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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

[시시각각:이정재] 위안화 전쟁 ‘서울 컨센서스’로 풀자

[시시각각:이정재] 위안화 전쟁 ‘서울 컨센서스’로 풀자 [중앙일보]

2010.03.16 19:57 입력

미국의 주특기 중 하나가 남의 나라 통화 때리기다. 주로 미국에 수출 많이 하는 나라들이 대상이다. 좀 잘나간다 싶으면 환율로 압박했다. 뒤틀린 세계 무역질서를 바로잡는다는 거창한 명분이 따라붙기 일쑤였다.

원화도 많이 맞았다. 한창 대미 수출 흑자가 늘어나던 1980년대엔 노골적인 간섭도 잦았다고 한다. 옛 재무부에서 외환을 담당했던 전직 관료는 “어떤 땐 소수점 이하 끝전 하나까지 미국 재무부 담당자와 상의해야 했다”고 돌아봤다. 그는 “말이 상의지 자기들이 적어온 숫자를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식이었다”며 “한번은 좀 버티다가 하와이까지 불려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다른 나라들은 미국의 이런 ‘횡포’를 알면서도 쉬쉬했다. 괜히 나섰다가 미국 비위를 거스를 이유가 없었으니.

미국이 가장 재미를 본 건 엔화 때리기였다.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가 그것이다. 당시 일본 경제는 욱일승천이었다. 전 세계 주요국과의 교역에서 모조리 흑자를 냈다. 미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일본 재무장관을 뉴욕의 플라자 호텔로 불러들였다. 엔화 가치를 올리라고 압박했다. 영국·독일·프랑스와 함께였다. 당시 일본은 거부할 힘이 없었다. 플라자 합의 후 몇 개월 만에 엔화 가치는 달러당 250엔에서 149엔으로 절상됐다. 엔화 값 급등의 결과는 잘 알려진 대로다. 거대한 거품과 끝 모를 추락. 일본으로 돈이 몰렸다. 도쿄 증시는 3년 새 300%가 뛰었다. 88년 세계 10대 은행은 모두 일본이 독차지했다. 부동산 폭등도 시작됐다. 한 해 70%씩 뛰기도 했다. 도쿄 땅을 팔면 미국 전역을 사들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거품이 한번 붕괴하자 백약이 무효였다. 90년대 이후 20년을 일본은 잃어버린 채 살아야 했다. 반면 미국은 제조업의 역사를 새로 쓰며 클린턴 정부 시절, 새 팍스아메리카나 시대를 열었다.

2000년대 들어 미국의 주종목은 위안화 때리기로 바뀐다. 최고 전문가는 부시 행정부의 재무장관이었던 헨리 폴슨이다. 골드먼 삭스 출신 중국통답게 위안화 문제도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그가 중국에 갈 때마다 위안화 가치가 올라간다며 국제 금융가에 ‘폴슨 효과’란 말이 생길 정도였다. 무역적자가 늘면서 폴슨의 위안화 압박도 시간에 비례해 세졌다. 취임 초기였던 2006년 8월엔 점잖았다. “세계 경제 불균형 해소에 도움이 돼야 한다”고 에둘러 말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2007년이 되자 달라졌다. 연초부터 “(위안화 절상을 위한) 중국 관리들의 행동이 굼뜨다”며 압박했다. 10월엔 “위안화 절상 속도를 올려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렸다. 이듬해인 2008년 4월엔 ‘경고’ ‘위험’ 등의 단어가 등장했다. 반면 중국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공세가 심해지면 위안화 가치를 조금 올리고 잠시 잠잠해지면 나 몰라라 식이다. 답답한 건 미국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미국이 아니다. 올 들어 다시 고삐를 죄고 있다. 버락 오바마가 선봉에 섰다. 그는 지난주 “중국은 시장지향적 환율정책을 채택해야 한다”고 몰아쳤다. 올 들어 두 번째 공세다. 중국도 발끈했다. 원자바오 총리가 직접 나섰다. “위안화 환율은 다른 나라가 강요할 문제가 아니다”며 잘랐다.

미국은 ‘빨리 많이’를 요구한다. ‘일본처럼 하라’는 주문이다. 중국은 ‘천천히 적게’다. ‘일본처럼은 안 되겠다’는 각오다. 타협의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이럴 때 한국이 나서야 한다. 위안화가 어찌 될까 열심히 주판알이나 튕기고 있어선 곤란하다. 중국과 미국은 우리의 1, 2위 교역국이다. 남의 일이 아니다. 마침 올해 우리는 G20 회의를 서울에서 연다. 올해를 세계 금융의 새판을 서울에서 짜는 원년(元年)으로 삼자. 워싱턴과 베이징을 아우르는 ‘서울 컨센서스’를 만들어 내는 것, 그게 G20 의장국의 일이요, 국격을 만들어 가는 일이다. 지레 ‘우리 주제에 뭘,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지’라며 자포자기해선 곤란하다. 그런 소국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에게 대국의 미래는 없다. 미래의 대국은 땅덩어리 크기로 재는 게 아니다. 중앙SUNDAY 경제·산업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