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마켓 생태계/도서

‘기괴한’ 한국의 IT산업, 담 쌓거나 뒷걸음치거나

‘기괴한’ 한국의 IT산업, 담 쌓거나 뒷걸음치거나
액티브X·공인인증서·실명제…
정보기술 정책의 폐쇄성 고발
쉬운 용어로 독자 눈높이 맞춰

“세상 바꾸는 것은 혁신적 상품
개방·표준화로 경쟁력 높여야”
한겨레 구본권 기자기자블로그
한국IT산업의 멸망
김인성 지음/북하우스·1만5000원

눈을 돌려보면 스마트폰 천지다. 지하철엔 손안의 단말기를 들여다보는 승객이 대부분이고, 커피숍 손님이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이도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있다. 지난 23일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는 통계는 달라진 거리 풍경으로 드러난다. 각종 예측치보다 월등히 빠른 스마트폰 보급 속도에 모두가 놀라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정보기술(IT) 강국이 ‘모바일 후진국’이 됐다”며 자조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는데 우리 사회의 역동성 덕분에 어느덧 ‘모바일 강국’이 된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지난 17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의 질책에 “전세계에서 아이폰을 도입한 나라가 89개국인데 우리나라가 85번째라는 걸 창피하게 생각한다”고 인정한 것처럼, 국내 정보기술 산업의 현실은 세계 시장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우물 안 개구리’다.

배터리도 바꿀 수 있고, 디엠비(DMB)도 볼 수 있다는 옴니아2가 ‘아이폰 대항마’로 날개 돋친 듯 70만여대 팔려나갔지만, 고객 대다수가 ‘안티’가 되고 유례없는 소비자 보상 요구에 부닥쳐 있는 게 단적인 사례다. 제조사와 이동통신사의 적극적인 마케팅, 객관성과 전문성을 포기한 상당수 언론의 기사, 소비자의 무지가 어우러진 결과다.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고, 반성이 없는 부끄러운 현실을 향한 통렬한 고발장이 날아들었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를 졸업한 뒤 20여년간 리눅스와 오픈소스를 개발하고 포털업체의 시스템 설계와 구축, 컨설팅을 해온 김인성씨는 책 제목 그대로 ‘한국 정보기술산업의 멸망’을 고발한다.

그가 지적하는 것은 한국의 기괴한 정보기술 현실이다. 그동안 정보기술 종사자들과 ‘오픈웹’ 등 커뮤니티를 통해 제기되어온 이슈들을 대중적 무대로 끌고 나왔다. 다른 나라보다 앞서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구축해 인터넷을 통해 게임과 결제를 할 수 있고, 이를 위한 불가피한 환경이라고 당국과 업계가 강변해온 게 ‘거짓말’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다. 지은이의 주장이 도발적이면서도 통쾌한 이유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인터넷 익스플로러에서만 작동하는 액티브엑스(X)를 강요하는 금융결제 서비스, 아무 기능 없이 비용만 들이는 공인인증서와 바이러스처럼 사용자를 괴롭히는 보안프로그램 등이 한국의 전자상거래를 세계시장과 단절된 ‘인트라넷’으로 만든 현실이 책에 생생하게 표현돼 있다. 방통위는 이 책이 소개되기 이틀 전 마침내 2014년까지 국내 100개 주요 사이트에서

 “액티브엑스를 들어내겠다”는 뒤늦은 정책을 발표했다.

지은이는 국내 고유의 상황을 강요하는 정보기술 분야에서의 폐쇄적인 정책이 ‘촌스러움’을 넘어

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반시장적 정책이라고 지적한다. 1990년대 말 국내 벤처 열풍 속에

세계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창의적 서비스들이 국외 시장 진출에 모조리 실패하고, 수년 뒤 이와

유사한 국외 서비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이러브스쿨, 다이얼패드, 스카이러브, 싸이월드와

페이스북, 스카이프 등이 그 사례이다.





당시 한국은 전세계가 주목한 서비스와 기술의 무대였지만, 이내 사라졌다. 지은이는 언어의 문제도
있지만 창의력의 손상을 주된 이유로 지목했다. 특히 인터넷실명제나 게시글 삭제 또 공인인증서
같은 장치는 한국을 고립시켜, 국외 진출의 길을 막아버렸다. 국경이 의미가 없는 인터넷에서는
국가별 서버를 두고 별도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서비스를 구축해
제공하고 유튜브나 페이스북처럼 사용자가 언어만 선택해 쓰도록 해야 성공 확률이 높아진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인터넷 서비스를 쓸 수 있도록 실명제를 폐지하지 않으면, 국내 서비스가 국외에서
발붙일 수 없다. 페이스북은 전세계 사용자를 상대로 스스로 이름과 개인정보를 공개하게 만들어
인터넷에서 새로운 금맥을 캐고 있다.

지은이는 정보기술 분야 경쟁에선 한국적 특수성이 설 자리가 없다고 말한다. 글로벌 기준에 어긋

나는 각종 규제를 없애고 국제적 표준과 개방이라는 일관된 정책이 살길이라고 주장한다. 개방과

표준을 강조하는 지은이는 아이폰이 국내에서 일으킨 변화의 역설을 지목한다. 이동통신사의

로고마저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애플 식대로’ 고수하는 애플의 비타협적인 폐쇄성이 역설적

으로 국내의 정보기술 환경을 깨뜨리고 있다는 얘기다. 아이폰 덕분에 이통사와 단말기 제조사가

저질러왔던 소비자 이익 침해행위가 드러나고 하나둘 사라지게 된 게 현실이다.

이 책은 모바일과 인터넷 환경을 중심으로 포털의 닫힌 생태계, 콘텐츠 불법복제, 스마트티브이(TV),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정보기술의 다양한 분야를 쉬운 용어로 다뤄 무난하게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고발과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세세히 제시되어 있지 않아, 전문적 논의가 아닌

대중적 발제를 위한 책이다.

지은이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진보를 말하는 사람들의 외침이 아닌, 소비자의 관심을 끌어모을 수

있는 혁신적 상품이라고 말한다. 아이폰처럼 창의적인 시도와 혁신이 집중된 정보기술 제품이 대표

적이다. 이제 진보는 구호와 논리가 아닌 정보기술에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진보의 외침보다 ‘진보적’ IT상품”
소비자 권리 찾아주는
제품·서비스 개발해야

» 스티브 잡스

“진보의 희망은 정보기술(IT)에 있다”는 <한국 IT산업의 멸망> 지은이의 주장은 사뭇 도발적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근대 이성주의적 과학철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주장인 동시에, 실리콘밸리를 주요 지지기반으로 하고 있는 미국 민주당의 정강정책을 떠올리게도 한다.

국내에서는 정보기술의 도구적 효용성과 그 궁극적 가치 지향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지 않지만, 이 분야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생명공학과 더불어 가장 논란이 많은 기술 영역 중 하나다. 최근 국내에 번역된 니컬러스 카의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터넷과 정보기술이 인간의 두뇌와 사고 구조에 끼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사회관계망 서비스로 인한 새로운 인간관계의 등장과 프라이버시 침해, 소멸되지 않는 디지털 정보의 장점 뒤에 가려진 그늘, 독재정권의 반대자 감시수단이자 동시에 권위주의 저항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 등이 최근 정보기술을 둘러싼 주요 논의의 목록이다. 특히 유튜브나 트위터,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 서비스는 최근 북아프리카 민주화 운동을 확산시키고 이를 세계에 실시간으로

전달하는 도구로서 조명을 받으며, 정보기술의 역할에 대한 기대를 부르고 있다.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출신인 지은이가 기술의 목적과 도구로서의 가치를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스마트폰, 포털, 텔레비전, 인터넷서비스, 불법복제, 통신서비스 등 구체적 상품과

서비스를 통해 국내 소비자들이 얼마나 자신의 권리와 이익으로부터 소외됐으며, 국내 산업은

세계시장과 동떨어진 채 왜곡됐는가를 고발하는 내용은 기술과 진보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스마트폰과 포털 사용자 상당수에게는 진보세력의 어떠한 외침보다도 그들의 권리를 밝혀주고

찾아주는 제품과 서비스가 진보의 가치를 체험하는 공간이라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개방과

표준을 신봉하는 리눅스 개발자답지 않게 지은이는 “지금 우리에게 아이폰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여태껏 무엇도 바꾸지 못했던 한국 인터넷의 폐쇄성을 개선시키고 이동통신 업체들의

횡포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애플과 구글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지만, 왜곡된 국내 시장을 변화시키는 도구로서 쓰임이 있다고 본다.

현재의 애국적인 소비는 국내 기업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기업들이 각성할 수

있도록 무조건 가장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한다.

폐쇄와 독점으로 오염된 국내 시장은 개방과 표준을 제공하는 전 지구적 제품을 통해서 비로소

개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다. 전 지구적 차원의 개방과 표준을 받아들여 세계에서 통할 혁신을

내놓아야만 국내 정보기술 산업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엔지니어가 프로그램과 제품 개발 대신 도발적 주장을 담은 책을 펴낸 이유와 관련해 지은이는

“0과 1로 된 코드로는 가치관을 바꾸지는 못하지만, 글은 그게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본권 기자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저작권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