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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

[Why] 김형오 국회의장 '18대 국회의 실패'를 말하다

[Why] 김형오 국회의장 '18대 국회의 실패'를 말하다

  • 입력 : 2010.04.30 15:53

"제멋대로 사퇴서 낸 의원들… 마음 같아선 다 수리하고 싶었습니다"
2년간 얻은 별명이 '직권상정' 국회의장이 가진 권한은 사회棒과 직권상정밖에 없어
공관 점거 피하려 호텔行 앙상한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꼭 내 신세
朴 前대표때 사무총장 했으니 따져 보면 ‘오리지널 親朴’… 어느날 ‘가리지널’ 됐더군요

18대 국회의 전반기가 정쟁(政爭)·점거·농성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그 국회를 700일간 이끌던 김형오(金炯旿·63) 의장이 5월 말 임기를 마친다. 떠나는 입법부 수장에게 우리 국회가 '민의의 전당'인지 '마궁(魔宮)'인지 묻기로 했다.

김 의장은 최근 책을 냈다. '김형오의 희망편지-이 아름다운 나라'다. 이 책은 1년 전 나온 '길 위에서 띄운 희망편지'의 속편(續篇) 격이라고 한다. 두 책은 국정감사 때 전국을 돌며 느낀 소회(所懷)를 엮은 감상문(感想文)이었다.

국민들이 불신하는 국회와 우리 땅 예찬,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갖고 김 의장에게 "글이 부드럽다"고 했다. 김 의장이 말했다. "워커힐에서 나목(裸木) 위 얼음이 물방울로 변하는 걸 보고 문체를 싹 바꿨어요."

유산균 음료를 마신 김형오 국회의장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인터뷰가 길어지자 카디건으로 갈아입은 김 의장이 볼펜을 들고 질문하는 기자를 또렷이 바라보고 있다. / 허영한 기자 younghan@chosun.com
자괴감

―의장이 공관(公館)을 놔두고 왜 호텔에 묵습니까.

"2008년 12월 민주당 대표단이 국회의장실로 찾아오겠다고 했어요. 뭔가 짚이는 게 있었어요. 저도 야당시절 의장 공관 점거 조장(組長)을 지냈거든요. 팔에 완장까지 차고. 야당의원들이 의장실로 오는 건 의장실을 점거하겠다는 뜻이죠. 다음이 국회 본회의장, 마지막이 공관이고요."

―그들이 어떻게 하던가요.

"야당 대표단이 오니 TV 카메라가 산(山)처럼 절 둘러쌌어요. 야당에서 당성(黨性) 강한 사람들까지 왔으니 그들 입은 수십개고 전 하나뿐이어서 상대가 될 수 없지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인터넷에 당장 '김형오는 아무 말도 못했다'는 기사가 뜰 게 뻔하잖아요. 의장실이나 본회의장은 점거하려 하면 막을 수 없어요. 그래도 한남동 공관만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겁니다."

―왜요?

"제가 거기 있다면 문(門)을 안 열어줄 도리가 없지요. 면회(面會)를 빙자해서 올 텐데요."

―그런 와중에 책을 쓴 겁니까.

"역대 국회의장들은 국감 때면 거의 예외 없이 외유를 떠났습니다. 전 그러기 싫었어요. 그래서 그동안 못 가본 곳이나 가보자는 심정으로 전국을 돌아다녔어요. 그때의 느낌과 주민들의 반응을 책으로 엮어본 겁니다. 문체를 장중하게 해볼까, 뭐 이런 고민을 하던 중이었지요."

―아하, 그러다….

"앙상한 나뭇가지 뒤로 겨울 한강이 보이고… . 참 처량한 신세다 싶었어요. 이게 내 신세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래서 그동안 써놓았던 원고를 모조리 바꿨습니다."

―계속 그곳에만 머물렀습니까.

"호텔을 제 이름으로 예약한 건 아니지만, 얼마 지나면 사람들이 알아보니 서너곳 옮겨 다녔지요."

―2008년 7월 10일 '국민의 희망과 신망을 얻는 국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했습니다. 희망과 신망을 얻었나요?

"자괴감(自愧感)이 듭니다. 하지만 이번 국회에서 저를 비롯해 여야 지도부가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자각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국민들이 믿을까요.

"18대 국회의 특징 두 가지를 이해해야 해요. 첫째, 10년 만에 진보에서 보수로 정권 교체가 이뤄졌습니다. 이념적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고 잠복해 있었지요. 보수에서 진보로 권력이 넘어갔다면 이렇진 않았을 겁니다. 둘째, 대선(大選)과 총선(總選)에서 야당이 가장 큰 표차로 패했어요. 간극이 너무 많이 벌어졌지요. 그러다 보니 여도 야도 채 정리를 하지 못한 상황에서 국회가 개원했던 겁니다. 야당도 그랬지만 여당도 문제였어요."

―여당은 어떤 게 문제였습니까.

"정권 잡고 난 뒤 야당과 어떤 관계를 설정할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거지요. 야당은 또 야당 나름대로 대화와 타협의 노선으론 살 수 없구나, 강경노선으로 가야겠구나라고 생각한 거고요. 그랬기에 2년 가까이 대립과 격돌하다 후반기로 접어들면서는 이게 아니라는 반성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전 자각이니 반성이니 잘 모르겠던데요.

"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전부 비주류잖아요. 18대 국회가 엉망이 된 데는 국회의장이 이끌어가기엔 역부족인 상황인 이유도 있습니다. 의장에게 권한이 없으니 여야 대표를 불러도 안 오면 어쩔 수 없거든요."

직권상정

김 의장은 "2년 동안 의장 하며 얻은 별명이 '직권상정'"이라고 했다. 협상하다 결렬되면 그에게 상반된 주문을 했다는 것이다. 여당은 "같은 한나라당 출신이니 직권상정하라", 야당은 "직권상정 절대 하지 마라"고 그에게 주문했다.

어떤 선택을 해도 욕먹을 수밖에 없는 구도 속에서 그는 2년을 갇혀 지냈다. '처음 목표를 100으로 봤을 때 떠나는 지금 스스로 몇점을 주겠느냐'고 물었다. 김 의장은 "비난받아도 내 업보"라고 했다. 점수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국회의장이 그렇게 힘이 없는 자립니까?

"국회법상 의장이 가진 권한은 두 가지밖에 없다고 자조(自嘲) 섞인 이야길 합니다. 사회봉(棒) 두드리는 것과 직권상정, 그 두 가지죠."

―욕을 많이 먹었나요.

"웰빙의장이니 뭐니…. 어차피 오른쪽 뺨 맞으나 왼쪽 뺨 맞으나 아픈 건 마찬가지지만 한나라당에서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을 때 더 아픈 건 사실이지요."

―한나라당이 원망스러웠습니까.

"미디어법을 처리할 때였어요. 야당이 이미 본회의장을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직권상정하래요. 하늘 위에 올라가서 방망이를 칩니까? 2008년 12월 24일 미디어법안을 제출했을 때도 그래요. 법안 제출이라는 게 우편함에 편지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26일에 직권상정해달라는 겁니다. 상임위에 상정도 안 했는데 어떻게 본회의에 직권상정합니까. 참모들이 잘 모르고 갑자기 서두르다 벌어진 일이지요. 물론 덤터기는 전부 제게 뒤집어씌웠지만."

―초선이야 국회 의사절차를 잘 모른다 치고, 다선(多選) 의원들은 뭘 하고 있었기에 그런 일이 벌어질까요.

"여야 모두 다선 의원들이 이상하게도 비주류잖아요. 한나라당의 다선은 대부분 친박(親朴)이고, 민주당도 그렇고. 그러니 국회 기강이 무너진 겁니다."

―기강이 무너졌다뇨?

"제가 14대 때 처음 국회의원이 됐습니다. 상임위원회에서 질문 한번 할 때 최소 두 달이 걸렸습니다. 선배들 하는 모습도 보고 공부도 해야 했어요. 지금은 의원 선서하기 바쁘게 신상발언에 의사진행 발언을 남발하지요."

―18대 국회에서 난무한 폭력도 기강과 관련이 있겠습니다.

"강기갑 의원도 17대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공중부양에 대해선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사표를 낸 의원들도 많았지요.

"그것도 그래요. 얼마나 국회를 우습게 봤으면 그렇게 가벼운 행동을 하겠습니까. 그들이 출마할 때 지역 유권자들에게 '중간에 마음에 안 드는 일 있으면 사퇴서 쓰겠다'고 약속하진 않았을 겁니다."

―그냥 사퇴서 수리했으면 좋아할 국민들이 많았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수리하고 싶지요. '얼씨구? 이런 짓을 하면 내가 못할 줄 아느냐'는 생각도 든 건 사실입니다. 혼쭐을 내보고 싶은 생각도 했고요. 그러나 그게 선례가 되면 악용될 소지가 많지요. 의장이 국회의원을 마음대로 사퇴시키는 관행을 만들 순 없습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는 아직도 사퇴서를 낸 상태이고 사퇴서 냈다 받아간 분들도 있는데, 혹시 사석(私席)에서라도 사과한 적은 있습니까.

"한명도 없어요. 한 의원은 연말 국회 때 예산안 처리하는데 절 보고 사기꾼이니 무당이니 했어요. 본회의장 의장석에선 사실 그런 소리가 잘 안 들려요. 낌새가 이상해 사무총장에게 물어보니 그런 말을 했대요. 나중에 따로 만나 나무랐는데도 전혀 변함이 없더군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겠습니다.

"무학대사에게 누군가 '야 돼지새끼야'라고 했는데 대사가 '이 부처님아!'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돼지 눈에는 다 돼지로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다 부처님처럼 보이는 겁니다. 미국의회에서 'You lie'라고 했다가 패가망신한 의원이 있지요. 우리도 이런 풍토를 고치려면 국회법과 윤리규정을 새로 만들어야 합니다."

가리지널 친박, 정권의 공신

과거 사례를 살펴보면 은퇴 직전의 코스로 국회의장직에 오른 정치인들이 많다. 그런데 김 의장은 정치인으론 아직 젊은 63세다. 역대(歷代) 의장들과 다른 행보를 할 게 분명하다. 국가 의전 서열 2위인 그의 다음 목표는 뭘까.

이 말을 하자 "초대 국회의장은 그렇지 않았다"고 즉답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다. 다음 대선에 출마하겠느냐고 묻자 김 의장은 "못할 것도 없다"면서 "그렇다고 총선에 불출마한다고는 쓰지 말라"고 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국회법 개정, 윤리규정 강화 얘기가 나오지만 흐지부지되지 않았습니까? 의원들 스스로 자기들에게 족쇄 채우는 일은 안 할 텐데.

"우리 국회가 2·4·6월 이렇게 짝수달에 열리는데 매번 한 달 30일 중 25일 동안 의사일정 협의하다 겨우 닷새 남기고 합의하는 식이에요. 국회가 언제 열리는지 의원도, 의장도 모르는 나라는 우리뿐일 겁니다. 사실 의사일정 같은 건 실무자들이 해도 되는데 이상하게 유치한 샅바싸움을 벌이는 게 원내대표들이 하는 일처럼 된 겁니다."

―의장은 그렇게 말하시지만 고소·고발도 때가 되면 동류(同類)의식 때문에 슬그머니 취하해주는 풍토도 있습니다.

"제가 고소·고발한 것 중에는 취하한 게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임기 끝날 때까지 절대 취하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압력도 많이 받았어요. 제 대변인과 입법조사처장 발령도 '고소·고발 취하 안 해주면 동의 못 해주겠다'고 해 두세달이나 늦어지기도 했지만요."

―지금 의장이 돌아갈 당은 친이(親李)·친박(親朴)이 시작부터 지금까지 으르렁대고 있는데 누구 책임이 더 큰 겁니까.

"둘 다 책임이 있지요."

―모호한 답변입니다. 그렇다면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표의 장·단점을 평가한다면요.

"장점만 얘기하면 안 될까요? 박 전 대표는 자세가 성실하고 단정합니다. 타고난 것인지 훈련을 통한 것인진 모르지만요. 저도 지금 인터뷰하면서 몸을 움직이잖아요? 박 전 대표는 몇 시간이 지나도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어요. 기억력도 좋고요. 누군가가 수첩 보는 걸 비판했지만 전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만큼 정확하다는 뜻이지요. 다만, 흐음~ 사회과학적인 생각이 우리보다는 덜 한 것 같아요. 대학 때 전공 탓인진 모르겠지만(박 전 대표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출신이다)."

―대통령은요.

"세미나식 리더십이랄까, 저 같으면 10~20분 만에 내릴 결론도 2~3시간 걸리니까요. 생각보다 박학다식하기도 해요."

―김 의장은 친입니까, 친박입니까.

"박근혜씨가 대표 시절 제가 사무총장을 했지요. 천막당사 시절이었어요. 그리 보면 오리지널 친박인데 어느 날 보니 가리지널이 돼 있더군요. 대통령과는 뭐, 인수위 부위원장을 했으니. 국회에도 14대 때 같이 들어갔고요. 일류국가위원장을 하며 수시로 만났으니까요. 이 정부 세우는 데 공신이라면 제가 1등 공신인 셈입니다. 지금 당 상황이 그렇긴 하지만 언젠가 조정될 게 아니겠어요? 그런 역할을 할 때도 올 것이고요."

―'큰 꿈'을 얘기했는데 김 의장은 정치인으로서 지명도가 낮지 않습니까. 계파나 계보도 없고.

"제 지역구가 부산 영돕니다. 총리실에 근무할 때 매주 토요일 부산에 내려가 일요일 밤 열차 타고 상경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지지율이 0.2%인가 2.2%인가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대중성이라는 건 정치인에게 두 번째입니다. 중요한 건 국정철학, 의지지요."

―개헌(改憲)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나라에 그리 시급한 겁니까.

"직선제 이후 4명의 전직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전부 불행하게 됐어요. 전 그게 헌법 탓이라고 봅니다. 대통령에게 권한이 과도하게 집중돼 있거든요. 입법은 원래 국회의 권한인데 정부입법이 있습니다. 정부 예산도 국회가 해야 하는 걸 정부가 짜 우리에게 넘깁니다. 감사원도 원래 국회 소속이어야 하는데 정부 산하입니다. 그래서야 감사가 제대로 되겠어요? 이 대통령이 야당의원에게 무슨 법안이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대통령이 압력 넣었다고 다음날 폭로 기자회견 하겠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선 행정부에 그런 권한이 없으니 대통령이 여야 의원에게 두루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삼권분립을 정확히 세우는 데는 여러 방식이 있어요. 미국식, 독일식,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지요. 미국식이라고 하면 국민들이 4년 중임제만 생각하지요? 잘못된 인식입니다. 거기에만 신경 쓰면 5년 단임을 8년 단임으로 만드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권력구조를 볼 게 아니고 미국식 대통령제 하의 의회를 봐야지요. 전 지금 87년 헌법이 수명을 다했다고 봅니다."

―무슨 수명인가요.

"87년 체제의 목표는 평화적 정권교체, 대통령은 내 손으로 아니었나요?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어요. 얼마나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데 그 헌법에 머물고 있어야 합니까."

개헌

김 의장은 경남 고성이 고향이다. 할아버지가 꽤 많은 재산을 모았는데 아버지가 어장(漁場)을 하다 싹 말아먹고 법무사를 했다. 3남2녀의 넷째인데 부모가 둘째아들인 김 의장을 따라 부산 영도로 이사 온 데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큰형은 마산고를 다녔고 의장은 시험 삼아 본 경남중학교 입시에서 덜컥 붙어버렸다. 부모는 고성, 큰아들은 마산, 둘째아들은 부산에서 자취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부모는 둘째가 며칠 버티지 못하고 돌아오리라 믿었다고 한다.

―국회 권한 강화를 말하면 고양이에게 생선 맡긴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겠어요?

"그건 역설적으로 국회에 먹을 게 없어서 싸우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부잣집에 10만원 던져줘 보세요. '너 가져라'라고 하겠지요. 가난한 집에 1만원을 주면 아마 서로 가지려 아귀다툼을 벌일 겁니다. 국회도 반성해야 하지만 삼권분립은 달리 생각해야 합니다."

―6월이면 의장을 그만둘 텐데 당장 4대강 문제는 어떤 입장을 취할 겁니까.

"당연히 찬성이지요. 제가 낙동강 하류 제일 더러운 물 먹고 산 사람인데. 영산강도 그래요. 국감 때 최인기 의원이 '꼭 영산강 개발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수질이 안 좋으니까요. 지금 4대강 개발하니 종교단체까지 들고 일어나 '수질이 나빠졌다'고 하는데, 공사하니 흙탕물 생기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야당이 논의도 안 해보고 무조건 원천봉쇄, 예산 전액삭감을 외치는 건 정권에 백기투항하라는 소리가 아니고 뭡니까."

―천안함 사태를 두고 정부 대응이 미지근하다는 불만도 있습니다.

"저도 우리 해군이 뭐하나, 어떻게 해군이 아니고 해경이 구조를 했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한 외국대사가 그럽디다. '한국인들은 왜 참을 줄 모르느냐'고. 미국 같은 나라도 9·11사태 원인을 몇 년 동안 조사했잖아요."

―중학생 때부터 부산에 살았지요. 굉장히 좋았던 모양입니다, 고성으로 안 돌아오셨다니.

"서대신동 판자촌에서 자취하는데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어요. 모든 게 새로웠습니다. 전차도 처음 봤고 광복동 야시장이며. 그때부터 부모님이 고민했대요. 큰아들이 있는 마산이냐, 둘째가 있는 부산이냐를 놓고요. 그러다 '기왕 가는 거 큰 도시로 가자'고 한 거지요."

―김 의장의 이력을 보면 큰 고생은 안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치도 순탄하게 한 것 같다는 평을 듣지 않습니까.

"제가 경남중·고를 나와 서울대 외교학과를 재수해 들어갔습니다. 고3 때 넉 달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전 그때 사람 얼굴에 칠공(七孔·일곱개 구멍)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처음엔 코와 입에서 피가 나오더니 나중엔 귀와 눈에서 피가 쏟아졌습니다. 두 달 만에 몸무게가 63㎏에서 43㎏으로 줄었습니다. 정치를 순탄하게 했다고 누가 그럽디까. 공천받을 때마다 맨 마지막에 해줘 고생했는데."

―그렇습니까?

"제가 정치하면서 정말 많이 속았어요. 계보가 없다, 계파가 없다고 하는데 그건 제가 이권부서나 이해가 관련된 일을 피했기 때문일 거예요. 3선 할 때 머리를 박박 깎은 적이 있어요. 부산에서 가장 큰 신문에서 선거 사흘 전에 제가 돈 1억7000만원을 먹었다고 쓴 거예요. 그때 최대 이슈가 다대만덕사건이었는데 그건 두 번째로 밀리고 제 얘기가 선거 직전까지 1면 톱에 올랐어요. 선거 전날 머리를 깎고 띠 하나 매고 호소했어요."

―그 전법이 통했나요?

"그 선거에서 제가 더블스코어로 압승했어요. 다음 선거에는 고소·고발로 600명이 불려간 적도 있고. 하루 한명씩 제 지구당에서 탈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편하게 했다니 참."

―군대도 특이한 곳을 다녀왔다고 들었습니다.

"대학원 재학 중 군에 갔어요. 훈련소에 가지 않고 곧바로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가보니 HID였습니다. 지금은 정보사(情報司)로 바뀌었습니다. 34개월 복무했는데 상병으로 제대했어요. 줄 잘못 서면 병장을 못 달던 시대였어요."

―첫 직장이 동아일보였지요.

"제가 지원하던 해 기자 대량해직사건이 있었어요. 서울 문리대 출신들이 주동했다고 봤는지 쿼터가 있었습니다. 문리대 1명, 법대 1명 하는 식으로. 막상 시험 봐 붙긴 했는데 노재봉 교수께서 그러시더군요. '너 신문기자 하면 1년 동안 사스마와리(察廻·경찰기자의 일본식 용어)해야 하는데 나이 들어 할 수 있겠느냐'고요. '신동아로 가면 그거 안 해도 된다'기에 신동아 기자가 된 겁니다."

인터뷰 시작 전 찌푸렸던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폭풍도 불었다. 김 의장은 "의장공관과 국회에 야생화며, 장뇌삼까지 많이 심었어요. 그걸 보여주고 싶었는데…"라고 했다. 그날 밤 김 의장은 미국대사관에서 이임 만찬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노무현 대통령을 마지막으로 불우한 처지나 역경 같은 단어가 사라졌으면 합니다. 이젠 정상적인 사람이 정상적인 정치를 해야죠." 순탄하게 살아온 것 아니냐는 질문이 끝내 그를 괴롭힌 모양이었다.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