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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바뀌고 있다

[Weekly BIZ]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바뀌고 있다

  • 이남우 메릴린치증권 전무 (亞ㆍ太본부 고객관리 총괄)

입력 : 2010.03.20 03:39

美·日·EU 재정적자로 '뉴 貧國'韓·中 등 재정 튼튼한 '뉴 富國'MS·애플 등 수십兆 은행 예치기업이 훨씬 부유한 시대 도래

작년부터 베이징 국제공항 귀빈실은 발디딜 틈이 없다. 해외 출장을 가는 중국 고위 인사도 늘었지만,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으로 부상한 중국에 투자나 차관을 요청하기 위해 방문하는 외국 사절이 줄을 잇기 때문이다.

국가 부도사태에 직면한 그리스 고위 당국자도 얼마전 베이징을 다녀갔지만, 중국 당국이 난색을 표명하는 바람에 빈손으로 돌아갔다. 세계 최대 큰 손으로 부상한 중국에 자금 지원을 부탁하는 나라는 아직 아프리카·남미 등 후진국이 대부분이지만, 조만간 과도한 정부 빚에 휘청대는 선진국 각료들도 베이징공항 귀빈실 출입이 잦아질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시작된 금융위기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통념을 완전히 바꾸고 있다.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고자 대규모 공적자금을 투입한 G7 국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는 2008년 89%에서 2014년 119% 수준으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국가들의 GDP 대비 정부 부채는 2008년 35%에서 2014년 32%로 개선될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부양을 위한 적극적 재정 집행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일본은 GDP 대비 정부부채가 86%였던 15년 전부터 부채가 과도하다는 경고를 받아왔다. 하지만 막상 경제정책은 정치 논리에 휘둘려 재정적자가 줄어들기는 커녕 더 급증해 이 비율이 유례없는 227% 수준까지 급증했다. 최근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앞다퉈 일본 국가 신용등급을 최상급에서 하향시킬 수 있음을 경고하고 나선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국제금융시장에서 '달러 폭락'은 자주 언급되는 단골 메뉴지만,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상황은 일본보다는 양호하다. 작년에 GDP 대비 10%의 재정적자, 올해 8%의 적자를 기록해도 누적 재정적자는 GDP의 84% 수준이다.

물론 월가의 비관론자들은 미국이 일본처럼 저성장의 함정에 빠지면 금리가 폭등하고 국가 채무는 걷잡을 수 없이 증가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굳이 비관론자의 전망을 인용하지 않아도 경제 회복이 완만한 수준에 머문다면 3~4년 후 미국 연방정부의 채무가 GDP의 100%를 넘어 위험 영역에 들어갈 것이다.

지방 자치를 추구하는 미국 50개 주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는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많은 주정부가 실질적인 부도 상태이다.

배우 출신의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주지사로 있는 캘리포니아주는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수시로 주정부 소유 부동산은 물론 가구까지도 경매에 부친다. 명문 주립대인 버클리대와 UCLA의 지원금을 주정부가 대폭 축소한 결과, 2010년 등록금이 30%나 상승해 월남전 반전 데모 이후 40년 만에 학생들이 가두 데모 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아킬레스건은 국가 채무 규모 자체가 아니다. 외국 투자가가 미 국채의 절반 이상을 보유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미국과 21세기 세계 패권을 겨룰 중국이 최대 채권 보유국이라는 점이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전문가들은 2조4000억달러에 이르는 중국의 외환보유고 중 70%가 미국에 투자됐으며, 이중 미 국채만도 1조달러에 달한다고 추산한다. 지난 주 중국 고위 경제 관료가 "중국은 외환보유고를 운용함에 있어 과거처럼 정·경 분리 원칙을 지킬 것"이라고 발표해 해외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미 백악관이나 의회가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인권문제, 인터넷 검열 등 정치·사회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중국이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미 국채 매입을 중단 내지 축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입장에서도 미국과 EU 채권 외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외환보유고를 마땅히 운용할 대안이 없다. 그래서 미 행정부가 '배 째라' 식의 입장을 견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중국의 일개 외환자금과장의 발언에 미 국채 가격이 춤을 추는 날이 올지 모르고, 그때 미국 정부 고위 관료들은 국가 설명회를 하기 위해 베이징행 비행기를 뻔질나게 타야 할 것이다.

미국·일본·EU의 '가난한 나라'와 반대로 아시아 '부자 국가'들의 재정은 대단히 건전하다.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로 볼 때 중국이 19%, 싱가포르가 23%, 한국대만이 36% 수준이다. 일본과 더불어 인도가 아시아권에서 드물게 80%를 상회하지만, 7~8%의 고속성장을 지속한다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다.

또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신용도가 급격히 악화된 선진국 정부들과 달리 우량 기업들은 국적에 관계 없이 현금을 수조원 내지 수십조원씩 은행에 예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선 마이크로소프트·애플·구글이 빚 없이 각각 301억달러, 248억달러, 245억달러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

중국 기업들도 현금이 너무 많아 주체를 못한다. 세계 최대 이동통신사인 차이나모바일은 35조원의 보유 현금 중 일부를 투자해 얼마 전 중국 중견 은행의 대주주가 됐다. 국내 기업들도 작년 말 은행에 예치한 현금성 자산이 21%나 증가해 215조원에 달했다. 현금이 매년 10조원씩 증가했는데, 작년엔 40조원 가까이 증가했다.

한 세기에 두세번씩 세계 경제 질서가 개편되는 '이벤트'가 있다. 5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을 변화, 즉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뒤바뀌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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