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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M, 기업 분석 자료

우리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아본다(4) CDMA 상용화로 시작된 대한민국 ‘IT혁명’

우리 과학기술의 역사를 돌아본다 (4) CDMA 상용화로 시작된 대한민국 ‘IT혁명’ 2010년 04월 22일(목)

1967년 4월, 정부는 과학기술처 설립을 기념해 21일을 ‘과학의 날’로 선포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21일을 전후해 일주일간 이어지는‘과학주간’을 맞아, 세계 정상을 향해 치달아온 한국 과학기술의 역사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註]

'과학의 달' 특집 1990년 12월 18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13대 과기처장관으로 임명된 언론인 출신 김진현 씨는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과학기술진흥회의를 통해 “오는 2000년까지 과학기술 선진 7개국에 진입하겠다”는 당찬 계획을 내놓는다.

계획 중에는 △1996년까지 일반 회계, 정부투자기관 배당금, 과학기술복권 수익금 등을 모아 1조원 규모의 과학기술진흥기금을 조성하고 △1991년부터 반도체, HDTV, ISDN 등 14개 핵심선도기술 개발을 본격 추진하고 △인력양성을 위해 KIAST 학사과정 정원을 1996년까지 1천 명으로 늘리고 △과학올림피아드위원회를 만들어 과학영재교육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이른바 ‘G7 프로젝트’였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14개 핵심선도 기술이다. 정부는 전국 기업인, 대학교수, 연구원 등 총 43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7개 ‘제품기술개발 과제’와 7개 ‘기반기술 과제’를 선정했다.

7개 제품기술개발 과제에는 초고집적반도체, 광대역 종합정보통신망(ISDN), 고선명 TV(HDTV), 전기자동차, 인공지능컴퓨터, 신의약·신농약, 첨단 생산시스템이 포함됐다.

이어 7개 기반기술개발 과제에는 정보·전자·에너지 첨단소재, 환경공학, 신기능 생물소재, 차세대 수송기계·부품, 차세대 원자로, 신에너지, 감성공학이 포함됐다.

정보통신부 탄생 등... IT 발전 가속화

그러나 엄청난 예산이 투입되는 매머드 프로젝트인 만큼 논란이 없을 수 없었다. 과학기술계 각 분야에서 의견과 불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이 논란은 노태우 정부에 이어 집권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대에도 계속 이어진다.

▲ CDMA 연구개발을 총괄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이에 따라 김시중 14대 과기처장관은 그동안 표출됐던 의견을 수렴, 11개 기술개발 사업을 확정한다. 여기에는 △초고집적 반도체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ISDN) △고선명 TV(HDTV) △신의약·신농약 △첨단 생산시스템 △정보·전자·에너지 첨단소재 기술 △차세대 자동차기술 △신기능 생물소재 기술 △환경공학 기술 △신에너지 기술 △차세대 원자로 기술이 포함돼 있었다.

주목할 점은 IT였다. 인공지능컴퓨터와 감성공학이 최종 선정과정에서 탈락했지만 초고집적 반도체, 광대역종합정보통신망, 고선명 TV 등이 핵심 과제로 선정됐고, 정보·전자·에너지 첨단소재 기술, 차세대 자동차기술, 차세대 원자로 기술 등 대부분의 과제들이 IT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는 1994년 12월 23일 ‘정보통신부’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국회를 통과한 정부조직법은 정보통신부로 하여금 정보통신정책, 우편사업, 전파방송관리, 체신금융, 정보통신 지원 및 협력에 관한 연구 등 그동안 상공자원부, 과학기술처, 체신부 등에서 관장해온 업무를 종합적으로 관장토록 했다.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책으로부터 탄력을 받은 IT 산업은 이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게 된다. ‘IT산업의 쌀’이라 불리는 반도체 분야에서 특히 그 성과가 두드러졌다. 1991년 3월 0.5~0.6 마이크론 선폭의 16M DRAM의 시제품 개발이 이루어졌다.

속도가 빨라진 반도체 개발은 1992년 11월 0.4 마이크론 선폭, 칩 크기 210mm2 수준의 64M DRAM을 개발함으로써 마침내 미국, 일본과 대등한 수준에 도달했다.

반도체 기술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한편에서는 세계를 놀라게 할 통신망 기술이 개발되고 있었다. CDMA 즉 부호분할다중접속(code division multiple Access)이다. CDMA는 스펙트럼 확산 방식을 통해 여러 사용자가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무선통신을 말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한국은 IT 후진국이었다. 그러나 급속히 늘어나고 있는 이동통신의 수요는 정부로 하여금 디지털 무선통신 중심이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의 시스템 개발을 디지털 이동통신 쪽으로 확대하는 계기가 됐다.

CDMA 상용화로 마침내 ‘IT 강국’ 부상

연구개발을 지휘한 ETRI는 개발 초기 CDMA보다는 유럽형 TDMA(시분할 다중접속, Time Division Multiple Access) 방식인 GSM(Global System for Mobile Communications) 개발을 검토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GSM이란 사용자에게는 휴대전화의 교체 없이 로밍을 제공하고, 사업자에게는 제조사가 다르더라도 통신 장비를 구축할 수 있는 기술을 말한다. 그러나 정부는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CDMA 방식을 선택했다.

▲ 1996년 1월 CDMA 개통식 장면. 한국이 IT강국으로 올라서는 순간이었다. 

당시 TDMA 기술은 많은 해외업체들이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 이를 좇아가야 하고, 또한 기술 종속의 위험성이 있었다. 그러나 CDMA는 채널 수용역량을 한층 높일 수 있는 데다 퀄컴(Qualcomm) 사만이 그 기술을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어, 이를 택할 경우 선진국들과의 기술격차를 줄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ETRI는 1991년 4월부터 퀄컴사와 시스템 정의, 이동통신 시스템, 생산 전단계 기술개발을 포함하는 3단계의 CDMA 디지털셀룰러 시스템 공동기술 개발협약을 체결했다. 교환기술은 이미 개발된 TDX-10을 기반으로 하고, CDMA 핵심기술 등 부족한 무선기술을 퀄컴사 기술을 활용하자는 의도였다.

이 계획은 1997년 상용화를 목표로 진행됐다. 한국이동통신 부설 이동통신기술개발사업단 단장이었던 서정욱 씨는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서 “상용화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구심이 외부는 물론 내부에까지 제기되고 있었던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초조한 가운데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졌다.

CDMA 상용화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연구가 이어졌다. 그리고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친 후인 1996년 1월1일 인천과 부천 지역에 세계 최초의 CDMA 서비스가 선보였다. IT 약소국이었던 한국이 전 세계의 IT 강국임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이후 기존 CDMA 시스템을 이용한 응용 시스템 개발이 계속 이어졌다. 1.8 GHz 대역에서 PCS 시스템 개발 및 상용화가 이루어진데 이어 1997년부터는 북미 방식인 동기식(CDMA-2000)과 유럽 및 일본이 주도해온 비동기식(W-CDMA)의 복수 표준으로 나누어, 2.3 GHz 대역을 사용하는 IMT-2000 시스템을 단계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2000년 12월에는 KT 아이컴과 SK IMT가 비동기식 사업자로 선정됐으며, 2001년 7월에는 LG 텔레콤 컨소시움이 동기식 사업자로 각각 선정돼, 국내 통신시장은 3개의 유·무선 종합통신사업자 간의 경쟁체제로 전환되는 기반을 마련했다.

휴대폰과 시스템 개발도 이어져 2006년에는 세계 3위의 이동통신 단말기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세계는 한국의 IT 산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각국 언론은 한국의 상황을 ‘대한민국의 IT혁명’이라고 호칭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4.2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