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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지원/통일

96세 노모가 목숨 걸고 먼 길 나선 사연

96세 노모가 목숨 걸고 먼 길 나선 사연

96세 노모, 딸 만나러 목숨 건 금강산 방북길에 오르다

오마이뉴스 | 입력 2010.11.06 17:25 | 수정 2010.11.06 17:30 |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 기자]

"살아있대? 만날 수 있대?"

북쪽에서 우리 큰누님인 정혜누님이 우리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적십자를 통해 듣고 어머니가 처음 한 말씀이다. 북한에서 남쪽의 가족을 찾는 200명 명단에 정혜누님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가족이 너무나 오랜 기간 찾고 싶었던 정혜누님이 우리를 찾는다니… 생사조차 모르던 그 애절함…

6·25의 혼란기 때 6명의 자식을 모두 거느리기 어려워 그중 첫째아들과 위의 두 딸을 아버지의 고향인 황해도 연백으로 보내게 되었다.

'엄마, 아버지로부터 떨어지기 싫어 가지 않겠다며 발버둥치는 정혜, 덕혜에게 사탕까지 사주며 달래서 억지로 큰아들 영식이 편에 보낸 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우리를 찾아주니 너무 너무 고맙다는 우리어머니. 그렇게 북쪽의 신청자 200명 중 남쪽 가족이 확인된 수가 162가족이라는 보도가 있었고, 그중 100가족을 선정하는 절차를 거쳤다. 언론에서 선정기준이 고령자 우선, 부모 자식 간 우선의 원칙이 있다고 하니 우리가족이 선정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워낙 고령의(96세) 연세여서 바깥출입을 삼가 하신지 거의 5년이 되었기 때문에 북한의 금강산까지 가는 일이 어머니에게는 매우 무모할 수도 있는 무리한 일이었고 그래서 이번 여행은 몹시 걱정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어린 딸들을 고향으로 억지로 보낸 미안함, 우리를 찾아준 고마움을 어찌 져버릴 수 있냐며, '가다 죽더라도 간다'고 목숨을 건 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

96세 노모, 딸 만나러 목숨 건 금강산 방북길에 오르다


10월 29일 드디어 금강산으로 출발이다.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일산의 어머니를 모시고 출발하였다. 춘천, 인제, 미시령을 거쳐 약 200km를 가면서 어머니께서는 어지럽고 가슴이 답답하시다며 가끔 차에서 내리셔서 길거리에 가만히 앉아 계시다가 또 다시 출발하곤 했다. 차에 오래 앉아 가시는 것이 힘드시는가 보다. 부쩍 걱정이 된다.

오후 2시까지 도착하도록 되어있었으나 생각보다 늦게 되어 가는 도중에 여러 차례 기자들로부터 언제 오시느냐는 문의 전화가 오곤 했다. 오후 3시 30분경 설악산 하나콘도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몰려온다. 사진기자에 카메라 기자 등등…. 많은 기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보통 시끄러운게 아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우리어머니가 이번 상봉단의 최고령이시면서, 부모 자식 간에 상봉하는 유일한 경우란다. 그래서 자연 기자들의 관심이 되고 있었다. 이미 상봉을 위해 모여든 많은 이들에게도 어머니는 그 고령 때문에 단연 관심을 받고 계셨다.

'저 어른은 딸을 만나시려고 저리 오래 살으셨구나!!'

96세의 어머니. 60년 전에 헤어진 딸을 만나보기 위해 5년간 두문불출하던 집에서 나와 힘든 방북길도 마다하지 않고 오신 우리 어머니…. 오시면서 차에서 쓰러지시기도 했던 어머니가 저렇게 신나 하신다. 잃어버린 딸을 보기 위해 오래 오래 사신 우리어머니가 오늘 정말 큰 사람으로 느껴진다. 오늘 어머니가 정말 자랑스럽다.

10월 30일 오후 3시부터 상봉행사를 갖기로 되어 있어서 숙소인 외금강호텔에서 서둘러 내려왔다. 남북 간의 관계가 나빠져있는 관계로 남측CIQ(남북출입사무소) 와 북측CIQ(남북출입사무소)를 거치며 상봉단에는 전체적으로 잔뜩 긴장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침부터 일찍 서둘러 출발한터라 어머니는 몹시 힘들어 하셨다. 그래도 면회소로 가는 버스 안에서 어머니 얼굴엔 긴장보다는 짙은 기쁨의 표정이 배어 있었다. 면회소로 들어가 74번 테이블을 찾으니 이미 기자들이 카메라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서자 북측 상봉단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 60년 만에 만나는 누나!!'
나로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분이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두근거리기도 하고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부모와 떨어지고 졸지에 고아가 된 누님이 얼마나 애절한 세월을 보냈는지, 어린 동생 덕혜와 어린 자매 둘이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떻게 그 역경을 헤쳐 왔는지 그 흔적들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나도 이런 정도인데 어머니는 어쩔까? 어머니의 얼굴을 살펴본다. 아무 말씀도 없이 무표정으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그 심정의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북측 상봉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아! 저기 정혜다!"

큰형인 영식형은 낮은 목소리로 정혜누님을 금방 알아보고 있었다.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던 영식형이 바로 알아 본 것이다. 이게 혈육인가 보다. 정혜누님은 기자단 중 우리가족 전담마크맨인 내일신문 조승호 기자와 함께 오고 있었다.

정혜누나가 엄마 앞에, 그리고 우리 형제 앞으로 환한 얼굴로 다가 왔다. 60년 만에 모녀 간의 재회의 출발은 서로 끌어안으며 시작 되었다. 상봉장 여기저기서 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60년만의 재회가 사람들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고 있었다. 상봉장에는 이제 막 만난 가족들이 끌어안고, 볼을 부비고, 울며 60년간의 한을 쏟아내느라 어수선하기 그지없었다.

잠깐 어머니와 영식형을 번갈아 끌어안은 누님은 '우리 울지 맙시다'하며 자세를 고친다. 그리고 바로 누님은 그동안 받은 훈장과 각종 표창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붉은 천위에 한눈에 보아도 호화롭게 보이는 각종훈장 20여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훈장 천을 펼치면서 정혜누님은 '나는 이악스럽고 열심히 살아 이렇게 훌륭하게 살았다'며 자랑스러운 얼굴을 한다.

부모와 졸지에 헤어진 정혜, 덕혜누님이 어떻게 살아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많은 부분 해결되고 있었다.

소아리 중학교 5년 마치고 재령경재 전문학교 4년을 마치고, 해주공업대학에서 4년 6개월 공부하고 지금은 연안군 직매점 지배인으로 현재까지 25년간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전에는 은행을 다녔다고 설명하는 모습에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가득차 있는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차돌과 같이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는 누님…. 그리고 준비해온 가족사진을 꺼내 이미 명을 달리한 남편 사이에 얻은 2남2녀의 아이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나갔다. 또한 북에 계시는 또 다른 누님인 두 번째 덕혜누님은 황해도 재령에 있고 73세의 남편과 2남3녀의 아이들 두고 잘 살고 있다고 전한다.

참으로 다행이다. 두 누님 모두 북한에서 잘 살고 계시다니…. 정혜누님은 말을 이어가며 자나 깨나 한시도 아버지, 어머니, 영식오빠를 잊은 적이 없다고 눈물을 쏟는다. 처음 우리에게 "울지 맙시다" 하시던 정혜누님의 모습이 차츰 어머니를 애절하게 찾던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정혜누님의 손을 붙잡고 한손으로 누님의 손등을 두드려 가며 "너를 만나니 너무 너무 좋다" 하시고는 두 분이 다시 끌어안고 볼을 비비고 뽀뽀하기를 몇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정혜누님은 절을 드려야 한다며 번쩍 일어나 큰절을 올린다. 60년만의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는 정혜누님의 눈이 다시 충혈 되었다. 6·25 이후에 태어나 얼굴도 모르는 난혜누이, 천식형 그리고 나에게도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을 차근차근 물어가며 혈육을 확인해 갔다.

나도 처음 보는 누님이지만 서로 많이 닮아서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분명 다른 체제에서 살았고 생각이 많이 다름에도 우리 누나는 역시 누나다. 이내 누나로, 동생으로 정을 나누고 손잡고 있는 우리는 누가 뭐래도 형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누나의 손이 몹시 거칠다,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정혜누나의 손이 그래도 참 고맙다. 이렇게 거친 손이지만 건강하게 생존해 있고 자식들 낳아 훌륭하게 가정을 꾸렸으며 황해도에 남아 있던 늙으신 친척들의 뒷바라지를 다하며 가장으로서 역할을 다한 누님이 너무도 자랑스럽다. 정말 그 거친 손이 그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모두 지났다. 오후 5시경 사회자가 상봉을 중단해 줄 것을 알렸고 첫 번째 상봉은 그렇게 마무리 되고 있었다. 오후 6시부터는 저녁을 함께 먹는 상봉만찬이 진행 된단다. 북측 상봉단이 나가면서 정혜누님도 함께 우리의 곁을 떠났다.

긴장을 많이 했는가 보다 첫 번째 상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그렇게 힘이 없을 수 없다. 팔, 다리가 모두 쑤시고 몸살기까지 갑자기 온다. 나도 이런데 어머니는 오죽할까!! 이렇게 첫 상봉이 끝났다. 아! 저녁에는 식사도 함께 할 수 있단다.

주량, 귓불, 무좀발... 닮은 게 많은 우리 형제들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형제는 형제인가 보다. 단 한번 얼굴을 보지 못했어도, 다른 형제와 이념 속에 살았어도 혈육은 역시 혈육이었다. 차츰 차츰 만남을 거듭할수록 우리 형제 간의 공통점을 우리는 하나씩 하나씩 발견해가고 있었고 그런 발견은 큰 기쁨이었다.

함께 둘러앉은 어머니와 5형제는 우선 귓불이 모두 도톰한 형상이었다. 어머니는 이를 발견하고 "어쩜 너희들의 귀 모양이 그리 똑같냐"며 감탄을 연발한다. 우리 다섯 형제는 일제히 서로 귀를 바라보고 도톰한 귓불과 동그란 귀의 생김을 확 하면서 역시 우리는 형제인 것을 기분 좋게 확인했다.

두 번째로 정혜누님의 간단치 않은 주량이 우리 형제임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첫날 저녁 식사를 하며 정혜누님이 맥주, 소주를 여러 잔 하시길래 혹시 헤어지고 나서 무슨 실수라도 없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점심 때에 물어보니 '일없다'고 하신다. '일없다'는 말의 뜻은 '걱정 없다' '괜찮다' 는 뜻이다. 그러시면서 30도의 술을 포도주잔으로 10잔 정도를 마셔도 끄떡없다고 취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우리 3형제는 명절날 둘러앉으면, 큰 정종병 4병 정도는 거뜬히 해치우곤 하는데 우리들의 대단한 주량과 정혜누님의 대단한 주량이 꼭 닮아 있었다. 우리는 서로 이 대단한 주량을 자랑하며 둘째 날 점심공동식사에서 왁자지껄 시원하게 술 한 잔 했다. 실로 생애 최초의 정혜누님과의 통쾌한 술자리였다.

더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 형제의 얼굴 생김과 신체구조는 아버지형과 어머니형으로 나뉜다. 아버지를 닮은 형제는 관혜누님, 천식형이고, 어머니를 닮은 형제는 영식형,인식형, 난혜누나와 나다. 이번에 상봉을 통해 정혜누님은 어머니형, 덕혜누님은 아버지형이었다.

그런데 어머니측의 신체구조를 결정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다. 손과 발이 도톰한 게 예쁜 형인데 발가락이 모두 다닥다닥 붙어있어 발가락 사이에 습기가 많아 무좀에 무척 취약한 형세다. 그래서 나도 군복무 시절부터 악성무좀에 무척 고생을 해왔다. 그래서 어머니형의 신체구조가 갖는 무좀 발에 관한 이야기를 정혜누님께 들려드리고 정혜누님의 사정을 물어보니 '나도 꼭 그렇다' 며 화들짝 반가워하신다.

그렇다 정혜누님은 어머니측의 얼굴생김과 신체구조를 갖고 있는 형상이며 무좀발의 공통점을 갖고 있는 나의 누님이 분명히 확인 되고 있었다. 아~ 사랑하는 우리 정혜누님. 귓불도, 주량도, 발가락도 모두 닮은 우리는 형제다!!

당신 관속에 넣어갈 반지, 딸에게 건네신 우리 어머니







반지를 낀 누님과 어머니

ⓒ 우원식







반지를 낀 누님이 어머니를 힘껏 끌어안고 있다.

ⓒ 우원식

어느 누구의 감시도 받지 않는 유일한 시간인 개별 상봉이 10월 31일 두번째날 오전 9시부터11시까지 이루어 졌다. 북측이 운영하고 있는 금강산호텔 715호가 우리가족의 개별 상봉 장소였다. 공개적인 면회소 상봉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우리끼리 만의 내밀한 이야기도 가능하니 말이다.

방에 누님이 들어왔다. 누님은 들어오자마자 옷매무새를 고치고 어머니께 큰절을 한다.

"어머니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정혜야 네가 이렇게 잘 있어서 고맙다. 우리를 이렇게 찾아주니 정말 고맙다. 너를 떼어 놓아 미안하다."

사실 정혜누님이 북측에서 상봉신청을 할 때, 정혜누님이 찾고자하는 명단에는 어머니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96세가 된 어머니가 살아계실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측에서 정혜누님을 만나겠다고 보낸 명단에 어머니가 포함된 것을 알았을 때의 감동이란…. 이 소식이 전해지자 정혜누님의 두 아들과 두 딸은 밤을 밝히며, 이미 평양으로 떠난 정혜누님을 ?아와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고 한다.

정혜누님은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를 저는 천식형의 사정을 듣고는, 다리를 보자고 하신다. 천식형이 허리춤을 풀고 장애가 있는 다리를 보여주자 큰 누님은 그 다리를 감싸 안고 "얼마나 힘들었냐"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반지를 낀 누님과 가족들

ⓒ 우원식

우리가 준비해간 120여 장의 가족사진, 아버지 장례식사진, 무덤사진을 자세히 설명하고 아버지의 사망일을 알려주니, 제사를 드리겠다며 소중이 적는다.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누님은 귀한 거라며 북한산 비단 4점과 어머니 옷감 1점, 그리고 작은 골뱅이로 장식된 도자기, 들쭉술을 포함한 주류 3점을 준비하셨다. 누님은 "우리가 형편이 좀 어렵지만 정성껏 준비한 선물이고 특히 골뱅이 도자기는 너희 조카들이 손수 만든 것" 이라며 수줍게 전해 주신다.우리가 준비한 선물은, 상봉안내에는 30kg 가방2개 까지 하라고 들었지만, 조금 더 부피가 많아져 가방 3개 정도를 드렸다.

선물 목록을 꼼꼼히 적어서 누님이 선물내용을 살펴보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도록 했다. 선물로 치약, 칫솔, 비누 등의 생필품에서 진통제, 감기약 등 기초의약품, 오리털 파카 등 따뜻한 의류 등을 정성껏 준비했는데 큰누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씻고 싶은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하고, 정성껏 드렸다.

그런 일들을 모두 마치고 개별상봉시간이 한 10분이나 남았을까. 갑자기 어머니가 정혜누님을 곁으로 오라고 하신다. 그리곤 유언으로 남기시려는 듯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씀하셨다.

"요즘 남북관계가 하도 험악해지고, 난 나이도 견딜 수 없을 만큼 많아져서 너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거의 포기 했었다. 그래서 너와 덕혜에게 주려고 했던 금붙이를 모두 없애버리고 이제 내 수중에 단 하나의 반지가 있단다. 이 금반지는 내가 죽어 관속의 들어갈 때 내 입속에 넣어서 가져가려고 했던 반지인데… 내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반지였다. 내 수중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이 반지를 너에게 주고 싶구나…. 소중히 간직하여라…."

이 반지를 받아든 정혜누님은 어머니 품속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통곡해 운다. 나도 영식형도, 난혜누나도 천식형도 모두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 관속에 넣을 그 반지를 끼고 있는 정혜누나의 손을 붙잡고, 그간 맺혔던 그리움과 한을 쏟아 놓고 있었다.

너무도 감당키 어려운 분단의 아픔, 이별의 아픔


1일 남측 CIQ(남북출입사무소) 에서 검역, 짐검사 등을 마치고 나니 이제 이 상봉행사는 모두 마치게 되었다. 오늘 오전에 있었던 1시간 가량의 이별 상봉. 참으로 이런 참혹한 생이별의 순간이 지구상에 또 어디에 있을까? 애절함을 넘어 참혹한 이별의 순간이었다.

96세의 어머니의 다 쭈그러진 얼굴은 온통 울음 그 자체였다. 눈물도 말라버린 그 지친 눈은 붉게 충혈 되어 갔다. 71세 노인이 되어버린 딸의 손을 붙잡고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게 끝일거야"를 연발하며 한숨도 내어 쉬고 고개를 누나의 손등에 대고 뽀뽀를 한다. 그러다가 결국 가슴이 답답하다며 의자 뒤로 머리를 젖히시고 말았다.

60년간 가슴에 묻어두었던 애절함, 만나자 마자, 당신의 딸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다시 생짜로 이별해야 하는 고통에 거의 탈진 상태로 빠져 들었다. 적십자 의료진이 달려오고 혈압을 체크한다. 진료를 위해 밖으로 나가시자는 의료진의 권유에도 곧 헤어져야 하는데 어찌 떨어지느냐며 이를 거부하시고, 알약의 진정제를 먹고 차츰 진정되어 갔다.

한 시간의 상봉시간이 끝나고 정혜누님은 어머니와 영식형에게, 나와 난혜누님과 천식형은 정혜누님에게 큰절을 하고 끌어안았다.

"누나 잘 살아!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살아서 미안해. 이렇게 우리를 찾아주어 너무 고마워. 빨리 통일을 이루고 그때 다시 만나."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다. 따뜻하게 끌어안는 누님의 가슴을 언제 다시 안아 볼 수 있을까? 속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눈물을 참는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큰절을 올리던 정혜누님이 결국은 굵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북측 상봉단이 먼저 나가 버스에 올라타고 남측 상봉단이 버스 밖에서 인사를 나누는 순서, 차창 밖으로 내민 손을 모든 상봉자들이 애절하게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이미 이별이 예정되었던 만남이지만 이 이별은 왜 이리도 잔인한 것일까….

지난 60년의 체제, 이념도 혈육을 갈라 놓을 수 없음을 이미 우리의 만남과 체험으로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난 60년 간이 이별과 분단이었는데 또 갈라져야 하다니…. 만나는 것은 기쁨이지만 헤어지는 게 이렇게 고통스러울 줄은….

"누나 잘 가~ 잘 살어, 우리 다시 꼭 보자."

어느덧 내 눈에서도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오늘 이 상봉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그리고 지금은 차창 밖 가족의 손을 간절하다 못해 처참한 형상으로 부여잡고 있는 이 가족들이 이런 상황을 선택한 것도 아니고 이 가족들이 뭘 잘못해서 이런 고통을 받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나라의 정치가 잘못되고, 냉전시대에 잘못된 정치가 온 국토와 국민을 희생시킨 게 아닌가!

정말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정치가 잘못되고, 정치가 국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면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게 되는지 한눈에, 한숨에 겪어지는 이 현장을 똑똑히 기억해야겠다. 가슴 속에 깊이 새겨야겠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그 시대의 위정자들…. 60년이 지나도록 이 고통을 이 정도로 밖에 관리 하지 못하는 나를 포함 이 시대의 위정자들…. 마지막 남은 분단의 멍에를 안고 가는 현 시대의 정치인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고개를 들 수 없다.

'아~~미안하다. 정혜누나! 덕혜누나! 김례정 엄마 너무 너무 미안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누님을 보게 된 건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이런 또 한 번의 간절하고 절박한 깊이의 고통을 안겨드리게 된 것이 정말로 정말로 죄송합니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차창 밖으로 나온 정혜누님의 손을 잡게 해 주기 위해 늙어서 작아진 어머니를 번쩍 안아 올리는 일 밖에 없었다.

그동안 생각과 관념 속에만 있었던 분단의 아픔이, 이산가족의 아픔이었지만 이 현장을 통해 나는 완전한 분단, 이산가족의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 모든 상황이 끝나고 정혜누님을 실은 차가 시야에서 없어지고 면회소로 돌아오는 길…. 온몸의 관절이 쑤시고 머리가 이리 아플 수가 없다. 뼈가 떨어질 듯한 고통이 이런 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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