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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터뷰

'실패를 말한다' 스타벤처 출신 전문경영인의 고백

 
[김경묵의 인물탐구-14]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
대담=김경묵 지디넷코리아 편집국장, 정리=이설영
2010.04.18 / PM 03:11

[지디넷코리아]"나는 ‘IMF 경제 위기’로 인한 대기업의 무너짐과 ‘IT’와 ‘벤처’의 태동과 성장, 또한 버블과 몰락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젊은 나이에 촉망받는 리더로서 분에 넘치는 찬사를 받아서 우쭐한 적도 있었고, 처절한 실패의 나락을 경험하기도 했다.

 

나는 실패의 경험에서 책이나 주변 친지에게서 간접적으로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을 수십배, 수백배 얻을 수 있었다. 삶에 있어서 겸손함과 진지함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체험했다.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자신의 머리를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끔 해주는 계기였다."

 

김홍선 안철수연구소 대표는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 첫글에서 벤처 경영자로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한다. 그가 걸어온 굴곡의 길을 지켜봤던 이들에게는 더더욱 와닿는 얘기일 것이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1세대 보안 업체 시큐어소프트 대표 시절의 그를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김홍선이 변했네..."하면서 조금 놀라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다. 그가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 고백에 대해 좀더 묻고 싶어진다. 뜻하지 않은 실패에 해머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된 과정은 어떠했는지, 새둥지 안연구소에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에 대해 솔직한 얘기가 듣고 싶어진다. 오너였다가 지금은 전문 경영인으로 살아가는 모습도 궁금해진다.

 

그가 안연구소에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실패'는 아주 불편한 대화 주제가 될 것이다.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선 지금이라면 아팠던 지난 시간에 대해 부담을 조금 덜고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 블로그에 올린 고백은 그가 실패한 과거에 대해 한번 톡까놓고 말하고 싶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도 확대해석할 수 있을 듯 하다. 파란만장한 벤처 인생을 살아왔던 김홍선 안연구소 대표를 만난 이유다.

 

엘리트 벤처인이 몰락하고 재기하기까지...

김홍선 대표는 한때 자타 공인 엘리트였다. 대한민국 벤처 신화를 장식했던 주역중 하나였고 국내 최초 보안 박사 1호로 명성을 날렸다. 그가 이끌던 시큐어소프트는 국내 보안 시장의 개척자였고 김홍선하면 보안 1세대의 대명사로 불렸다. 그를 향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고 스스로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그의 앞날은 거칠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보였을 뿐이었다. 얼마못가 잔인한 운명이 그를 덮쳤다. 코스닥 상장 이후 시큐어소프트는 실적 부진에 시달렸고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해외 사업도 고배를 마셨다. 잇단 악재를 김 사장이 버텨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2004년 시큐어소프트를 엑서스테크놀로지에 넘기고, 그해 10월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쫒겨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쓸쓸한 퇴장이었다. 자부심이 대단했던 김 대표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실패를 견디기에는 맷집이 너무 약했다.

 

주변에서 쏟아지던 미묘한 시선들도 고통이었다. 미묘한 시선에는 '잘난척 하더니 내 그럴줄 알았지'식의 비아냥도 포함됐다. 누군가를 만나는게 죽기보다 싫은 고통의 시간이 이어졌다. 김 대표의 선택은 결국 미국행이었다. 벤처인 김홍선 스토리는 거기서 끝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그렇게 보였을 뿐이다. 공백기를 가진 새로운 모습으로 보안 시장에 컴백했다. 유니포인트 고문을 거쳐 대한민국 대표 보안 업체 안철수연구소 CTO로 변신했고 2008년 10월에는 대표 자리에 올랐다. 한편의 드라마같은 재기코스였다.

 

"격변의 세월을 살았다고 볼 수 있죠. 이제는 실패를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저 개인에게는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누군가의 실패를 간접 경험하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봐요. 실패를 하나하나 복기하는 과정이 자산으로 쌓일 수 있으니까..."

 

김홍선 대표와 10년이 넘게 만나왔던 기자는 그의 스타일이 많이 바뀌었음을 느끼게 된다. 시큐어소프트 시절 그는 외부 사람과 만날때 만큼은 당당한 모습이었다. "경영이 정상화되겠느냐?" "제품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란 지적들에 대해서도 극복 가능하다고 받아쳤다.

 

대표인 만큼, 외부에서 제기되는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할 수 있다는 특유의 자신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기자에겐 그렇게 보였다.

 

그랬던 그의 스타일은 재기와 함께 아주 달라졌다. 제품에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수 있다고 공언하기 보다는 문제를 일단 인정하고, 대책을 설명한다. 올해초 안연구소 V3 백신 오류로 민원 행정 프로그램에 문제가 생겼을때도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로 시작되는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사람을 평가할때 소위 스펙을 따지지도 않게 됐다. 스펙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펙이나 성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을 뽑습니다. 자기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더군요. 꿈이 없는 사람도 있고요. 대개 자기 강점을 잘 알고,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이 기본기가 강합니다. 그 외에는 리더십도 중요 항목이 되겠죠. CEO 뿐만 아니라 모든 구성원이 리더가 되는 세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냥 원론적인 의미로 툭 던진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과거와 오버랩시키면 색다른 뉘앙스가 풍긴다. 자기를 아는 사람, 결국 그가 실패를 통해 터득한 키워드는 바로 이게 아닐까 싶다.

 

김홍선 사장은 지난 실패에 대해 많이 배우는 계기가 됐다는 선에서 얘기한다. 나름 억울한 것들도 많을텐데, 디테일은 잘 꺼내지 않는다. 자신은 실패했던 사람이고, 그것을 통해 많이 배웠다는 것 뿐이다. 개인적으로 어떤 사람들에 관해 몇가지 묻고 싶었는데, 참기로 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다시 묻는게 아직은 망설여진다.

 

제2의 인생, 벤처정신으로 역전 드라마 발판

김홍선 대표는 안연구소에서 제2의 삶을 시작했다. 실패의 기억은 잊지 않았으나 그것때문에 위축되지도 않는다.

 

안연구소의 변화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의 합류와 함께 안연구소는 회사 색깔 자체가 바뀌기 시작했다. 올해들어 변화는 더욱 급물살을 타는 양상이다. 김 대표 스스로도 올해는 많은 것을 보여주겠다고 벼른다.

 

키워드는 보안에서 종합SW기업으로의 변신. V3로 상징되는 안연구소는 국내 대표적인 보안 업체다. 보안도 SW지만 안연구소하면 보안만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SW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종합SW기업으로 변신하려면 이런 고정관념을 깨야 한다.

 

만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IBM도 종합 경영 컨설팅 회사로 변신한지 오래됐지만 아직도 메인프레임을 떠올리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고정관념을 깨는 것은 그만큼 어렵다. 그런만큼 김 대표는 적극적인 M&A를 통해 변신에 속도를 낸다는 전략이다.

 

"안철수연구소와 시너지를 낼 수 있다면 업종을 가리지 않을 예정입니다. 현재 구체적으로 협의가 진행 중이며, 2~3개 업체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좋은 아이디어가 있는데 자금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우리와 함께 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겁니다."


김 대표에겐 스마트폰도 전략적 요충지다. 안연구소의 차세대 성장 동력이 될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

 

"스마트폰을 통해 콘텐츠에 대한 중요성이 많이 강조되고 있죠. 소프트웨어에 대한 위상이 바뀌고 있으며, 지각변동이 곧 일어날 겁니다. 하드웨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소프트웨어입니다. 이런 상황이 기회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기서 안연구소가 리더십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겠죠. 창의력 있는 사람들을 키워주고, 지원하는 역할을 할 계획입니다."

 

안연구소는 최근 구글 안드로이드 플랫폼 기반 스마트폰용 보안 솔루션을 내놨다. 스마트폰으로 뱅킹, 증권 등의 금융거래나 온라인 쇼핑/서점 등을 이용할 때 정보 유출을 예방하는 'V3 모바일 플러스 트랜젝션'도 추가 개발 중이다. 안드로이드와 윈도모바일 플랫폼에서 해당 거래를 하는 동안 상주해 예방하는 기능도 상반기에 내놓기로 했다.

 

김 대표는 스마트폰을 통해 국내 IT 업계의 스펙트럼이 더욱 넓어질 것으로 기대한다. 하드웨어 다음의 에이스는 소프트웨어가 되어야 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글로벌 사업도 김 대표가 던진 승부수다. 그에게 글로벌 사업은 아직도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큐어소프트 시절, 그는 일본을 넘어 미국 시장 공략을 위해 적지 않은 물량을 쏟아부었다. 제품에 자신이 있었던 만큼, 당시 네트워크 보안 시장에서 세계 최강으로 군림했던 넷스크린(지금은 주니퍼네트웍스로 인수됨)과 한판 붙겠다는 자신감도 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반짝 실험이었다. 세계 변방의 보안 업체가 IT본토에서 신뢰를 확보하기는 의욕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만큼, 김 대표가 안연구소 해외 사업에서 어떤 성적표를 받아들지 주목된다. 김 대표는 해외 사업을 위해 온라인뱅킹솔루션 '안랩온라인시큐리티', '시큐어브라우저', 온라인게임보안솔루션 '핵쉴드'를 핵심 전략 제품으로 내걸었다. 보안관제서비스와 보안관제센터(SOC)도 전진배치했다.

 

열악한 벤처 생태계에서 멋진 재기를 꿈꾸며
 
60년생인 김홍선 대표는 수학이 좋아 이과를 선택했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서울대 전자공학과에 지망했다. ‘기술입국’이라는 표어가 너무나도 멋있었고, 사명감에 불타기까지했다고 추억할 정도다.

 

지금이야 공대가 한물갔다는 얘기가 있지만 70~80년대는 '공돌이'들의 전성기였다.  그는 공대를 선택할때부터 지금까지 과학 기술이 역사를 발전시키고, 삶을 풍족하게 하고, 우리 나라를 선진국으로 발전시킨다고 믿어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백성들을 위해 과학 기술을 중흥시킨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테크놀로지, 특히 벤처의 현실은 지금 바닥을 지나 지하실로 내려가는 상황이다. 과학에 대한 김 대표의 생각과는 거꾸로 굴러가는 모양새다.

 

이 대목에서 그는 할말이 많다는 표정이다. 고객 입장에선 겸손해도 벤처 육성 앞에서는 목소리에 힘이 부쩍 많이 실린다. 김홍선식 특유의 직설적인 표현들이 거침없이 쏟아진다. 결론은 과학기술이 한국이 역전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는 승부수라는 것이다.

 

"벤처 상황은 엄청나게 심각합니다. 또 실망스럽습니다. 얼마 전 절친한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똑똑한 학생 절반이 공공기관 쪽으로 갔다고 개탄을 하시더군요. 국가건, 개인이건 유일한 기회는 과학과 기술 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과학과 기술이 메인스테이지에서 자취를 감췄습니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에게 창의력도, 도전정신도 없어졌고요.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온 건 과거에 과학기술에 집중하고, 역전 드라마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김 대표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벤처를 떠나지 않았다. 벤처에 환멸을 느끼고 다른 분야에서 새로 둥지를 틀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벤처를 컴백무대로 삼았다. 갈 곳은 벤처뿐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안연구소가 안정적인 회사여서? 안연구소가 당장에 어떻게 될 회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어도 성장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종합SW기업으로 변신하고 글로벌 시장에서 지분을 확대하는 것은 천하의 안연구소에게도 어려운 숙제다. 김홍선 대표가 이를 모를리 없다. 말은 안해도,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안연구소의 변화는 그에게도 큰 의미를 지닌다. 남들은 '실패한 벤처인'이란 낙인이 찍힌 그가 안연구소 CEO가 됐다는 소식에 재기에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렸지만 김 대표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 재기는 명함이 바뀐 것만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단어다. 결과를 제대로 보여줘야 재기라는 말이 그의 가슴에 와닿을 수 있는 것이다.

 

안연구소의 변화는 현재 진행형이다. 김홍선 대표의 재기전도 마찬가지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 재기전은 데뷔전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다. 과거를 깔고 있기에, 재기전 결과는 다양한 스토리 구조를 가질 수 밖에 없다. 잘되든 못되든 스토리는 입체적일 수 밖에 없다. 파장도 클 수 밖에 없다.

 

김홍선 대표가 치르고 있는 재기전은 어떤 스토리로 이어질까? 파란만장한 벤처 경력을 가진 한 사나이가 다시 한번 심판대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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