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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紙명가 4대째, 장응렬 匠人 부녀] "맥 이어라" 아버지의 유일한 유언 지켰죠

[韓紙명가 4대째, 장응렬 匠人 부녀] "맥 이어라" 아버지의 유일한 유언 지켰죠

  • 입력 : 2010.09.21 03:02

한지에 색 입히는 기술로 '신지식 임업인'에 선정돼
딸은 3년째 기술 배우는 중 "한지에 디자인 더할거예요"

강원도 원주시 우산동의 한지(韓紙) 공방. 100㎡ 크기 작업장에서 한지 원료인 닥나무 껍질에서 추출한 하얀 섬유가 가득한 가로·세로 2m의 알루미늄 통에, 한지 장인(匠人) 장응렬(55)씨가 가로·세로 1m인 발채를 담갔다가 들어 올렸다. 가늘고 긴 대나무를 엮어 만든 발채 사이로 물기는 빠지고, 닥나무 섬유만 발채 위에 고르게 퍼졌다. 발채를 뒤집어 바닥에 내려놓자 '젖은 한지'가 남았다. 전통방식 그대로의 '종이 뜨기' 작업이다.

장씨 옆에서 딸 유나(23)씨도 종이를 뜨고 있다. "안 돼. 입자가 고르지 않잖아. 왼쪽을 더 들어야지, 더." "아, 알고 있어. 아빠."

한지 장인 장응렬씨가 자신의 공방에서 딸 유나씨와 함께 전통 방식의‘종이 뜨기’작업을 하고 있다. /김충령 기자 chung@chosun.com
아버지는 서툰 딸을 계속 타박했지만, 유나씨 표정은 밝다. 추석을 앞두고 주문이 늘었고, 유나씨는 일을 배우면서 부족한 일손도 거들고 있다.

유나씨는 지난 7월부터 (사)한지개발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전통 한지 기술을 익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전통 기술의 정수(精髓)를 배우는 곳은 아버지의 공방이다. 유나씨가 대(代)를 잇게 되면 4대째 한지 명인이 된다. 증조할아버지인 고(故) 장기봉 선생은 황해도 연안에서 1910년 무렵부터 한지를 만들었다. 할아버지인 고 장석현 선생이 그 뒤를 이었고, 6·25 전쟁이 터지면서는 강원도 원주로 피란 와 맥을 이었다.

하지만 최고 한지 장인의 자부심엔 늘 가난이 따라다녔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 등으로 유리창이 보편화하면서 문풍지는 설 자리를 잃었다. 유나씨의 아버지 장씨는 "한지 장인이 되기 싫어 아버지 몰래 전기 기술을 익혔다"고 했다. 실제로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1983년 사우디아라비아 건설현장으로 갔다. 하지만 이듬해 아버지가 췌장암으로 돌아가셨고, 장씨에게 남긴 유언은 오직 하나 "한지의 맥을 이으라"는 것이었다. 장씨는 유언을 따르기로 했다. 사우디에서 번 돈으로 한지 원료인 닥나무를 사고 본격적으로 한지 제작에 매달렸다. 그러나 저가로 대량 생산되는 벽지 앞에 한지가 설 자리는 없었다.

대신 장씨는 1986년부터 한지에 색(色)을 입히는 특성화 작업에 도전했다. 검은 한지를 개발하는 데 1년 넘게 걸렸다. 낮에는 쉼 없이 한지를 찍어내고, 밤에는 원하는 색이 얹히도록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90년대 초반에야 원하는 빛깔을 얻을 수 있었다"고 했다. 2000년, 그는 이렇게 업그레이드 된 전통 한지 기술로 '신지식 임업인'에 선정됐다.

유나씨는 "아버지가 한지에만 빠지신 통에 그 흔한 놀이동산 한 번 못 가봤다"며 웃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한지 사랑을 보고 자란 그 역시 "자연스럽게 한지에 눈을 떴다"고 했다. 유나씨는 아버지로부터 한지 기술을 배운 지 3년째다. 이제 그는 3대에 걸친 한지에 '디자인'을 입힐 생각이다. "한지개발원에서 한지 섬유를 이용한 의상 디자인을 연구할 겁니다. 나아가 한지를 활용한 액세서리도 개발해보고 싶어요."

장씨는 "딸이 한지 기술을 익히기에 적극 나서서 기쁘다"며 "이번 추석에는 딸과 함께 갈 성묘길이 훨씬 즐거울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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