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 광복 65년 분단 65년 / 경복궁 정문 광화문, 광복절에 공개 [중앙일보]
2010.08.13 01:37 입력 / 2010.08.13 01:37 수정
영욕의 세월 경복궁(1395~2010) 615년
수많은 곡절 담은‘역사의 문’이 깨어난다, 미래로 가는‘빛의 문’이 열린다100년 전 경복궁 전각의 지붕들은 파도처럼 넘실댔다. 1876년 내전에 불이 나 교태전·강녕전 등이 소실됐어도 웅장한 자태를 자랑했다. | |
1996년 11월 김영삼 정부 시절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내는 모습. | |
◆왜란으로 소실=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폐허가 된다. 『선조수정실록』에 왕과 조정이 궐을 버리고 피란한 뒤 ‘백성이 불을 질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백성 방화설은 식민사관에 의해 강화됐으며, 당시 정황과 문헌자료를 종합하면 왜군 방화설이 더욱 설득력 있다는 게 근래의 해석이다.
전쟁에 참여한 종군승(從軍僧) 제다쿠는 ‘조선일기’에 왜군이 한양에 입성한 직후 경복궁의 모습을 보고 ‘용이 사는 곳인지, 신선이 사는 선계인지 구분할 수 없다’고 기록했다. 이 밖에 여러 자료가 왜군이 한양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경복궁이 온전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1년의 경복궁. | |
중건 이후에도 경복궁은 여러 차례 화재에 시달렸다.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암살한 을미사변(1895년)이 벌어지고, 이듬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면서 경복궁은 빛을 잃는다.
혜촌 김학수의 북궐도(1975년). 고종 중건 당시의 모습을 ‘북궐도형’을 토대로 그린 상상도다. | |
한국예술종합학교 우동선(미술원 건축과) 교수는 “서울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중심으로 경복궁이 갖는 장소의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일제가 이를 차지하려 든 것”이라고 말했다.
광화문도 매각하려 했지만 일본 지식인조차 반대하는 바람에 이듬해 건춘문(경복궁 동문) 북쪽으로 옮긴다. 자리를 옮긴 광화문은 2년 뒤 열린 조선박람회 정문으로 쓰였다. 경복궁에서 뜯겨나간 전각은 일본 사찰, 요정, 미술관 등으로 변용되거나 건축용 부재로 쓰였다. 궁궐 밖으로 나간 전각 356동 중 해방 직후 남은 것은 7동에 불과했다. 궁궐 안엔 광화문, 근정전 등 40동가량만 남아 있었다.
◆부활하는 경복궁=경복궁이 마지막으로 중건된 고종 당시를 복원 시점으로 설정한 경복궁 복원계획이 수립된 게 1989년이다. 지난 20년간 침전·동궁·흥례문·광화문 권역이 차례차례 복원됐다.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헐어냈다. 2010년 현재, 경복궁은 고종 중건 당시의 25% 수준까지 회복됐다. 문화재청은 내년부터 다시 20년간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을 추진한다.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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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희 기자
“포만 세 번 바꿔 … 광화문, 1000년 이상 갈 겁니다”
20년 역사 이끈 신응수 대목장
“광화문은 이제 1000년 이상 갈 겁니다.”
“조선총독부 건물 없애고 광화문까지 살려놓으니 북악산까지 한눈에 들어와 얼마나 보기 좋습니까.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외국인 관람객도 엄청 늘었어요. 그 전엔 허허벌판이라 볼 게 없었죠.”
“원래 공사가 2009년 완료될 예정이었잖아요. 그러다 발굴 기간이 길어지면서 1년 뒤로 넉넉히 잡았던 거지, 아무 문제 없어요. 광복절에 공개하는 게 이왕이면 뜻도 좋죠. 경복궁은 일제가 다 망친 거니까요. 광화문도 일제가 제자리에 뒀으면 6·25 때 피폭되지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공기가 늦춰지는 바람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단다. 잘라놓은 나무가 지나치게 건조돼 비틀어졌다는 것이다.
“포(包·처마를 받쳐주는 짧은 부재)만 해도 세 번이나 바꿨어요. 빨리 작업해 맞춰야지, 소나무가 성깔이 있어서 놔두면 자꾸 돌아가거든요.”
그는 꼼꼼하기로 유명하다. 복원에 참고한 누각 1층 내부 사진이 광화문이 아니라 흥인지문(동대문)이라는 게 뒤늦게 확인되자 공사한 걸 죄다 뜯어 다시 지었다.
“밖에서 보이는 것도 아니고, 문양도 아주 조금 달라요. 그래도 고종 때 한 것을 복원의 기준으로 삼았으니 그것에 맞춰야죠.”
그는 한글 현판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글학회 등에 대해서도 “복원의 원칙을 이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스승님(조원재·이광규)이 ‘큰일 하는 사람은 수(壽)를 감한다’고 하셨어요. 해보니 중압감이 커요. 내 손으로 몇 백 년 된 나무를 베어야 해 마음이 편치 못하고, 궁궐 중에서도 기가 세다는 경복궁을 복원하는 기간 동안엔 특히나 음해도 받고 서운한 일도 많았어요. 그래도 누구보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고 있잖아요.”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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