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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 기업’ 쓰러진 호남 경제의 명암

‘향토 기업’ 쓰러진 호남 경제의 명암

시사IN | 이종태 기자 | 입력 2010.03.18 11:32 

 

광주 시민은 향토기업 '금호'에 대한 '짝사랑'을 접었나. 금호타이어 노조가 파업을 결의한 3월10일, 시민들에게서 절박한 호소를 듣기는 의외로 힘들었다. 1970~1990년대까지만 해도 고속터미널에서 금호고속 버스를 타기 위해 한 시간씩 기다렸다던 광주 시민. 그러나 지금은 노사 간 원만한 사태해결을 중심으로 담담한 소회를 토로할 뿐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금호타이어 노사 및 채권단 간 불화로 이 회사가 '청산'될 것이라 믿는 시민은 없었다. 현재 엄청난 유동성 위기를 맞고 있지만, 금호타이어는 원료공급만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면 24시간 내내 작업해야 할 만큼 수요가 많은 회사다. 또한 '대우건설 인수'라는 무모한 경영으로 자금난을 초래한 경영진에 대해 자업자득이라는 반응도 많았다. 노동조합에 대한 냉소도 강했다. 그러나 광주 시민이 비교적 차분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 10여 년 동안 지역 산업구조의 변화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기아차 제공 금호는 이미 광주 경제를 지배하는 기업이 아니다. 현재 광주 경제의 양대 축은 기아차 광주공장(사진)과 대우일렉트로닉스이다.

향토기업의 종언인가

한때 '광주엔 한 집 건너 금호 관계자'란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광주경제에서 금호의 지배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 금호타이어의 정규직 고용 규모는 광주와 전남 곡성, 경기도 평택 공장을 모두 합쳐도 3500명 정도다.

이에 비해 현재 광주 제조업체 중 가장 규모가 큰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은 협력업체까지 포함하면 지역 총 생산액의 3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지역 총고용 부문에서도 26% 정도를 차지한다. 지난 1998년 현대차가 인수한 이후 기아차 광주공장의 자동차 생산량은 연간 6만 대에서 40만 대로 늘었다.

광주 경제에서 자동차에 버금가는 가전산업은 지역 총 생산의 20%를 점유하고 있다. 대표적 기업은 냉장고·에어컨·세탁기 등 백색가전을 생산하는 대우일렉트로닉스(옛 대우전자)와 삼성광주전자다. 광주지역의 해외수출에서도 가전제품의 비율이 20%에 달한다.

새로운 업종으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광통신·디스플레이·조명 등의 광(光)산업이다. 지난 1998년부터 지역의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육성되어 왔다. 박광서 전남대 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정부와 지자체 차원에서 시행한 신산업 육성 정책의 성공 사례로 경남의 기계산업과 광주의 광산업 프로젝트를 꼽는다. 정책적으로 조성한 첨단산업 단지에 집중적인 자금투자로 연구기관 등 산업 인프라를 조성하면서 민간 기업을 지원, 육성하는 산업 클러스터 정책이 성공한 것이다. 이 첨단산업 단지에 입지한 중소·중견 기업은 1998년 당시 47개에서 최근엔 300여 개로 늘어났고, 연 매출액도 1조원을 돌파했다.

이처럼 지역으로 유치된 전통적 제조기업이 선전하고, 새로운 산업이 발전하면서 금호에 대한 지역민의 기대는 상대적으로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광주지역 경제전문가인 광주매일신문 박준수 정경부장은 '광주·전남 지역의 5대 주력업종 기업'으로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삼성광주전자·GS칼텍스·여천NCC·광양제철을 꼽는다. 이들이 지역 제조업 출하액 중 78%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금호타이어는 광주에서 주요 기업이지만 이미 지배 기업은 아닌 것이다.





ⓒ대우일렉트로닉스 제공 대우일렉트로닉스

그러나 전국적 차원에서 볼 때 광주·전남은 여전히 낙후한 지역에 머물고 있다. 2008년 현재 전국 평균이 7.4%인 1차산업 비중이 광주·전남에서는 17%에 이른다. 전국 평균이 17~18%인 2차산업 비중 역시 광주·전남에서는 10%대에 그치고 있다. 광주·전남은 대기업 본사가 가장 적게 들어선 지역이기도 하다. 비교가 가능한 2002년 통계를 보면, 국내 500대 기업 중 광주·전남 지역에 소재한 업체는 15개에 불과하다. 매출액 기준으로는 0.9%다.

상황이 이러하니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도 매우 열악한 편이다. 2008년 현재 광주의 GRDP는 1470만원으로 16개 시·도 중 15위다. 16위는 대구. 광주의 제조업 성장률(2004~2007) 역시 6.3%(전국은 8.2%)로 전국 최하위권이다. 이에 비해 전남의 1인당 GRDP는 2600만원으로 전국 3위지만, 이는 전적으로 이 지역 동부에 밀집한 광양제철과 여천공단(석유화학단지) 덕분이다. 지역민에 대한 고용 및 소득 창출 효과가 매우 미약하다는 의미다. 전남 동부 대규모 기업들과 연관되어 경제활동을 하는 업체 및 인력이 지역 외부에 있는 것이다. 이를 입증하듯, 전남의 소비지출 수준은 전국 최하위이고 재정자립도 역시 불과 21.4%로 16개 시·도 중 꼴찌를 고수하고 있다.

환황해권 시대, 호남 운명 바뀔까

문제는 이런 구도에서 벗어날 대안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광주에 그나마 입지한 얼마 안 되는 제조업체도 대다수가 저부가가치의 가공조립형 공장이기 때문이다. 광주 자동차산업의 경우 연구개발 및 첨단부품 등 고부가가치 부문이 지역 외에 존재한다. 지역 내에서 이뤄지는 것은 조립과 금형 정도다. 기아차 광주공장이 지역 내에서 조달하는 부품은 전체 부품의 40%(매입액 기준)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연 40만대 생산체계로 '규모의 경제' 효과가 낮기 때문에 부품업체가 지역 내로 잘 들어오지 않는다. 가전 쪽도 고부가가치 부문인 연구개발 능력이 지역 밖에 있다.

이와 관련, 이민원 광주대 교수(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장)는 지역 내 연구개발 기능의 획기적 강화를 요구한다. 국내 최고의 교수진이 모여 있는 광주과학기술원을 중심으로 연구개발 인력을 대량 육성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지식기반 산업을 육성해가자는 전략이다. 또한 "자원배분의 효율성 차원에서라도 참여정부 때 추진되다가 사실상 중단된 균형발전 전략이 재개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국제경제 순환의 틀이 변하면서 광주·전남 지역경제가 부흥할 수 있는 호기가 도래했다는 낙관적인 주장도 있다. 정찬용 전 현대기아차그룹 인재개발원 원장은 "중국 경제의 부상으로 경기-충청-전남북을 잇는 환황해권 벨트와 제주-부산-목포-여수를 잇는 남해안 벨트가 새로운 경제 중심지로 뜰 것"이라며 "이런 전망에 기반해서 신산업과 물류 등의 국제 중심지로 지역경제를 키우자"고 역설했다.

이종태 기자 /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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