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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드라마

'동이'를 보다가 '미실'이 그리워진 이유

[Post 9, 2010/07/26 10:32, 권경률의 중화탐구/드라마 in 정치]

"이 드라마는 80% 이상이 작가와 제작진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이다. 지나치게 역사적 사실과 드라마 내용을 합쳐서 볼 필요는 없지 않겠나?"

드라마 “동이”의 이병훈 감독이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렇다. 사극 역시 드라마일 뿐이다. 세세한 역사적 사실에 얽매이다 보면 극적 상상력에 제약을 받기 마련이다. 다만, 사극이기에 견지해야 할 최소한의 원칙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대표적으로 주요 캐릭터의 설정이 ‘역사적 대의’를 거슬러서는 곤란하다. ‘역사 속의 개인’으로서 감정이입을 원하는 시청자들이 혼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 그립다

사실 드라마 “동이”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삼는 순간 조선 후기 당쟁의 한 가운데로 뛰어든 셈이다. 이 여인은 ‘허준’이나 ‘대장금’처럼 정치색이 옅은 인물이 아니다. 천민 출신 후궁의 ‘입지전’이야 주목할 만하지만 함부로 미화하기에는 여러 모로 위험하다. 음모와 거짓말,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갑술환국 이후 수많은 남인 대부와 선비들이 숙빈 최씨의 고변으로 목숨을 잃었다. 물론 이 고변은 권좌에서 밀려나 호시탐탐 복권을 노리던 서인들이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장희빈이 자신의 힘으로 후궁 자리에 오른 다음 남인과 손을 잡았다면, 숙빈 최씨는 처음부터 서인의 용의주도한 음모 속에서 왕의 여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숙빈 최씨를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끌고 간다는 말은 본의 아니게 이러한 그릇된 결탁을 정당화할 위험성이 있다. 더군다나 왜란과 호란 이후 처참해진 백성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성리학적 이상을 좇던 서인까지 ‘우리 편’으로 삼아야 한다니…. 아무리 창작으로 보려고 해도 생각을 죽이지 않는 이상 심히 부대끼는 드라마가 바로 “동이”다.


최근 “동이”에서는 국경 수비일지인 ‘등록유초’를 청국에 넘기는 문제로 장희빈(이소연)과 동이(한효주)가 한 판 대회전을 치렀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던 장희빈의 측근들이 동이와 심운택의 기지에 넘어가 몽땅 잡히고 만다. 바야흐로 장희빈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다. 헌데 이 대목이 찝찝한 이유가 뭘까?

제작진은 그동안 틈 날 때마다 “동이”에 등장하는 장희빈이 예전과 달리 전형적 악녀 이미지를 탈피할 것이라고 공언해왔다. 그렇다면 장희빈은 “선덕여왕”의 미실처럼 명분을 움켜쥐고 카리스마 있게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악역 말이다. 그런데 지금 “동이”에 나오는 장희빈은 아들의 왕권계승을 확인받기 위해 군사기밀을 유출하려다가 어설픈 함정에 빠진다. 캐릭터의 격도, 드라마적 개연성도 떨어진다.

‘역사 안목’ 결여된 역사드라마, “동이”

사극은 말 그대로 ‘역사드라마’다. ‘창작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역사에 대한 안목’이 성패를 좌우한다. 드라마 “동이”에 결핍된 요소가 바로 이것이다. 역사드라마로서 ‘앙꼬 없는 찐빵’ 같은 느낌이다. 퓨전사극이라서 그렇다고? 비겁한 변명일 뿐이다. 그렇다면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숙종 대를 피했어야 옳다.

‘등록유초’를 넘기려다 덜미를 잡히는 대목만 해도 그렇다. 장희빈과 그녀의 오라비, 그리고 남인들이 왜 그래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이 안 되니 덜떨어져 보일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스스로 반감시켜버렸다. 만약 장희빈의 집안배경과 각 붕당의 정치사상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좀 더 개연성 있는 전개가 가능하지 않았을까?


장희빈은 역관집안 출신이다. 그녀의 집안은 청과의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고 이를 남인의 정치자금으로 제공했다. 따라서 장희빈은 이미 멸망해버린 명나라보다는 욱일승천하는 청나라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고자 했을 것이다. 그것이 전란에 지친 백성들을 위해 국모로서 자신이 해야 할 소임이라 여겼을 것이다.

반면 숙빈 최씨를 앞세운 서인들은 ‘남북 오랑캐(왜와 여진)’에 의해 흔들린 동북아의 중화질서를 (망한 명나라를 대신하여) 조선이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임금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상기시키며 북벌을 주청하는가 하면(북벌론), 명나라 황제를 기리는 제단을 만들어 동북아 질서의 새로운 중심을 자처했다(존주론).

따라서 ‘등록유초’를 둘러싼 에피소드 역시 단순히 세자고명을 위해 군사기밀을 유출한 문제로 치부해서는 역사드라마의 미덕을 발휘하기 어렵다. ‘등록유초’에는 청나라에 대한 군사적 조치들이 담겨 있다. 청나라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백성의 삶을 돌보자는 초기 개국론과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 국가적 자부심을 세우자는 북벌론, 존주론이 대립각을 세울 수 있는 훌륭한 소재 아닌가?

드라마 “동이”가 앞으로도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좀 더 치열한 역사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겠다. 역사적 사실 이면의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는 안목이 절실하다. 그래야만 미실처럼 카리스마 있게 안방극장을 휘어잡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있다. 동이와 장희빈, 지금의 그녀들은 왠지 설득력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