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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명사

오세훈 서울시장 부인 “내조 못해… ‘빳빳한 배추’였대요”

오세훈 서울시장 부인 “내조 못해… ‘빳빳한 배추’였대요”
    기사등록 일시 [2010-09-19 10:40:06]

【서울=뉴시스】온라인뉴스팀 = “개표하는 날 남편과 저는 여기(서울시장 공관)서 TV로 개표방송을 지켜봤어요. 새벽 2시를 넘기면서 패색이 짙어지자, 남편이 포도주를 한 잔 들고 와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잔을 비웠죠. 저는 그나마 지난 선거에서 남편을 많이 지원하고 아내로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만약에 제가 열심히 하지 않은 상태에서 패배했다면 평생 남편한테 미안했을 거예요”

오세훈 서울시장의 부인 송현옥(49)씨는 최근 주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피말렸던 지난 6.2 서울시장 선거 개표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역전이 되기 전에 캠프에서 전화가 걸려 왔어요. ‘괜찮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역전이 될 겁니다’라고 참모들이 말을 하는데 그 당시엔 그저 위로의 말로 들렸어요. 그 말을 그대로 듣고 안심할 수는 없었죠. 막상 역전이 된 뒤에도 남편은 개표 상황실로 가지 않았어요. ‘구청장과 시의원이 거의 전멸에 가까운 상황에서 나만 살아남는 게 과연 맞는 건지 모르겠다’면서 괴로워했어요”

다음은 주간조선 인터뷰 기사의 주요 내용들이다.

지난 8일 송씨와의 인터뷰를 위해 서울시장 공관을 찾았을 땐 몸통 일부가 부러진 채 위태롭게 버티고 있던 거목을 베어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중장비가 동원됐고 10여명의 인부들이 무너진 지붕을 수리하느라 분주했다. 이날 철거된 목백합나무는 태풍이 오기 전에 이미 뿌리의 일부가 썩어 있을 정도로 수명이 다한 나무였다. 송씨는 기자를 맞으며 “인터뷰 약속을 한 날 공교롭게도 공사를 하게 돼 미안하다. 부러진 거목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아 급히 철거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5년째 이집에 살고 있는데 공관은 지은 지 60년이 넘었다고 해요. 집이 낡은 데다 위치도 이 일대에서 가장 높은 편이라 강풍 피해를 좀 입었습니다. 작심하고 수리를 하자면 비용이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문제가 되는 곳만 손을 대기로 했어요. 수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예요”

서울시장 공관은 1940년대 지어진 일본식 복층 구조다. 오 시장 내외가 처음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 때 광복 후 일본인들이 살다가 떠난 “‘적산가옥(敵産家屋)’의 느낌이 강했다”고 한다. 당시 공관 2층은 일본식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있었다. 딸 둘과 시부모를 모시고 공관에 입주한 송씨는 공관 2층 다다미를 뜯어내고 온돌로 개조했고 두 딸이 이곳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곳은 광복 이후 해군 제독의 관사였다가 대법원장 공관을 거쳐 1981년부터 서울시장 공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울시는 건물이 워낙 낡아 공관 이전 논의를 한 적이 있지만 예산 부족으로 보류하고 있다. 특히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의회가 여소야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오 시장 임기 내에,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해야 하는 새 공관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공관 내부의 응접실로 들어서자 한쪽에 밴드가 사용하는 드럼(Drum) 세트가 눈에 띄었다. 오 시장의 드럼 실력은 버시바우 전 주한 미대사와 협연을 펼칠 정도로 수준급인 것으로 알려졌다.

큰 키에 생머리인 송씨는 나이에 비해 젊어보였다. 일간지, 시사주간지 등 시사 언론과는 첫 인터뷰라고 했다. 익숙지 않은 상황을 맞아서일까. 이날 인터뷰 도중 그는 계속 찻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지난 선거 땐 맘먹고 뛰었죠”

한나라당은 6·2 지방선거 때 서울지역에서 완패를 했다. 4년 전 민선 4기 당시 25개 구청장을 거의 석권하다시피 했던 상황과는 정반대로 강남·서초·송파·중랑구를 제외한 나머지 21개 구청장을 야당에 내줬다. 시의원도 106석 중 겨우 27석을 건졌을 뿐 민주당에 79석을 내주며 여소야대 시의회를 맞았다.

송씨는 원래 오 시장이 정치에 뛰어드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민선 4기 선거 때 공식 선거일정 동안만 서울시내 주요 재래시장을 찾아 유세를 하는 정도가 정치인의 아내로서 그가 한 역할의 전부였다. 하지만 이번 6·2 지방선거에선 달라졌다. 현역 시장이라는 지위 때문에 예비후보 등록을 늦게 할 수밖에 없었고 “시장 직무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오 시장의 고집이 부인 송씨를 유세 현장으로 내몰았다. 특히 당내 경선이 진행되는 동안 오 시장 대신 정견 발표문을 대독하는 등 선거운동에 올인했고 “오 시장 부인이 없었다면 경선을 제대로 치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뒷얘기도 들었다. 그럼에도 송씨는 아직도 남편이 정치를 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입장에 큰 변화가 없다고 했다.

“경선 당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오세훈이 시장이 되고 나서 한 일이 뭐가 있냐’ ‘당심(黨心)은 오세훈이 아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일부 당원들의 지적이었어요. 여기에 경쟁 후보로 나선 원희룡 의원의 부인이 직장을 그만두고 선거전에 뛰어들어 굉장히 열심히 하는 걸 봤어요. 상대적으로 내가 못하는 걸로 비쳐지는 게 아닌가 걱정도 했죠. 마음을 독하게 먹었죠. 남편 대신 대중 연설도 하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차츰 ‘도도하고 오만한 후보 부인’에서 ‘순수한 후보자의 부인’이라는 인상을 심기까지 꽤 품을 팔아야 했어요. 이 과정에서 불필요한 오해를 다소나마 풀었다는 게 가장 큰 보람이었습니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 결과는 오 시장에게 큰 상처인 동시에 보약이 됐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서울시장이 된 오 시장은 정치권 안팎에서 “오만하다” “한나라당을 챙기지 않는다”는 식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시장 재직 시절 그는 깨끗한 시정을 펴는 동시에 문화 콘텐츠를 강조하는 정책 철학을 강하게 밀어붙이기도 했다. 깨끗한 정치를 하겠다며 16대 국회의원 시절 이른바 ‘오세훈법’으로 불리는 강화된 정치자금법을 만들던 열정이 되살아난 것이다. 이처럼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 그의 행보는 기존 정치권에서 부러움을 사는 동시에 질투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번 선거가 남편에게 큰 보약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정치인의 경우 견제를 당하기 마련이고 때론 오만하게 비쳐질 수도 있는데 이번에 겸손함을 배운 것 같아요. 젊은 정치인에게 그런 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축복이죠. 제가 남편에게 ‘당신이 시장으로 가장 잘한 것은 일을 열심히 한 거고 가장 못한 일은 일만 열심히 한 거’라는 조언을 가끔 합니다. 어떤 일이든 동전의 양면이 있다는 점을 이번 기회에 깨달았을 거예요”

오 시장은 요즘도 틈만 나면 책을 읽는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점을 부인 송씨는 높게 평가한다고 했다. “남편은 항상 어떻게 하면 서울의 미래를 밝게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합니다. 새벽에 일어나 보면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모습을 요즘도 자주 접하거든요. 결국 서울의 미래가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오 시장 처음 봤을 땐 마마보이 같아”

송씨는 세종대 영화예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가 지금처럼 연극 연출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 건 학부 시절 오 시장과 연애를 하며 본 연극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사뮈엘 베케트의 희곡을 읽고 난 뒤 연극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했다고 한다.

“남편이랑 연애를 할 때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보러 간 적이 있어요. 작은 창고극장 안에 조명은 내리쬐고 사람은 꽉 들어차 앉아 있기가 힘들었어요. 나중에는 남편에게 기대 잠깐 졸기까지 했는데 박수 소리에 깼어요. 당시에는 뭐 이런 난해한 작품이 있나 싶었죠. 그런데 어느 날 도서관에서 노벨문학상 전집을 살펴보다가 거기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는 걸 봤어요. 그걸 읽고 나서부터 드라마라는 게 뭔가라는 궁금증을 갖게 됐고 제가 지금까지 몇 십 년을 연극계에 몸담게 되는 계기가 됐죠”

1983년 2월 고려대를 함께 졸업한 오세훈 시장 부부. 송씨는 7~8월 여름방학 동안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라는 작품을 연출해 서울 등 4개 지역에서 투어 공연을 했다. 마지막 투어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국립극장에서 가졌는데, 연극이 호평을 받아 내년 초 러시아 모스크바에 초청 공연을 가기로 했다는 소식도 전했다.

그는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로 ‘정치적’이라는 평가를 받아온 영국의 작가 헤럴드 핀터의 작품을 다뤘다. 그 이유를 묻자 송씨는 “전 삶이 결국 굉장히 철학적인 의미의 게임이라고 생각해요. 그건 단순히 사회주의적이냐 아니냐를 넘어 결국 인생과 인간의 본질적인 물음으로 돌아와요”라며 웃었다.

철학적 게임을 정치적 게임으로 바꿔 다시 물었다. “오 시장이 앞으로 더 큰 정치적 게임을 할 것으로 보냐”고 묻자 그는 “내일 일을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어요. 겸손을 배우면서 ‘절대’라는 표현은 되도록 자제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 제 감정을 말씀드리면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송씨가 오 시장을 처음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그룹 과외를 받는 자리에서다. 그는 한국 철조 조각의 1세대 작가로 알려진 고(故) 송영수 전 교수와 고려대 수학과 교수를 지낸 사공정숙씨 사이의 2남2녀 중 맏딸이다. 맞벌이 부모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어릴 적부터 종종 과외를 받았다. 반면 오 시장은 모친이 남대문시장에서 보따리 장사를 해 번 돈으로 대학 입시 본고사 준비를 위해 난생 처음 과외라는 걸 받게 됐다. 여기서 두 사람이 인연을 맺었지만 처음에는 서로가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는 않았다. ‘농땡이’를 치고 싶은 여고생과 하나라도 더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 똘똘 뭉친 남학생은 애초부터 그룹으로 묶이기 어려운 스타일이었다.

“당시 시어머니는 수예품을 갖고 남대문에서 보따리 장사를 하시다가 어렵게 한두 평짜리 가게를 얻으셨어요. 장사가 잘되자 아들을 좋은 대학에 보내야겠다면서 어렵게 번 돈으로 처음 과외를 시킨 거였어요. 그때 남편은 1분 1초가 얼마나 소중했겠어요. 그런데 저는 지독히 공부에 매달리는 세훈이와 공부를 같이 못하겠다고 버텼고 결국 세훈이가 그룹에서 떨어져 나갔어요. 그땐 남편이 마마보이로밖에 보이질 않았어요. 게다가 어딜 봐도 남편은 부잣집 아들처럼 보였거든요”

두 사람이 다시 재회한 건 1년 뒤 대입 본고사를 앞둔 시기였다. 본고사 대비를 위해 서울 중구 무교동 국어 고문학원에 간 송씨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다 깜짝 놀랐다. 25명 정원의 교실에 오 시장이 혼자 앉아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깜짝 놀랐죠. 거기서 세훈이랑 또 만나게 될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어요. 이게 운명의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을 그때 했죠”

대입시험에서 송씨는 고려대에 합격한 반면 오 시장은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후기였던 한국외국어대 법학과에 진학한 오 시장은 1년 뒤 송씨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해 처음으로 실시된 고려대 편입시험에 합격, 고려대 법대를 다니게 됐다.

송씨는 교육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오빠 상호씨는 경희대 교수로, 동생 상기씨는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는 상당히 자유분방한 편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딸들을 ‘방목’했을 정도라고 한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기 전부터 거의 평생 투잡(two job)을 하며 살았어요. 영어 과외, 번역, 비디오 편집을 하며 부모에게 용돈을 타 쓴 적이 없죠. 방목을 한 탓인지 딸들이 고교 재학시절 지각도 많이 했지만 잘 커줘서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큰딸 주원씨는 이화여대에서 뮤지컬을 전공하고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 딸 승원씨는 지난 8월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다.

“내조 못해… ‘빳빳한 배추’였대요”

송씨는 다른 정치인의 아내와 달리 도회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긴다. 이런 점이 남편의 정치에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을 법한데도 그는 자신의 모습을 억지로 바꾸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저는 억지로 나를 꾸며서 남에게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진실된 거라고 생각해요. 저나 남편은 성격이 정반대지만 늘 한결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는 점은 같아요. 남편으로서 또 정치인으로서 남편을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 시장은 거의 매일 된장찌개를 먹는다고 한다. 도회적 이미지의 송씨는 그래서 된장찌개만큼은 어디 내놔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솜씨라고 자랑했다.

“남편이 16대 국회의원일 때 한번은 다른 국회의원 사모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저를 보고 조금 놀라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평생을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살아왔다’고 제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정치인의 아내가 어떤 건지 한마디로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분 눈에 비친 저는 아마도 빳빳한 배추였을 겁니다”

송씨는 봉사활동을 비롯한 사회활동에 상당히 조심스럽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순수한 의도와 달리 정치적으로만 해석하고 활용하려는 사람들을 항상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그는 요즘도 소외된 학생들의 문화활동을 도우면서도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걸 꺼렸다. “과거 강남 소재 구룡마을에서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공부방을 운영한 적이 있었는데, 막무가내로 폐쇄된 적이 있어요.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두 패로 편이 갈린 모양이에요. 나중에 들었는데 한쪽에서 우리 구역에 국회의원 부인이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더 힘이 실리고 있다는 식으로 싸움이 일어났다더군요. 모든 게 내 마음 같지 않구나 하는 걸 느꼈죠”

지방선거 기간에 신고된 오 시장의 재산은 모두 56억원이다. 송씨는 특별히 재산 관리를 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저도 신문을 보고 우리 재산 규모를 알았어요. 남편은 부모님 재산까지 모두 신고했는데, 다른 분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친정 아버지가 조각가로서 교과서에 등장하실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던 분입니다. 이번에 재산 신고를 하면서 유작으로 남기신 작품까지 모두 감정을 해갔고 그 바람에 우리가 모르는 재산이 많이 불어났어요. 아버지 작품은 팔 생각도 없는데 말이죠”

송씨는 남편이 시장이 되고 나서 색다른 경험을 했다고도 털어놨다. “시장이 되고 나니까 왜 이리 도사님들이 많이 찾아오던지, 한참을 시달려야 했어요. 어떤 분은 찾아와 겁을 주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보시’를 하라고 몇 천만원을 요구하는 분도 계셨어요. 그때마다 ‘전 천주교 신자입니다’는 말을 반복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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