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네트워크/ 전통문화콘텐츠

[사진]늠름한 위용 드러낸 광화문

[사진]늠름한 위용 드러낸 광화문

image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은 15일 4년여의 복원공사를 마친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늠름한 위용을 드러냈다. 145년 전 고종의 재건 당시 모습을 되찾은 광화문은 이날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많은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머니투데이

 

새 광화문, 민의·민심의 소통 상징

 [충청일보]6·25 한국전쟁 때 소실됐던 광화문이 새롭게 제모습을 찾았다.
 

화강석 기단부에 금강송 목조 누각의 신조물로 65주년 8·15 광복절에 정식 제막됐다. 광화문은 42년 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 임시 복원됐으나 당시는 사라진 목조 부분만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로서의 의미는 사실상 없다는 비판이 대세였다. 위치도 원래 자리에서 북쪽으로 11.2m, 동쪽으로 13.5m 떨어지고 방향각 역시 경복궁 중심축에서 3.75도 틀어진 그대로였다. 이런 '짝퉁' 복원의 한계와 문제가 이번에 극복됐다. 국민과 함께 경축할 일이다.
 

1995년 발표된 광화문 복원 계획은 1865년 고종 중건 때 모습으로 재탄생하는 내용이었다. 문헌과 발굴 조사에서 조선 후기 고종 때는 물론이고 창건된 태조 때의 위치와 규모까지 확인해 2006년 말 철거로 시작된 대역사가 4년 만에 마무리된 것이다.
 

'光化門'이라고 쓰인 현판도 고종 중건 당시 훈련대장 임태영의 글씨가 유리원판 사진으로 밝혀지면서 원형 복원됐다. 고 박 대통령의 친필 글씨나 훈민정음체의 한글로 현판을 새겨야 한다는 반론이 일부 나왔으나 창건과 중건 때의 모습으로 잘 복원했다고 본다.
 

광화문은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으로, 경복궁과 함께 1395년(태조 4년) 건립됐다. 원래의 이름 사정문(四正門)은 1425년(세종 7년) 광화문으로 바꿨다.
 

'왕의 큰 덕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뜻이나 전란 속에 두 차례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다. 임진왜란 때 처음 불탄 광화문은 고종 2년 경복궁과 함께 재건됐으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경복궁 경내에 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광화문이 헐릴 위기에 처했다. 다행히 당시 여느 조선인보다 조선을 더 존경하고 사랑했다는 도요대(東洋大) 유종렬(柳宗悅) 교수의 반론이 먹혀 '철거' 당하지 않고 '이전'돼 살아남았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포화는 비켜가지 못했다. 목조로 된 다락이 다시 소실된 것이다. 결국 광화문은 1995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경복궁 복원 계획에 포함돼 그동안 틀어지고 옮겨진 부분도 바로 잡혔다. 숱한 고난을 겪은 광화문이 이전과 복원의 대공사를 마치고 615년의 역사를 이제서야 되찾은 것이다.
 

옛 나라의 심장부였던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이 고증을 거쳐 복원된 것은 한·일강제병합 100주년과 광복 65주년을 맞은 올해의 뜻깊은 경사다. 이를 계기로 우리는 오욕의 역사를 딛고 영광된 미래로 나가야 한다.
 

일제는 조선의 황후를 무참히 살해하고도 모자라 한국 문화를 대부분 말살하면서 그 상징인 경복궁을 총독부 청사로 가로 막았다. 그런 경복궁의 정문이 복원을 마치고 광복절에 새롭게 열린 뜻이 거룩하다. 나라의 큰 문이 제대로 복원된 셈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1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65주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함께 가는 국민, 더 큰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경축사를 했다. 이 대통령이 "통일은 반드시 온다. 이제 통일세 등 현실적인 방안도 준비해야 할 때가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광화문은 닫히는 기능보다 열리는 역할로 민의와 민심이 소통하는 상징으로 거듭나야 한다. 또 국운융성으로 직통해 빛나는 새 길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기사입력시간 : 2010-08-15 19:01:39
글쓴이 : 충청일보 /  [충청일보]의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