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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아에겐 한국춤의 DNA가 흐른다

연아에겐 한국춤의 DNA가 흐른다

2010.02.28 11:29 입력

007 주제가의 긴박함과 거슈윈의 장중한 선율을 타고 날다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피겨스케이팅은 스포츠다. 올림픽 메달이 걸린 운동 경기다. 그리고 동시에 예술이다. 음악이 있고, 구성이 있고, 연기가 있고, 감동이 있다. 지난 한 주 우리는 피겨스케이팅의 예술성에 흠뻑 빠져들었다. 꼭 금메달이어서 벅찬 것만은 아니었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을 김연아가 만들어줬다. ‘선수’가 아닌 ‘댄서’로서의 김연아. 그 아름다움의 비밀은 뭘까. 현대무용ㆍ한국무용ㆍ발레 등 춤 전문가들에게 들어봤다. 도움말=이지현(무용평론가)ㆍ안성수(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교수)ㆍ진옥섭(KOUS 예술감독)ㆍ제임스 전(서울발레시어터 상임안무가)




삼분박과 완급…한국무용의 DNA
김연아에게는 우리나라 춤꾼의 DNA가 있다. ‘삼분박’ 감각을 타고났고, 뛰어난 완급 조절 능력을 가졌다. ‘삼분박’은 한 박자가 세 개로 나눠지는 리듬을 말한다. 예를 들어 4박자인 굿거리 장단의 경우, 단순한 ‘하나 둘 셋 넷’이 아니라 ‘하나아 두우울 세에엣 네에엣’ 박자를 따른다. 계단식 디지털 리듬이 아니라 곡선형 아날로그 리듬인 셈이다. 촘촘하고 섬세한 감정 표현에 유리할 수밖에 없다. 반면 일본의 전통 음악 은 ‘2박’ 리듬이 중심이다. ‘하나 둘 하나 둘’ 식으로 박자가 연결된다. 군무를 맞출 때는 유리하지만 춤꾼 개인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기엔 불리한 박자다.

김연아의 동작에는 삼분박이 들어 있다. 스케이팅이란 서구적인 몸짓을 아날로그 곡선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한국춤을 현대화시킨 듯한 독특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완급 조절도 우리나라 춤의 특징이다. 한국춤의 세계에선 쥐었다 풀었다를 잘해야 뛰어난 춤꾼 소리를 듣는다. 속도의 완급, 강도의 완급이 필요하다.

김연아는 완급 조절 능력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고 있다. 다른 선수들은 스피디한 동작을 보여줄 때 마냥 속도를 낸다. 팔다리가 정신 없이 바쁘다. 그래서 정확한 느낌의 동작으로 인지시키지 못한 채 막 흘러간다. 조였다 풀었다는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연아는 관중들이 각 동작의 미세한 맛을 다 느낄 수 있도록 자신이 흘릴 부분과 잡아챌 부분을 호흡 조절을 해 보여준다. 관중들 역시 김연아의 호흡을 따라가면서 동작 하나 하나를 즐길 수 있다. 김연아의 연기는 굉장히 빠르지만 그 속에 여유가 있다. 조였다 풀어주는 부분에서 생기는 여유다.

기둥을 가진 몸+기둥이 필요한 몸
무용수의 몸은 두 종류로 나뉜다. 기둥을 갖고 있는 몸과 기둥이 필요한 몸이다. 김연아는 이 두 가지 몸의 요소를 다 갖고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무용수다.기둥을 갖고 있는 몸이란 요추와 골반을 보호해 주는 근육 뭉치가 선천적으로 발달한 몸이다. 이런 몸을 갖고 있는 무용수는 강인한 체력이 뒷받침돼 돌기와 뛰기를 잘할 수 있다. 마치 속이 딱딱하게 차 있는 삶은 달걀이 날달걀보다 훨씬 잘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공중에서 세 바퀴나 돌아야 하는 트리플 러츠ㆍ트리플 플립 등의 점프를 해내려면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다. 기둥이 있는 몸이라야 점프 도중 허리가 꺾이는 걸 잡아줄 수 있다. 하지만 몸을 늘려 유연한 표현을 하기에 기둥이 있는 몸은 불리하다. 동작이 딱딱해 보이기 십상이다.

반면 기둥이 없는 몸, 그래서 기둥이 필요한 몸은 유연성이 뛰어나다. 뼈와 뼈 사이가 늘어날 여지가 많아서다. 음악과 안무의 조화, 호흡과 몸의 힘 조절 등 무용적인 요소를 제대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기둥이 필요한 몸이 유리하다. 김연아가 난도 높은 점프를 완벽하게 소화하면서도 가늘고 예쁜 춤사위를 펼칠 수 있는 이유는 몸 자체가 두 요소를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선도 무용수로 타고났다. 목부터 손끝까지 하나의 선으로 조화롭게 이어진다. 무용수 중에는 어깨가 약간 봉긋해, 손가락 모양이 눈에 튀어서 등의 이유로 동작이 어색해 보이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그런 면에서 김연아는 신체적으로 굉장히 좋은 유전자를 갖고 있는 셈이다.

김연아의 유연성을 키우는 데는 발레도 한몫했다. 김연아는 캐나다 출신의 세계적인 발레리나 이블린 하트에게서 발레를 정식으로 배웠다. 그래서인지 김연아 연기 속에는 발레의 흔적도 보인다. 특히 상체를 앞으로 숙이면서 한쪽 다리를 들고 균형을 잡으며 은반 위를 미끄러지는 ‘스파이럴’은 발레의 ‘아라베스크’와 닮은꼴이다. 발레의 우아한 몸사위에 스케이팅의 속도감을 더해 전체적으로 시원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음악을 눈으로 보는 듯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스케이팅 모두 세계신기록을 세운 김연아의 연기는 음악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마치 음악을 눈으로 보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한 무대였다. 음악적인 해석이 탁월한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의 공이다.쇼트 프로그램인 ‘007 제임스 본드 메들리’는 첫 시작부터 김연아의 농염한 연기를 보여줬다. 음악의 절묘한 타이밍에 다리를 열며 미끌어지는 동작을 넣어 시각적인 자극을 이끌어낸 것이다. 또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루프 콤비네이션도 음악의 포인트와 맞춰 했다. 점프를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착지까지 안정되게 만드는 장치다. 악셀 점프의 경우는 착지에서부터 음악이 한 호흡으로 이어져 장면 전환이 세련되게 표현됐다.

춤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음악의 형상화는 쇼트 프로그램, 프리 스케이팅 모두 스파이럴 시퀀스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났다. 가장 환상적인 이미지의 음악이 흐를 때 김연아는 스파이럴 시퀀스를 우아하게 보여줬다. 또 각 음악의 메인 주제에서 펼쳐진 스텝 연기는 동작과 동작이 끊기지 않고 연결되는 오버래핑 기법을 사용해 움직임이 세련되고 다이내믹하게 보였다.음악 선택도 탁월했다. 007 본드걸 이미지는 김연아의 귀여운 소녀 이미지에 매혹적인 여성미를 가미시키는 효과를 줬다. 음악의 메들리 구성 자체도 굴곡과 이완과 박진감이 적절히 배치돼 완결성과 통일성을 갖고 있다.

또 프리 스케이팅 음악인 조지 거슈윈의 피아노 협주곡 F장조 역시 곡 하나 안에 다양한 국면이 적절히 배치돼 있어 스케이팅 안무와 결합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음악 자체의 스케일이 크고 악기 구성도 다양해 김연아의 우아함과 섬세한 음악성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데 효과적인 배경이 됐다.

She Enjoys it!
김연아는 올림픽 무대를 즐겼다. 금메달을 기대하는 국민들에 대한 부담감도, 트리플 악셀을 연방 성공시키며 역전을 장담하는 라이벌의 위협도, 일단 무대에 오른 뒤엔 잊었다. 음악에 도취해 스스로 춤을 즐겼다. 최고 예술의 경지다.편안한 마음은 이완된 몸으로 표현됐다. 특히 상체는 완벽하게 풀렸다. 내면의 연기가 얼굴 표정으로 드러났고, 그 기운이 이완된 어깨와 팔을 따라 확 흘러 동작으로 표현되면서 아름다움이 증폭됐다. 유연한 팔의 움직임은 고난도 점프를 한 직후에도 연기가 끊기지 않고 이어지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무용수에게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기대할 수 없다. 대부분의 피겨스케이팅 선수들이 상체의 힘을 빼지 못해 답답한 연기를 펼친다.

다양한 표정도 연기 자체를 즐기는 김연아의 내공에서 나왔다. 김연아가 만드는 표정은 그저 예쁘기만 한 게 아니다. 동작마다 그에 어울리는 표정이 따라왔다. 마치 스틸 사진을 연결시켜 놓은 듯 각각 다른 맛의 표정이다. 이는 보는 사람을 김연아에게 빨려 들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하다. 김연아의 기술이나 연기를 보는 게 아니라 김연아 자체를 사랑스럽게 보도록 만드는 힘. 그렇게 김연아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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