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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지원/통일

앞으로 1~2년이 한반도 운명 가른다

앞으로 1~2년이 한반도 운명 가른다
통독 20주년…매경, 신문·방송 트랜스미디어 기획
MB, 통일세 언급…북한 김정은 세습…1~2년이 중대시기
기사입력 2010.10.03 19:28:04 | 최종수정 2010.10.03 20:41:46 트위터 미투데이 블로그 스크랩

◆ 독일통일 20주년…한반도 운명은 ① 통일 독일의 현주소 ◆

이명박 대통령이 8ㆍ15 경축사를 통해 `통일세`를 언급한 가운데 북한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전대미문의 3대 세습 절차를 밟고 있다.

이런 한반도를 미국과 중국, 일본, 러시아가 각기 다른 계산법으로 에워싸고 있다. 앞으로 1~2년이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중대한 시기로 작용할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통일독일은 한반도의 미래를 내다보는 창(窓)이다. 2010년 10월 3일은 동ㆍ서독이 통일된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다. 매일경제는 통일독일 20년이 한반도에 주는 교훈을 찾기 위해 신문과 방송, 그리고 독일 전문가들로 구성된 5명의 취재진을 현지에 파견했다.

지난 1일 인천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탑승한 이들은 기내에서부터 통독 20주년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비행기는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로 빈 자리가 없었다. 20주년을 맞은 3일 기념행사가 열리는 베를린 국회의사당도 단체 관광객을 싣고 온 관광버스들이 줄을 지었다.

동독의 거리가 세계 각국의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는 사실로부터 통일 후 독일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다. 21년 전인 89년 여름 휴가철, 이곳은 동독인들이 도망치던 곳이었다. 그들은 헝가리 서독대사관에 난입해 "우리를 서독으로 보내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 됐다.

그러나 브란덴부르크를 메운 사람들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행인들의 표정이나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관광객들 표정에도 설렘이나 흥분보다는 `고뇌`가 읽혔다. 같은 회사라도 동독과 서독지역 월급이 다르다는 한 직업학교 여학생의 말에서 독일 통일은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20년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통일독일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정치 분야에서 `서독 정당체계를 동독지역으로 확산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지만, 단기간에 동독지역에서도 민주주의의 근간인 정당정치가 구축됐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옛 동독지역의 행정 정비작업도 90년대 중반 들어 마무리됐다.

통일 독일이 형식적인 면에서는 어느 정도 완성의 틀을 갖추기는 했으나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핵심적 논란은 경제 부분에 있다. 2008년 기준 옛 서독지역 대비 동독지역 생산성은 79%, 임금은 81.5%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통일 후 점점 올라가 2005년 20.6%를 기록하기도 했던 옛 동독지역 실업률도 이후 진정돼 2008년에는 15.4%까지 떨어졌다.

제1차 연대협약(Solidarpakt 1)에 따라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동독 신생 주들은 연방정부에서 재정을 지원받았다. 특히 이 협약에 따라 옛 동독지역은 4450억 서독마르크에 달하는 부채를 30년 동안 상환할 수 있게 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제2차 연대협약(Solidarpakt 2)이 체결됐다. 2004년부터 2019년까지 연방정부는 통일비용 마련을 위한 예산으로 총 1560억마르크를 책정했다.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일 통일은 국민에게 돈이 들어가는 것이 문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경제 문제로 비롯된 동ㆍ서독 출신 국민 간 반목도 눈에 띈다.

옛 서독지역 출신으로 신학을 전공하는 대학생 마르코 씨(26)는 "통일 덕분에 가난한 나라였던 동독에 기회가 생겼다. 통일은 동독 발전에 유익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언젠가 연방정부는 동독 지원을 그만둬야 한다"며 계속된 지원은 곤란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옛 동독지역 지원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인 사람들도 있었다. 서베를린 출신으로 관광업에 종사하는 린드너 씨(49)는 "언제까지 옛 동독지역 시민들을 연방정부가 먹여살릴 순 없다"며 "개인적으로 통일이 된 날은 아주 슬픈 날이었다. 서독과 동독은 서로 잘 맞지 않는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지역별 격차도 큰 문제였다. 옛 동독지역에 10년째 거주 중인 한 한국교민은 "옛 동독지역에서 대도시라고는 드레스덴, 라이프치히 정도밖에 없다. 할레가 최근 들어 개발되는 정도"라며 "대기업들이 있는 대도시는 대부분 서독지역에 있다"고 말했다.

옛 동독지역 출신으로 직업학교에서 안경 제작을 전공하고 있는 알린 씨(22)는 "같은 회사에 취직하더라도 옛 동독지역에 있으면 옛 동독 월급을 받고, 옛 서독지역에 근무하면 옛 서독 월급을 받는다. 옛 동독지역 중 옛 서독 월급을 받는 곳은 베를린 정도밖에 없다"고 불만을 표시했다.

옛 서독ㆍ옛 동독 주민들 간 문화적 차이도 여전했다. 동베를린 출신으로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있는 미하엘 씨(25)는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만 문제는 윗세대에 있다"며 "옛 서독 사람들은 `옛 동독 사람들은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옛 동독 사람들은 `옛 서독 사람들은 거만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이 없어지려면 앞으로 한두 세대는 지나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2009년 발표된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사회과학연구센터 여론조사에 따르면 옛 동독지역 출신들 중 62%가 자신은 `옛 동독과 연결고리도 없고 독일연방공화국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하고 있다`고 답하기도 했다.

◆ 독일, 통일 위해 주변국과 줄다리기 포기

= 독일이 통일을 위해 자국 손해를 일부 감수하고 나섰던 것은 우리가 참고해야 할 점이다.

독일은 통일 준비단계에서 독일 통일을 염려한 주변국들을 설득해야 했다. 1990년 `코카서스 회동`에서 독일은 통일 후 방어 위주의 비핵주의를 추구하며 병력을 37만명으로 제한할 것에 합의한다.

또 이에 앞서 통일 이후에도 자국 소속 유럽공동체(EC) 집행위원ㆍ의원ㆍ법관 수 변화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자국 이해를 위해 주변국들과 `줄다리기`를 일찌감치 포기한 것이다.

이에 대해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책임연구위원은 "우리로 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하는 것이 남북 통일의 전제조건이 될 수 있다"며 "독일은 2차대전 전승국들에 통일을 `승인`받아야 했지만 우리는 `평화협정`만 체결하면 통일은 남북 당사자 간 문제가 되기 때문에 더 쉬워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통일 전 동ㆍ서독 국민 간 활발한 교류를 유도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황진훈 한국정책금융공사 북한연구팀장은 "통일 직전인 1987년에만 옛 동독 주민 510만명이 옛 서독지역을 방문했다. 72~87년 옛 서독지역을 방문하는 옛 동독 주민에게 연 2회까지 지원경비 30마르크를 지급하기도 했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북한 주민이 남한을 방문하는 것은 금지돼 있지만 현재 금강산ㆍ개성 관광 등 민간인들 대북 관광이 중단돼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반면 옛 동독지역 지원 과정에서 나타난 포퓰리즘은 경계해야 할 대목이다. 분단 기간에 암시장에서 1대30 비율까지 기록했던 옛 동독과 서독 화폐 환율을 동독 주민과 정치권 요청으로 1대1~1대2 정도로 조절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동독지역 공장 생산비를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생산성이 따르지 않는 상태에서 임금만 인상된 동독 기업들은 경쟁력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통일 이후 옛 서독에서 옛 동독지역으로 이전된 비용 중 대부분이 사회보장성 지출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1991년부터 2003년까지 독일 정부는 연금 등에 총 비용 중 49.2%를 지출했다. 인프라스트럭처 재건, 기업보조금 등에 지출된 비용은 각각 전체 중 12.5%, 7.0%에 그쳤다.

한편 통일 20주년을 맞은 독일은 3일 정오 앙겔라 메르켈 총리와 크리스티안 볼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공식행사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2(옛 동ㆍ서독)+4(미ㆍ영ㆍ프ㆍ러) 조약`에 참여했던 4개 전승국 관계자들과 우리나라에서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함께했다.

■ 前 독일대사가 본 독일통일과 한반도

미하엘 가이어 前 駐韓독일 대사

통일 독일이 20돌을 맞았다. 서독과 동독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1년간 협상 끝에 `통일조약`에 합의해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이뤘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20년 전 사건과 결과를 역사의 큰 행운이고 선물이라고 받아들인다. 여기서 필자는 몇 가지 논거를 토대로 그 이유를 한국인 독자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한국과 독일의 분단은 냉전의 산물이다. 한국과 독일은 모두 분단이 결정될 때 협상 테이블에 참여하지 못했다. 독일을 분할하는 것은 나치 독재 정권이 전 유럽에 몰고 왔던 공포를 감안할 때 적절한 조치라고 여겨졌다. 한국 국민은 휴전과 분단을 매우 부당하게 생각한다. 한국인은 긴 일본 식민 통치 후 자신들과 상관없이 국제 정치 역학에 의해 분단의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둘째, 20년 전 독일 통일은 서유럽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및 유럽연합(EU)의 결실이었고 승전 4개국이 경제적으로도 강력한 유럽 국가의 부활에 동의해 가능했다. 반면 한국은 중국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진정한 동등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마지막 차이점은 독일 통일의 주역은 동독 주민들이라는 것이다. 동독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우리는 국민(das Volk)이다`고 외쳤고, 나중에는 `한 국민(ein Volk)이다`고 외치면서 동독 내 권력기관 및 소련에 항거했다. 북한은 이러한 대규모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북한과 동독 사이의 차이가 지역ㆍ물리적 측면에서도 있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동독은 국민 및 영토 규모에 있어 서독의 5분의 1이었지만 북한은 훨씬 크다.

많은 한국인들은 북한 주민들이 서신 교환 단절 등으로 남한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 필자는 이를 큰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통일은 곧 이뤄질 것이고 이뤄져야 하는가?

중요한 점은 한국인과 독일인뿐 아니라 전 세계가 양국의 분단을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통일은 역사와 정치적 윤리에 따라 이뤄지는 것이다.

한국의 통일은 중장기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동독 내 도로, 철도, 통신망 등 인프라스트럭처 재구축 사업은 서독에 대규모의 경기 부양 효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경기 부양이 없었다면 독일 통일 후 헬무트 콜 정부가 다시 집권하지 못했을 것이다. 경기 부양 프로그램의 재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동독 내 화폐 교환 및 연금 인상은 소비재에 대한 수요를 가져왔으며, 이러한 수요는 동독 자체적으로는 충족될 수 없어서 서독 및 서방 이웃 국가들에 의해 충족됐다.

독일 분단의 종식은 또 독일의 대외정책 및 외교를 해방시켰다.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통일을 선물로 생각한다. 우리는 함께 성장했고 계속 성장하고 있다. 통일 후 동독은 약 150만명의 젊은 전문 인력을 서독이나 호주 캐나다 미국과 같은 서방국에 빼앗겼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고 많은 서독 젊은이들이 동독 지역에서 성공을 위해 도전하고 있다. 독일 통일에서 결정적이었던 것은 고르바초프하에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통일을 관료주의적인 회의론자들에게 맡기지 않고 `운명적 역사의 순간`으로 잡은 것이었다. 필자는 한반도의 통일은 정치적 계산에 따라 통제되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대신 이른 시일 내에 급격하게 이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은 독일 통일로부터 무엇보다도 국민의 믿음과 저력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별취재팀 = 매일경제신문 정치부 장재혁 기자 / MBN 정치부 이무형 기자 / MBN 영상취재부 김석호 기자 /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조성렬 책임연구원 / 한국정책금융공사 황진훈 북한연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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