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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폰, 눈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

아이폰, 눈보다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

한겨레 | 입력 2010.02.06 21:10  

 
[한겨레] [매거진 esc] 심리학·인류학 등과 결합해 정서적 영역 파고들어가는 디자인 흐름…

디자인 통한 삶의 질 개선에 주목

디자인은 항상 웃고 있다. 잘 빠진 곡선이나 세련된 광택을 뽐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제법 놀 줄 아는 날라리'랄까.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 웃음 뒤에는 느끼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배려하는 디자인의 또다른 얼굴이 있다. 지금의 디자인은 시각적인 만족감을 주는 데에서 만족하지 않고, 정서적 만족감과 정신적 풍요로움, 좀더 나은 삶의 가치를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정서적 만족감은 디자인이 종이 위에 선을 그리는 그림의 영역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을 만날 때 비로소 실현된다. 요즘 디자인이 심리학, 인류학, 사회학, 문학, 공학 등의 학문과 어깨를 나란히 한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국내 대기업 연구소에도 디자인 비전공자 늘어

디자인과 심리학·인류학 등 여러 학문의 결합은 이미 외국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학문간의 통섭이나 교류에 폐쇄적인 편인 국내에서는 아직 익숙지 않다. 그중에서 디자인이 적극적으로 손을 내미는 학문은 심리학이다. 디자인과 심리학 분야에 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는 한성대 미디어디자인콘텐츠학부 지상현 교수는 "디자인 심리학이 적극적으로 다뤄지는 기업·제품 마케팅 영역에서는 '어떻게 하면 소비자의 구매욕구를 자극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을까'가 가장 대표적인 디자인 심리학적 접근"이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향수를 자극하는 복고풍' 콘셉트의 마케팅 전략이 있다면, 심리학은 왜 사람들이 복고풍에 반응하며 어떤 색상과 형태가 이런 심리상태를 가장 잘 잡아낼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제안을 통해 실제 이를 시각적으로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과 사람들의 심리 요인을 디자인 콘셉트로 파악해 효과적인 디자인 전략을 짜는 게 가능해진다.

사람과 컴퓨터의 상호작용을 뜻하는 휴먼-컴퓨터 인터페이스(HCI) 분야는 디자인 심리학적 접근이 가장 잘 이뤄지는 분야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애플사의 아이폰이다. 지 교수는 "아이폰의 인터페이스는 작은 아이콘 하나부터 경험적으로 사용자들의 행동과 심리를 연구하고 파악해 전략적으로 디자인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폰의 세련된 외관 디자인과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내부 인터페이스 영역은 디자이너와 심리학자, 인류학자, 공학자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결과라는 얘기다. 국내에서도 엘지전자나 삼성전자 등 대기업의 디자인연구소에는 디자이너와 심리학자, 인문학자, 사회학자 등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진 이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 엘지전자 디자인연구소의 경우, 전체 직원 500명 중 10%는 디자인이 주전공이 아닌 이들이다. 엘지전자 디자인연구소는 "휴대전화와 생활가전 등의 분야에서 소비자의 생활을 연구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이나 시장의 트렌드를 분석해 제품 콘셉트를 발굴하고 새로운 사업 방향을 제안해 주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라고 밝혔다.

기업·제품의 마케팅적 접근이 디자인 심리학의 전부는 아니다. 실제 디자인 심리학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더 나은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진정성과 믿음이 담긴 디자인의 영역이다. 심리학에서도 노인심리학이나 지각심리학은 노인들의 편리한 삶을 디자인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지 교수는 "낙상에 대한 두려움을 늘 안고 사는 노인의 행동과 시선에 맞춘 화장실 디자인이나 안내판의 위치와 표시 방법 등이 예가 될 수 있다"며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인간을 배려할 줄 아는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신뢰감과 정서적 만족감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덴마크의 비영리기구 '인덱스'는 매년 디자인 상인 '인덱스 어워드'를 개최한다. 우리의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한 디자인을 선정해 상을 수여한다. 수상작을 보면 디자인 심리학이나 디자인 인류학, 디자인 사회학 등 확장된 디자인이 어떤 구실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덴마크 '이-타입스'가 디자인한 '의약품 안전 분류 라벨'은 병원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투약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디자인됐다. 바쁜 병원에서 혹시나 있을지 모를 투약 실수에 대한 의료진의 스트레스와 혹시 잘못된 약을 먹은 건 아닐까 고민하는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춘 디자인이다.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노인 만성환자들을 위해 미국의 디자이너 빈센트 버클리 첸이 디자인한 개인별 맞춤 투약 기구 '필 타임' 역시 약 먹을 시간을 잊거나 약을 먹었는지를 잊곤 하는 노인들의 행동과 심리를 디자인에 반영했다.

디자인이 생명과 지구를 살린다

물 부족 지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휴대용 정수기 '라이프 스트로'나 이산화탄소 등으로 모기를 유인하고 램프가 등유를 살포해 모기를 퇴치하는 말라리아모기 퇴치 램프 '말라리아 머스트 고' 등은 디자이너가 좀더 나은 지구를 만드는 데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성이나 어린이, 장애인까지 간편하게 목에 걸면 되는 휴대형 목걸이로 디자인된 라이프 스트로는 박테리아와 기생충을 제거할 수 있고, 별도의 전지 없이도 1년에 700ℓ의 물을 정수할 수 있다. 덴마크 디자이너의 작품이다. 영국의 디자이너 케이티와 앤드루는 말라리아모기 퇴치 램프를 디자인하기 위해 아프리카 탄자니아를 방문해 말라리아 현황을 자세하게 파악했다. 또 이 램프가 개발도상국에 미치는 사회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디자인은 심리학과 인류학, 사회학, 인문학을 만나 그 활동의 폭을 무한대로 넓히는 중이다. 디자인은 우리가 더 편리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갖고 싶은 것을 눈앞에 그려주고, 더 나은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을 만들어준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 학문간 '만남의 광장'을 지나 고속도로로 들어선 국내 디자인계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아무도 모르니까.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참고자료 < 디자인?! > (백종원 지음, 한국디자인진흥원 펴냄), < 인덱스: 더 나은 삶을 위한 디자인 > (디자인플러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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