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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칼럼 inside] G20이 美 가계부채 해결해 줘야

[Weekly BIZ] [칼럼 inside] G20이 美 가계부채 해결해 줘야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美 자존심 상할 일 아니라 세계 경제 살릴 윈·윈전략
美 가계의 부채 탕감해 소비 살리는 게 가장 시급


싱가포르는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통화정책이나 재정정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소규모 개방경제이기 때문에 돈을 풀어봤자 국내 경기 살리는 데는 별로 쓰이지 못하고 그 효과가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기 조절용으로 환율정책을 가장 큰 무기로 사용한다.

미국은 지금 싱가포르와 같은 소국(小國) 신드롬을 보이고 있다. 중앙은행이 돈을 아무리 풀어도 국내 경기가 부양되지 못한다. 대신 돈이 해외로 빠져나간다. 국내에서 돈이 돌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인들이 가계 부채에 허덕이고 있어서 소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돈이 있어도 대출해 줄 곳이 없다. 개인들로부터 오히려 돈을 회수한다. 소비가 살아나지 못하니 기업들도 물건을 팔지 못한다. 따라서 고용이 늘지 못하고 소비가 더 위축된다.

한편 거액의 달러를 들고 있게 된 금융기관, 투자자들은 미국 경제가 불안하니까 돈을 해외로 내보낸다. 이 돈이 신흥시장으로 몰리면서 환율을 크게 흔들고 있다. 호주 달러는 미 달러와 일대일로 거래되는 수준까지 올랐다. 브라질은 밀려오는 돈을 막기 위해 금융거래 세율을 4%로 올렸다. 위안화의 급격한 절상을 거부하는 중국에 대해 미국과 유럽은 비난 수위를 높여간다.

이 상황을 그대로 두면 '환율전쟁'이 격화되고 모든 나라가 패자(敗者)가 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달러가치 하락으로 수출을 조금 늘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입 물가가 올라서 소비를 더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 국채 금리가 상승하면 채권시장 버블이 터지고 경기 회복이 물 건너간다. 중국은 위안화를 대폭 절상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원자바오 총리는 위안화 절상 압박이 세계 경제에 '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까지 말하며 반발한다. 이미 엔고에 시달리는 일본도 엔화 가치를 더 높일 여력이 없다.

전쟁을 피하려면 문제의 핵심을 다스려야 한다. 지금 세계 경제의 핵심 사안은 무역 불균형이 아니라 미국의 소비 부진이다. 무역 불균형은 세계 경제에 구조적으로 있었던 문제이고, 단기 해결이 쉽지 않다. 1980년대에 일본을 엔 강세로 몰아붙였지만, 무역 불균형은 해소되지 않고 일본 경제만 악화시켰던 경험을 되새겨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세계 경제의 중요 엔진이었던 미국 소비가 어느 정도 되살아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필자는 이를 위해 미국 정부가 가계 부채의 일부를 탕감해 주고, 탕감비용 조달 국채의 상당 부분을 G20이 매입해 주는 방안을 제안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작년에 7800억달러의 돈을 풀었는데, 이번에 또 1조달러가량의 돈을 추가로 풀고 이것이 효과를 보지 못하면 그야말로 세계적인 재앙이 벌어진다.

이왕 돈을 풀 바에는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며 부작용을 일으키게 하지 말고, 미국 소비가 늘어날 수 있도록 직접적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미국 정부와 금융기관들이 비용을 공동 분담하는 형식으로 가계 부채의 일부를 탕감해주면 소비가 늘어나고 미국 경제에 대한 투자자 신뢰가 개선되어 자금 유출에 제동이 걸릴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은 미국이 달러 가치 안정에 대해 약속만 확실히 해주면 이 방안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은 미국 국채를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이다. 현재의 경제 성장세가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한 당분간 달러 헤게모니에 도전할 이유가 없다. 위안화 국제화에 시동을 거는 것은 패권 도전이라기보다 달러 패권이 갑자기 몰락할 경우에 대비한 자구책이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 일본도 미국 국채 제2위 보유국이고 엔고로 실물경제가 고전하고 있는데 달러화 가치가 지지되는 것이 유리하다.

미국 입장에서 이 방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미국민들의 정치적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세계 금융위기는 월가 금융인들의 탐욕 때문에 빚어졌는데 금융기관들만 구제받고 일반인들은 실업과 빚더미 속에 허덕이는 것에 대해 사회적 불만이 팽배하다.

따지고 보면 미국이 크게 자존심 상할 일도 아니다. 장래성이 없는데 돈만 자꾸 빌리면 물론 초라해진다. 그렇지만 미국은 아직 젊은 나라이고 기회의 땅이다. 미국의 장래를 담보로 돈을 빌려 '윈·윈'해법을 찾는 것일 뿐이다. 남 탓하며 소국(小國)식 해법을 찾기보다 문제의 본질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실질적인 대책을 찾는 것이 대국(大國)으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다.

한국은 마침 이런 해법을 제안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것 같다. 오는 11월에 열리는 G20 정상회의 의장국이다. 환율문제를 어떻게든 다룰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갈등의 중간에 있는 조정자로서 미국 가계 부채 탕감 공조안을 테이블에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이명박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의 관계가 돈독해서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 수 있다. 중국과 일본의 협조를 끌어내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자고(自古)로 과도한 빚은 탕감으로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환율전쟁, 무역 보복, 인플레, 금융위기 등 각종 부작용을 다 겪은 뒤 탕감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쓰기보다 일찍 쓰는 것이 현명할 수 있다. 중남미 부채 해결의 물꼬를 터줬던 '브래디플랜'처럼 이번에 'MB 플랜'과 같은 역사적 해법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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