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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명사

조선의 화려한 비상 이끈 위대한 리더 역사 속 호모 컨버전스 세종대왕

조선의 화려한 비상 이끈 위대한 리더 역사 속 호모 컨버전스 세종대왕 2010년 10월 08일(금)

우리 역사 속 선비들을 보면 대부분 지식 융합적인 ‘호모 컨버전스’들이다. 그들은 어느 정도 천문학과 한의학을 알고 있었으며 그림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금들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 중 최고봉이 세종대왕이다. 분야를 막론하고 모르는 것이 없었던 그는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창의성이 뛰어난 ‘호모 컨버전스’로 꼽히고 있다. 9일 한글날을 앞두고 세종대왕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들을 소개한다.

새로운 조선의 음운체계, 한글

▲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가장 창의성이 뛰어난 호모 컨버전스이다.  ⓒwikipedia
영국의 다큐멘터리 작가 존 맨은 그의 저서 ‘알파 베타’에서 ‘한글은 모든 언어가 꿈꾸는 최고의 알파벳’이라고 언급했다. ‘디스커버리’지는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현재 격찬을 받고 있는 한글이지만 창제 당시에는 사대부들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그러나 독자 문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던 세종은 용의주도하게 집현전 학자들을 중심으로 문자 창제 프로젝트를 추진시켜 나갔다. 그 결과 1443년 훈민정음을 만들어냈다.

비록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한글은 세종이 전문적인 언어학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 민족의 다양한 언어생활을 깊이 있게 관찰해 얻어낸 결과였다. 또한 풍토가 다르면 그 곳에 사는 인간의 발음이 다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선의 음운체계를 가져야 한다는 믿음의 소산물이기도 했다.

절대음감의 소유자 세종

세종은 ‘음악’에도 집중적으로 에너지를 쏟았는데, 특히 조선음의 ‘표준화’ 작업에 많은 신경을 썼다. 그 임무를 맡은 것이 박연이다. 우선 박연은 대나무 관악기를 만들어내고 우리나라 소리에 맞는 편경과 편종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마무리 조언자는 세종이었다. 이에 대한 일례가 있는데, 박연이 편경을 시연하던 날 세종이 어느 부분에 어떤 음이 잘못됐다고 정확히 지적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종은 전문가 이상의 지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감까지 정확하게 터득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능력은 ‘정간보’ 창안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났다. 정간보는 음의 높이와 길이를 나타낼 수 있는 악보로 오늘날 서양 음악의 오선보가 이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정간보 창안은 조선의 음악을 기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작곡 능력도 탁월했다. ‘용비어천가’에 실린 봉래의 7곡, 전임 왕들의 군사적 업적을 찬양하고 문화적 업적을 칭송한 정대업 15곡과 보태평 11곡을 직접 하루만에 지었다. 비록 당시 작곡 방법이 기존 곡에 가사의 길이를 조절해 맞추는 것이었지만 총23곡을 하루 저녁에 완성했다는 것은 세종의 음악적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시와 그림에서도 세종은 당대 제일의 수준이었다. 초년부터 글씨는 송설체 요체를 터득해 이미 명필로 소문났었다. 그림의 품격도 매우 고상해 훗날 추사 김정희조차 난초를 그린 그의 묵화를 조선 최고의 작품으로 뽑았을 정도다.

출판 기획자로서의 재능도 겸비

▲ 한글은 우리 민족 구성원의 다양한 언어생활을 깊이 있게 관찰하여 얻어낸 결과였다. 
세종은 뛰어난 출판 기획자이기도 했다. 요즘말로 보자면 꼭 필요한 정보를 가지고 쉽게 책을 만드는 대박 기획자였던 셈이다. 15세기는 인쇄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새로운 인쇄술을 요구하기 시작한 시대이다. 그 결과 종전에 비해 효율성이 5배나 높은 ‘갑인자’가 탄생했다.

발전된 인쇄술을 바탕으로 세종은 ‘농사직설∙태종실록∙삼강행실도∙팔도지리지∙향악집성방’ 등 다양한 분야의 출판물 간행을 직접 주도해나갔다. 특히 출판물에 삽화를 삽입해 정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기획했다. 당시 농기구 그림을 볼 수 있게 된 것도 바로 삽화를 도입한 세종의 편집 방법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삼강행실도에도 삽화를 넣어 유교적 홍보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만일 이 책이 판매용이었다면 베스트셀러가 됐을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전해진다.

세종은 법학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재임기간 32년 중 재임 초 17년은 법률을 만드는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전문가들과 토론을 거치면서 ‘신찬 경제속육전’을 만들어 냈다. 비록 혼자 이룬 업적은 아니지만 일등 공신은 단연 세종이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은 해박한 법률 지식을 가졌던 세종은 이 프로젝트 전 과정을 직접 참여하고 끌어나갔다.

과학적 아이디어 뛰어난 과학 정책자이자 지식 관리자

세종은 민간에 흩어진 경험의 산물들을 지식화해 정보로 엮은 지식관리자였다. 특히 농업 생산성 향상과 보건의료의 질적 향상에 큰 역할을 했다.

▲ 10년만에 만들어진 칠정산은 수학∙천체∙물리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야 하는 ‘과학지식의 집합체’였다. 
사실 세종이 왕으로 취임하던 시기 조선의 현실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우선 낙후한 농업기술과 시설부족 그리고 낮은 생산성으로 인해 항상 식량이 부족한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각도로 검토가 이뤄졌다. 생산성이 높은 지역의 방법들을 수집하고 정책들의 자료를 취합해 분석했다. 그 결과 ‘농사직설’이 만들어졌다. 농업기술에 관한 단 한권의 책이지만 영향력은 메가톤급이었다. 이 책에 소개된 농업과 농업정책으로 인해 땅을 한두 해 놀린 다음 농사를 짓던 기존 방식이 매년 농사를 짓는 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자 문제는 다른데서 나왔다. 새로운 농법은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많은 시간 일하다 보니 백성들의 건강에 문제를 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은 이에 ‘한약 구급방’과 ‘향악집성방’을 간행하게 됐다. 이후 보건의료가 질적 성장을 거두게 되면서 조선의 인구도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세종시대 과학기술의 하이라이트는 한국 최초의 달력인 ‘칠정산’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매해 ‘동지사’를 중국에 보내 달력을 얻어왔다. 그러나 중국과 조선의 땅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다 보니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 않았다.

이에 세종은 칠정산 개발 프로젝트를 지시했고, 10년만에 만들어진 칠정산은 수학∙천체∙물리학적 지식을 총동원해야 하는 ‘과학지식의 집합체’였다. 당시 자신의 지역을 기준으로 천문 계산을 할 수 있는 나라가 중국과 이슬람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세종시대 과학수준이 얼마나 높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김연희 객원기자 | iini0318@hanmail.net

저작권자 2010.10.08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