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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만 단독인터뷰] ① 아버지 박지만 아버지를 말하다

[박지만 단독인터뷰] ① 아버지 박지만 아버지를 말하다 [조인스]

2010.03.04 14:26 입력 / 2010.03.04 15:08 수정

“박정희 상암동 기념관 왜 대충짓나…위치도 재검토를
요즘 집에 가면 5살 아들 ‘목말’ 태워주느라 바쁘죠”

월간중앙 언론의 인터뷰를 꺼리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외아들 박지만 EG 회장이 최근 우연한 자리에서 <월간중앙>과 만났다. 자신과 관련한 이야기에는 언급을 회피하던 박 회장이 “서울 상암동에 건립 추진 중인 ‘박정희기념관’에 대해서는 유족으로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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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으로서의 모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아예 안 짓는 것이 낫습니다. 현재 구상 중인 아버지 기념관은 기념관인지, 시립도서관인지 실체도 불분명합니다. 유족의 입장에서는 기념관사업이 모양을 못 잡고 있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박지만(52) EG 회장. 그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1월28일 우연히 기자와 동석하게 된 식사자리에서였다. 기자가 이 자리에서 몇 년째 답보 상태에 있는 박 대통령 기념관에 대해 의견을 묻자 그는 처음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으려고 했다.

“아버지 기념관에 대해 유족이 어떤 입장을 밝히는 것이 모양에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현재 차기 대권주자 1순위에 있는 누나(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월간중앙>이 1년 전부터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번번이 거절하던 그였다. 다른 언론과도 그는 수년째 본격적인 인터뷰를 자제하던 상황이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했지만, 식사가 중간 정도 진행될 무렵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아버지 기념관에 대해서는 답답한 점이 많습니다. 다른 이야기들은 말고, 아버지 기념관 문제만 말하겠습니다.” 박 회장에게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거목 같은 존재였다. 그는 중앙고 1학년 재학 중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죽음을 경험하고, 육군사관학교 3학년(만 21세) 때 아버지마저 급작스럽게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맞이했을 당시 “내 방에 올라와 음악을 틀어놓고 혼자 울었다”고 말했던 그는 이후 비운의 대명사로 오랜 세월 고독과 좌절 속에서 방황했다. 그는 13년 전 모 월간지와 인터뷰에서 “사무실에 걸린 아버지 사진만 봐도 가슴이 뜨끔해 일부러 걸어 놓지 않았다.

아버지 뵙기가 부끄러워서였다. 아버지는 여전히 크고 두려운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2004년 평생 배필을 만나고 이듬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까지 얻으며 ‘평범한 가장’의 행복을 누리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부채감이 있는 듯 보였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안타깝다”

박정희기념관 추진은 1997년 12월5일 대선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의 구미 생가를 방문해 기념관 건축 공약을 언급한 데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인 1999년 7월19일 명예회장 김대중, 회장 신현확(현재는 김정렴 회장)으로 하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를 발족했다.

2001년 12월31일 기념사업회는 서울시와 상암동에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건립을 위한 부지 사용 협약’을 체결하고 2002년 1월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현재 기념관 건축은 진척이 없는 상태다. 정부에서 2001년 당시 ‘사업 추진이 부진하거나 기념회가 기부금을 조달하지 못하면 보조금 지원 결정을 전부 또는 일부 취소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인 것도 추진이 원활하게 되지 못한 이유 중 하나였다. 4년 동안 기념사업회 측의 모금액이 100억원 수준에 그치자 2005년 3월 노무현 정부 때 행자부가 보조금 지급 결정을 취소한 것.

이후 기념사업회는 정부를 상대로 ‘국고보조금취소처분 취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해 2007년 정부의 국고지원금사용금지처분이 부당하다는 대법원 판결이 났고, 최근 전경련의 추가 모금이 확정돼 사업 추진에 활기를 찾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올 초 사업자 입찰을 거쳐 내년 봄에는 완공을 목표로 기존 계획의 추진을 서두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부지나 기념관의 형태, 위상에 대해 박 회장은 아쉬운 점이 많아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기념관 사업을 수수방관하기에는 추진 과정에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다며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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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있는 박정희기념관 부지. 2002년 1월 공사 시작 이후 진척이 없는 상태다.

- 기념관 사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각종 여론조사에서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업적이 뛰어난 대통령을 묻는 질문에 아버지가 여전히 70% 이상을 차지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도, 노무현 대통령도 번듯한 기념관을 짓거나 계획 중인데 왜 역사적 평가를 받는 아버지 기념관이 홀대받는지 모르겠어요. 솔직히 너무 오래 하신 것은 저도 인정하지만… 아버지가 국가경제 발전에 기여하신 점은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추진 중인 기념관은 명칭도 ‘기념관’이 아니라 ‘기념·도서관’으로 하려다 ‘기념도서관’으로 됐고, 20년 후 서울시에 기부체납하도록 돼 있습니다. 결국 이 건물의 위상과 내용은 기념관이 아니라 시립도서관인 것입니다. 위상정립조차 제대로 안 돼 있다는 것이 문제의 시작입니다.”

- 전시관의 위치나 규모는 어떻습니까?

“상암동 부지에 한번 가보세요. 저도 최근 직접 눈으로 보고 왔는데 더욱 답답해졌습니다. 전체 건평은 5000여m2(1600평)에 달하지만 부대시설이 대부분이고, 도서관 1350m2(450평)에 전시실은 1000여m2(360평)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방대한 자료 중 중요한 것만이라도 전시할 수 있는 기념관의 역할을 기대하기에는 너무 협소합니다.

특히 상암동이라는 위치나 성격상 도서관 이용이 인근 주민과 학생들에 국한될 수밖에 없어 효과도 미미할 것이 뻔합니다. 이왕 지을 것이라면 제대로 된 기념관을 짓고 부대시설로 아버지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특색 있는 도서관을 운영해야만 의미도 살고 활용도도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박정희기념관 부지는 상암동의 중심인 DMC단지 남쪽 대로 건너편 월드컵아파트단지 뒷동산(근린공원) 반대편 모서리에 있다. 부지 정면에 대로가 있고, 건너편에는 하천과 난지도 쓰레기동산으로 조성된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좌우로 서 있다. 그 가운데 쓰레기 침출수의 가스를 이용하는 발전소가 흰 연기를 내뿜으며 정면으로 맞서 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 기념관의 의미를 어디에 두십니까?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많습니다. 새마을운동을 비롯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만든 여러 가지 노하우를 국가적으로 샘플을 만들어 외국인들도 벤치마킹하고 얼마나 좋습니까? 단순히 역대 대통령의 기념관을 짓는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국가 브랜드로 활용하자는 말입니다. 소홀히 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거죠.”

10·26 30주년을 맞은 지난해 국내에서는 박정희 재조명이 활발하게 일었다. 반면 민족문제연구소에서는 <친일인명사전>에 박정희 대통령 이름을 등재해 논란이 일었다. 박 회장이 즉각 취소처분을 냈지만 기각됐다. 이처럼 국내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유족으로서는 이 문제가 불거져나올 때마다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아직도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으시겠죠?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다 할 수야 있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너무 많아 안타깝습니다. 1970년대 금지곡도 아버지가 명령해서 지정된 것이 아닙니다. 밑에 있던 사람들이 알아서 만든 거죠. 할 일 많은 대통령이 어떻게 금지곡까지 일일이 지정하며 신경 썼겠어요?

양희은의 <아침이슬>도 금지곡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저는 그 노래를 무척 좋아해 청와대에서 기타를 치며 가끔 부르고는 했어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제게 그 노래는 금지곡이니 부르지 말라고 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글 박미숙 월간중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