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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대학은 ‘소유론적 욕망의 전당’ 아리스토텔레스 지성적 진리관의 영향으로

지금의 대학은 ‘소유론적 욕망의 전당’ 아리스토텔레스 지성적 진리관의 영향으로...

2010년 02월 08일(월)

인문학과 과학이 서로 협력, 미래를 만들어가는 인문강좌 행사가 최근 줄을 잇고 있다.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행사는 한국연구재단이 주최하는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학문 간 경계를 넘어, 세상과 대화를 시도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엿보이고 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석학들이 진행하는 인문강좌를 연재한다. [편집자 註]

석학 인문강좌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에서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는 지금의 대학을 소유론 적인 욕망의 전당, 지성(Intellect, Intelligence)의 전당, 의식의 전당 등으로 정의했다.

한마디로 지식의 세계를 소유하기 위한 투쟁의 장이라는 것. 이런 현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플라톤이 철학의 아버지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아버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이 말한 이상세계의 이데아를 현실세계로 끌어 내렸다. 이데아가 아니라 아이디어가 된 것이다.

▲ 6일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석학과 함께 하는 인문강좌'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은 주관적 생각이나 논리, 즉 ‘지성’(지능, Intellect)과 객관적 실재의 본질인 ‘사물’을 일치시키는데 있다.

여기서 지성이란 인간이 지각한 것을 정리해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식을 낳게 하는 정신 작용, 혹은 사고의 능력을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이 지성(지능)이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사물을 정확히 파악했을 때 그것을 진리로 보았다.

개념의 등급을 규명하는 것이 학문

그리고 이 진리탐구 과정 속에서 개념이 산출된다. 그 결과 (서양철학에 있어) 세상은 개념들의 집합이 된다. 명석하고(clear), 판명한(distinct) 개념의 집합이다. 이 수많은 개념들은 최상위 개념서부터 최하위 개념에 이르기까지 위계질서로 분류된다. 서양 언어에 존재론적인 명사들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신의 존재자, 천사의 존재자, 인간의 존재자, 식물의 존재자, 미생물의 존재자, 광물의 존재자 등등. 그리고 이 존재자들의 등급의 규명하는 것이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개념과 개념을 결합 또는 분리시키면 판단이 나오는데 여기서 나오는 참된 판단이 진리이며, 이러한 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 학문이 된다고 보았다.)

▲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서양 철학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에 기반을 두고 관념론과 실재론, 합리론과 경험론 등으로 발전시켜왔다. 관념론자들은 바깥의 실재가 의식의 관념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합리론자들은 바깥의 실상이 의식의 합리적(혹은 수학적) 요구에 복종하고 있다고 보았다.

실재론자들은 의식이 바깥 실재의 고유성에 복종하고 있다고 본 반면, 경험론자들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경험의 말을 의식이 듣고 있다고 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관념론과 합리론은 의식이 대상에게 (능동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반면, 실재론과 경험론에서는 의식의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지배당한다고 보았는데, 의식과 대상 간에 강조점이 다를 뿐 지성이 곧 사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신학과 인간학에서 물론으로...

이 같은 서양철학의 전통적인 체계는 인간의 존재자적 실체의 성격을 엄격히 구분해왔다. 100%, 90%, 80%, 70% … 50% … 등등. 여기서 100% 미만의 존재자들은 결핍의 존재자로서 (온전성의 결여인) 악의 존재방식을 소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반면 100%의 존재자는 곧 선이며, 악의 존재방식과의 대립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기독교의 원죄의식은 칸트가 ‘근본 악’의 개념을 도입한 결과다.

▲ 하이데거 (Heidegger, Martin) 
칸트는 신에 대한 존재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신은 내면적·도덕적 양심의 법에 귀속되는 것이지, 지식의 영역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신을 지식세계로부터 추방한 것이다.

칸티즘(Kantism)은 중세기의 신중심주의로부터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로 서양철학을 전환시킨 계기가 됐다. 근대 철학이 신을 인정하기는 했으나, 중세처럼 현실적인 역할을 긍정한 것이 아니라, 마치 상왕(上王)과 비슷한 위치로 밀어냈다.

김형효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신중심주의와 근대의 인간중심주의는 유사함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신학에 이어 새로 등장한 인학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진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이 문제점은 프로이드가 이성적 명령에 의해 사라지거나 없어지지 않는 괴물적인 힘, 즉 무의식을 증명함으로서 불거졌다. 이어 융은 구약의 욥기(Job)를 인용, 신은 심술궂은 악마성을 구비하고 있으며, 악마성과 대칭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대극적(對極的) 무의식을 주장했다.

구조주의 정신과 의사인 라캉은 신의 가장 무서운 적은 무의식이 인간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며, 신학과 인학이 무의식의 증상으로 분쇄됐다고 주장했다. 신학과 인학이 거세되고 물학(物學)이 등장한 것이다.

본능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

무의식의 등장과 함께 등장한 물학은 철학에서 구조주의 등장과 함께 인류학에서 레비 스트로스의 야생적 사유(토템적 사유), 라캉의 “그것이 말한다(Ça parle)”. 하이데거의 ”그것이 사유한다(Es denkt)”란 주장에 이른다.

▲ 라캉 (Lacan, Jacques Marie Emile) 
김 교수는 라캉이 말하는 “그것이 말한다”의 의미는 “내가 말한다는 것이 하나의 표피적 거짓말이고, 진실은 불교적 의미의 업감(業感)이 말한다와 대단히 유사하다”고 말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그것이 사유한다”의 의미는 서산대사가 말한 “아시거(我是渠)”처럼 “본능이 사유한다”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본능이란 동·식물의 존재론적인 욕망으로, 동·식물이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된 대극성을 통해 두 가지의 차이를 동시적으로 식별하고, 즉각적으로 지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김 교수는 말했다.

싯탈타 태자가 보리스나무 아래서 샛별을 보고, 문득 우주의 철리(哲理)를 깨달았다는 설화도 이 본능의 기호적 사유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듯 하다는 것. 또한 노자가 말한 ‘포일적(泡一的) 사유’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김형효 교수는 인간의 지능을 분별력과 분석력, 전문화가 가능한 능력, 과학지식의 탐구영역 등으로 정리했다. 반면 인간의 본능을 포일적 직관력, 본질, 열린 능력, 도(道)의 입문 능력, 인간의 본질, 불성즉신성(佛性卽神性)으로 정리했다.

특히 존재론적 도(道)에는 ‘내 것’이 없다고 말했다. 존재론의 도는 인간의 의식이 생각하는 견해가 아니고, 이미 있어왔던 진리이며, 하이데거의 Gewesenheit(having-been-ness), 즉 무위적(無爲的) 도와 통하며, 도덕윤리적 당위(當爲)의 도와 과학기술적 유위적(有爲的) 도와 다르다고 말했다.

이강봉 편집위원 | aacc409@naver.com

저작권자 2010.02.08 ⓒ ScienceTimes