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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전문가

[문화칼럼] 대중문화, 저항의 플랫폼을 바꾸자 / 탁현민

[문화칼럼] 대중문화, 저항의 플랫폼을 바꾸자 / 탁현민
한겨레
» 탁현민 공연연출가
대중문화평론가나 공연연출가의 타이틀을 쓰면서부터 간혹 방송사로부터 섭외가 들어온다. 대중음악이나 대중문화 이슈에 대한 코멘트를 부탁하거나 짤막한 인터뷰를 요청하거나 대중문화와 관련한 프로그램의 꼭지를 부탁하는 것인데, 언제부턴가 이런 전화가 오면 꼭 ‘괜찮겠는지’를 묻게 된다.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주목받지도 못하는 처지에서 스스로 민망하면서도 굳이 이렇게 되묻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물었을 때 더이상 연락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도 <한국방송>(KBS) 어느 지방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프로그램 꼭지를 부탁하기에 다시 한번 정중하게 ‘괜찮겠는지’를 묻고 나서 ‘괜찮다’는 대답을 듣고서야 하기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뒤늦게 ‘죄송하다’는 말을 들었다. 썩 좋은 기분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이런 일을 몇 차례 겪고 나니 차라리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나를 출연시키려고 노력했던 그 프로듀서에게 위로를 건넬 정도로 맷집도 좋아졌다. 같은 날, 지난 6·2 지방선거에서 선거참여를 권유했던 것에 대해, 가늠하기 어려운 풍부한 상상력으로 선거법 위반을 운운하는 선관위의 지적도 이젠 뭐 그런가 보다, 아니 그러든지 어쩌든지 하는 심정이다. 황당하지만 충분히 예상되는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미 이 정부 들어 ‘징하도록’ 있어왔던 일이다. 한국방송과 소송중인 코미디언 김미화씨를 비롯해 적지 않은 사람이 이런 ‘꼴’을 당했거나 당하고 있다. 체제에 저항적인 대중예술인이 미디어로부터 격리되는 상황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저항의 의도가 보이지 않더라도 그의 태도가 비판적이거나 친정부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죽어도 없다는) 출연금지 리스트에 등재되는 것 역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이 황당한 현실은 결코 쉽사리 바뀌지 않을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러니 이제 더이상 이 정부와 방송사에 혹은 권력에, 왜 저항적인 예술인과 정상적이고 건강하게 사회를 비판하는 대중예술인들을 탄압하느냐고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다. 떠들어봐야 입만 아픈 일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으나 분명하다. 방송이라는 플랫폼을 벗어나 새로운 플랫폼에서 다양한 문화콘텐츠들이 만들어져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다양한 툴이 만들어져 있고, 또 만들 수도 있고, 매스미디어 이전부터 존재하던 방식들을 선택할 수도 있다. 그런 플랫폼에서 가능한 문화콘텐츠가 무엇일지 고민하며 생산해내고 또 소비하는 대중들이 만날 수만 있다면 결국 이 힘이 작금의 문제까지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언젠가 그런 방법 중의 하나로 하차당한 김제동쇼에 미련을 버리고(아마 미련도 없었겠지만) 인터넷판 김제동쇼를 만들어 송출이 가능한 여러 사이트에 무료로 서비스하는 것을 제안한 적이 있다. 잘만 만든다면 온라인에서의 시청률이 공중파 방송에 근접할 수도 있고 그렇게만 된다면 충분히 광고효과가 있는 프로그램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중예술의 저항성이란 다만 내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기반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실험이 더 분명하게 ‘저항적’일 수도 있다. 방송사 순위프로그램에서 라이브콘서트로, 드라마에서 연극으로, 예능프로그램에서 트위터나 블로그로의 이동도 다만 현실에 대한 자조와 비난보다 효과적인 문화적 저항이라는 생각을 해봤으면 싶다.

탁현민 공연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