과의 경쟁에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었고 반도체 개발 인력도 없었다. 누가 봐도 무모한 결정이었다. 주변에서도 다들 말렸다. 평생 일구어 놓은 그룹이 통째로 날아간다고도 했고, 70세가 넘은 나이에 할 사업이 아니라는 조언도 있었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다른 누구보다 이 회장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원래 돌다리도 한참 두드린 후에야 건너가는 성격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반도체에 인생을 몽땅 다 건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벌이를 할 작정이었으면 딴 걸 했을 거야. 하지만 반도체는 국가적 사업이고 미래 산업의 총아라고 생각했어(어록 37쪽). 일렉트로닉스의 물결에서 뒤처지면 우리나라는 영원히 후진국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어(자전 243쪽). 또 당시 우리나라는 샌드위치 신세였지. 경공업 제품은 후진국의 맹추격을 받고 있었고, 중화학 제품은 선진국 제품과 경쟁이 안 됐어(자전 236쪽). 제2의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첨단기술 개발밖에 없다고 판단했어(자전 243쪽). 누군가는 반드시 해내야 할 프로젝트라면 내가 하겠다고 생각한 거야(자전 237쪽). 위험을 뛰어넘어 성공해야만 삼성의 내일이 열린다고 믿기도 했고(자전 233쪽). 준비는 많이 했어. 전문가들의 의견은 거의 다 들었고, 구할 수 있는 자료는 다 섭렵했지. 전혀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어. 그래도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어 매일 검토하게 했어(자전 241쪽).”

일단 결정하자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미국과 일본이 1년 이상 걸렸던 64KD램 생산라인을 6개월 만에 완공했다. 곧바로 착수된 256KD램 공장도 6개월 만에 준공했다. 86년에는 1MD램의 독자 개발에 성공했다. 3년 만에 기술 자립의 쾌거를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고생은 많이 했다. 초기에는 적자도 막심했다. 그룹에서 번 돈을 대부분 반도체에 부었다. 그래도 모자라 돈을 많이 빌렸다. 삼성반도체통신(88년 삼성전자에 합병)의 부채비율은 825%까지 치솟았다. 삼성그룹 전체가 망한다는 보고서도 올라왔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손에 쥐고도 1MD램 공장 건설을 강행했다. 당시 환율로 2800억원(87년 달러당 평균환율 822원)이 투자된 공사였다. 이 회장이 일방적으로 착공식 일자를 지정했을 정도로 반대가 심했던 공사였다. 하지만 이 라인 건설로 일본 기업들 못지않은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됐고 기술 격차도 대폭 줄일 수 있었다. 곧 바로 닥쳐온 반도체 호황기에 편승할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이다. 이때부터 반도체는 신화로 자리매김됐다. 누적된 적자를 한꺼번에 다 털었음은 물론이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일신했다.

-이건희 회장은 까딱 잘못하면 삼성전자도 구멍가게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또 애플의 아이폰으로 삼성전자가 고전하면서 삼성 특유의 혁신과 창조경영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초일류 기업으로 영속할 수 있겠습니까.
“기업은 영원할 수가 없어. 평균 수명이 길어야 40~50년이야. 사람처럼 창업할 때부터 쇠망의 위기에 직면할 운명을 갖는 것이지. 다만 기술 혁신과 산업구조 변화를 주도하는 기업은 더 살 수 있어. 내가 삼성을 50년 끌고 올 수 있었던 건 산업의 구조 전환 과정에 따라 끊임없이 변신했기 때문이야. 변화에의 도전을 게을리하면 기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지. 그러면 재건하기가 정말 어려워(자전 246~248쪽). 삼성은 더욱 큰 발전을 할 거야. 그러려면 왕성한 도전 정신과 끊임없는 노력 정신에 의해 모든 분야에서 계속 선구적으로 신기축을 열어가야 해(자전 233쪽). 장기적 안목에서 시대의 요구를 파악하고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제품을 개발해야지. 개인의 이익보다는 공익을 먼저 생각하고, 정직하게 사업하는 자세도 필요하고(자전 247쪽).”

김영욱 중앙일보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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