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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

[글로벌아이] ‘아이리스’와 천안함 [중앙일보]

2010.04.05 19:09 입력 / 2010.04.06 00:27 수정

이달 21일부터 일본의 민방 TBS는 한국에서 인기를 끈 드라마 ‘아이리스’를 방영한다. 수요일 밤 9시의 골든타임에 전파를 탄다. 벌써 도쿄의 지하철역이나 길거리 곳곳에는 아이리스 포스터가 눈에 띈다. 얼마 전 한국특파원 출신 일본 기자들과 ‘아이리스’ 이야기를 나누다 돌연 화제가 ‘천안함 침몰 사건’으로 옮겨졌다. A기자의 이야기는 이랬다.

“현재로선 북한에 의한 어뢰 공격 가능성이 큰 것 같다. 그런데 청와대는 웬일인지 그 가능성을 낮추려 한다. 뭔가 북한과 교감이 있는 것 아니냐. 북한의 공격이 맞다면 김정일 모르게 강경 군부세력이 저지른 소행일 가능성이 크고, 이는 남북이 추진 중인 남북정상회담을 무산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뭔가 북측으로부터 한국에 메시지가 전달됐을 수 있다. 아이리스 줄거리와 비슷하지 않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야기였다. 화가 났다. 우리 정부의 대응이 얼마나 허술했으면 바다 건너 일본 땅에서 이런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어야 하는지 말이다. 우선 우리 군과 정부는 ‘침몰 시간’ 같은 가장 기초적인 정보 하나 정확히 제대로 제시하지 못했다. 그러니 어느 국민이 정부와 군을 믿겠는가. 그래놓고는 한·미 정보당국이 북한의 잠수함 기지를 어떻게 분석하고 있고, 북한 잠수정을 탐지하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어디인지도 드러나게 했다. 국방장관이 국회 발언을 통해 “하루에 두세 번 항공사진을 촬영한다” “3월 24일부터 27일 사이에 (잠수함 두 척이 사라졌다)”는 등 민감한 대목을 여과 없이 밝힌 것이다. 천안함 침몰을 둘러싼 의혹해소 차원에서 군이 ‘기밀주의’의 벽에 갇혀서는 안 된다는 게 대부분 국민의 생각이지, 북한 잠수함 운영에 대한 감시방법마저 구체적으로 밝히라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물론 일부 언론이 ‘초계함의 어디를 타격하면 가장 효율적’이라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도 문제다. 하지만 군이 군사기밀에 관한 균형감각을 상실하는 것이 더 큰 문제 아닐까.

이번 사태에선 나라의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이다. 청와대 따로, 국방부 따로, 국민 따로, 말 그대로 ‘한 지붕 세 가족’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였다. 1981년 가고시마현 연안에서 일본의 화물선이 미국의 핵 잠수함 ‘조지 워싱턴’과 충돌했을 때, 2001년 미 하와이 연안에서 일본의 수산고등학교 학생실습선 ‘에히메마루’가 미국의 핵 잠수함 ‘그린 빌’과 충돌했을 때를 되돌이켜 보자. 사고 당시 일본 총리가 골프장에서 허둥지둥하는 등 ‘사람’의 문제는 있었다. 하지만 사고 상황 파악→사고 원인 추정→정부의 대응조치 발표에 걸린 시간은 불과 반나절이었다. 사람이 아닌 시스템이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언론의 추측보도도 거의 없었다.

우리 기업 한두 개가 일본을 앞섰다고 우쭐할 때가 아니다. 나라의 힘은 종합력이다. 더군다나 평화상태가 아닌 휴전상태인 대한민국의 위기관리시스템이 이래서야 되겠나. ‘아이리스’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